편집실에서

현장의 저항에서 인문학의 길을 묻다

- 박정수(수유너머R)

지난 6월 2일 노들섬 도시농업공원에서 모내기 행사와 서울시 도시농업 원년 선포식이 있었습니다. 올해 처음 시작한 노들섬 시민텃밭에 저도 ‘만행’ 친구들과 한 뙈기 땅을 분양받아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도 오고 기자들도 많이 온다고 해서 만행 친구들과 두물머리에도 농사를 허하라는 피켓을 만들어 시위를 했습니다. 행사 끝나고, 혹시 언론에 나왔을까 기사 검색하다가 KBS 뉴스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오세훈 전시장이 오페라하우스 지으려고 270억 주고 산 “비싼 땅에 농사를 짓는 게” 말이 되냐는 논조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문들에도 그런 논조의 기사가 많더군요. 그 비싼 땅에서 난 쌀은 몇 억을 받아야 하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비난을 들으니 일전에 두물머리 농민들에게 전해들은 ‘농사에 대한 증오’가 어떤 건지 알 것 같습니다. 모든 걸 시장 가치로만 계산하는 빈곤한 사고에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그럼 270억 짜리 땅에는 도대체 뭘해야 하나? 한 벌에 수 천만원 하는 고급 모피 전시장이라도 만들면, 주상복합 아파트라도 세우면, 제값했다고 할까? 도시농업의 잠재적 가치는 차치하더라도, 당장에 돈 안 되는 짓은 하지 말라고 하면, 공공 도서관은 왜 짓고, 생태공원은 왜 만들고, 산과 갯벌은 왜 남겨 두나? 죄다 돈 되는 사업부지로 조성해 버리지. 차라리, 농사는 구질구질해서 싫다든가, 정부가 포기한 농업을 왜 진작시키려 발버둥치냐는 게 속 생각일 텐데, 두물머리 농꾼들 말마따나 “조상 중에 농사꾼에게 맞아 죽은 조상이 있는 걸까”요? 작으나마 제 밭에 씨 뿌리고 가꾸면서 농업과 농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도시인들이 늘어나는 게 두려운 걸까요?

도시농업 얘기 하려는 건 아니고, 돈 안 되는 일에 대해 얘기 하려다 노들섬 텃밭 얘기를 꺼냈습니다. <위클리수유너머> 119호 동시대반시대 주제는 ‘인문학, 현장과 부딪히다’입니다. 농사는 먹을 거라도 나오지만 인문학은 대체 왜 하는 걸까요? 게다가 장애인, 탈성매매여성, 빈곤청소년 등 먹고 사는 일의 지난함과 배제된 자의 소외감에 나날이 절망인 자들에게 인문학은 사치스럽게만 보입니다. 2008년부터 이들 배제된 자들의 ‘현장’에서 인문학의 미래를 찾고자 소위 ‘현장 인문학’을 해 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절실한 건 ‘빵보다 장미’라는, 물질적 빈곤보다 사유의 빈곤이 더 절박한 문제라는 생각으로 혹은 느슨한 세미나로, 혹은 서당 프로그램으로, 혹은 그들과 같이 살면서 인문학을 공부해 왔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장과 괴리되어 고상하게 고사되고 있는 인문학을 구원하기 위해서….

시혜의 마음도 희망의 환상도 없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지난 5년의 현장인문학을 돌아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이 큽니다. 한마디로 인문학에 대한 ‘현장’의 저항만 체험한 5년이었다고 할까요. ‘하고는 싶지만, 다른 일 때문에 여유가 없다’, ‘하기 싫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뜬구름 잡는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또 다른 강요이고 제도적 폭력이다’ ‘너무 어렵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 ‘더 재미있게 해 달라’는 얘기에 맥이 빠지고 어찌할 바 모를 경우가 허다합니다. 당장 때려치우고 ‘원하는’ 대중을 찾아 달려가고픈 마음도 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러지들 못합니다. 정 때문도 아니고, 관성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그 ‘현장의 저항’ 속에서 ‘배운다’는 것, ‘사유한다’는 것, ‘철학한다는 것’, ‘비판한다는 것’의 한계와 본질을 봤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우린 여전히 인문학은 책 속에만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문학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인문학적 실천과 인문학적 삶을 행하는 것과 뗄 수 없음을 은밀히 모른 척해 왔습니다.

현장의 저항은 현장과 인문학 양편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지 각자 제자리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게 아님을 알기에 우린 계속 현장과 인문학을 충돌시킬 것입니다. 우선 책속의 지식 전달에 집착하지 말고 배움의 실행에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는지, 배움의 관계는 어떤 일상의 관계들과 결합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기로 했습니다. “답이 없을 때 가장 좋은 답은 질문 자체다” 라는 지율스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모두가 해답과 성과만 기다릴 때 문제와 질문 자체를 돌아보는 것이 인문학적 에토스가 아닐까 합니다.

응답 2개

  1. 결을 따라말하길

    전 단 몇번 그것도 가족과 아는 지인 몇분께 시도하다가 그 간극이 망각의 레테의 강처럼 나를 잃어버리고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넓게 보여 지레 포기했던 절망의 곳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가는 모습이 존경스럽기만 하네요.

  2. […] | 편집실에서 | 현장의 저항에서 인문학의 길을 묻다_박정수(수유너머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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