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약하고 선한 자들의 승리를 위하여

- 박정수(수유너머R)

요즘 드라마 <추적자>에 빠져 있습니다. 보는 내내 공포와 연민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계속 보게 됩니다. 절대악으로 무장한 권력자들에 대한 공포와 힘없이 착하기만 한 주인공에 대한 연민에 잠자리조차 뒤숭숭하지만 그 압도하는 리얼리티에 매혹되었습니다. 대선가도에 걸리적거리는 ‘벌레’같은 여중생을 살해하고 그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법부를 매수하는 대기업 CEO출신 정치인과 그가 선망하는, 그 뒤에서, 그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는 재벌 회장이 현실의 특정 정치인과 재벌 회장을 연상시키는 리얼리티는 차라리 부차적입니다. 한국 사회 권력 피라미트의 정점에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재벌이 있고 그 아래 행정부와 국회가 있고 그 아래 권력자들의 집사노릇을 하는 사법권력이 있으며 그들 주변에 여론의 향배를 좌우하는 언론과 대중매체가 포진해 있다는 구조적 리얼리티 역시 디테일은 몰랐지만 익히 알던 진실입니다.

이 드라마가 더욱 충격적으로 발굴한 현실성은 그 권력관계들의 마디마다 있는 인간들의 성격과 실존의 윤리입니다. 절대악과 절대권력의 화신인 ‘동윤’(김상중)을 위시하여, 그가 자신과 똑같아서 두렵다는 재벌회장(박근형), 그리고 그들의 집사노릇 하는 대법관 출신의 변호사의 말과 행동으로 폭로된 그 ‘사이코패스’적 인성과 윤리에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마차가 먼 길을 가다보면 깔려죽는 벌레가 있기 마련이지”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생각하면 장사 못한다.” “검사는 나쁜 놈을 잡는 게 아니라 잡을 수 있는 놈을 잡아야 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양심 따위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자들이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마치 장기마를 옮기는 악신처럼 진실을 조작하고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그들에게서 ‘악마’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주인공 친구들의 가장 연약한 영혼을 파고들어 그들의 우정을 돈으로 매수할 때입니다. 빚을 갚아주는 대가로 오랜 친구의 딸을 죽이게 하고, 30억으로 쫓기는 후배형사의 처소를 가리키게 하는 만드는 데서 저는 악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그때서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나타난다”는 짐짓 ‘진실’의 말로 그 같은 악마적인 선택을 강요한 자신의 악함을 덮어 싸는 데서는 치떨리는 모멸감을 느낍니다. 물론, 재벌 회장이 “사람들이 동윤이를 개혁의 기수다 뭐다 칭송하는 건 땅 있는 사람한테는 땅값 올려준다 하고 집있는 사람한테는 집값 올려준다 하고 월급쟁이한테는 월급올려준다 하는 말에 욕심나서인 게 창피해서 그러는 거다”는 정신분석에 가슴 뜨끔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인간의 영혼이 악하거나 약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재벌회장이 오직 자기 아들과 딸에게만 약하고 그 약함 때문에 악을 서슴지 않는 것도 사실이고, 백홍석의 친구와 선배가 자식 때문에 친구의 딸을 죽이고 후배를 배신하는 것도 그럼직합니다. 그러나 배신한 친구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고 진실을 위해 절대권력에 맞서는 힘도 백홍석의 자식에 대한 연민에서 나옵니다.

<위클리수유너머> 이번호는 권력자들에 의해 약하고 악하다고만 치부된 바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강함과 선함을 믿고 싸우는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바로, 이계삼 선생님입니다. 최근까지 <위클리수유너머>에 한달에 한 번 칼럼을 연재하시다가, 오랜 교직생활까지 접고 밀양 765kv 송전탑 공사 반대운동에 전념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동안의 칼럼과 이번 고병권의 인터뷰 기사에서 느껴지듯이 이분에게서는 70년의 영성이 느껴집니다. 맑시즘과 조직적 운동 이전, 신앙의 믿음과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가없는 연민으로 낮은 곳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받고 그들과 함께 선을 위해 싸운 이들의 풍모 말입니다. 이 반시대적 영혼에서 제도개선과 조직운동의 대세 속에서 상실된 변혁운동의 영성을 발견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비타협적인 연민에서 비롯된 끈질긴 연대, 효율과 대의라는 미명 하에 관료화되고 비겁해진 조직운동에 대한 비타협적인 비판과 투쟁정신, 지배자들조차 그 때문에 악을 자행하는 자식에 대한 연민을 극복하려는 비타협적인 교육철학, 자기 자신의 나태와 비겁에 대한 비타협적인 양심, 비록, 섬세하다 못해 약하게 보이는 감성 때문에 몸과 영혼이 지쳐버리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약한 것들의 강함에 대한 그분의 믿음을 믿기에, 든든한 신뢰와 응원의 마음을 전합니다. 건강하시고, 건승하십시오.

이계삼 선생님 인터뷰를 시작으로 ‘동시대반시대 人’이라는 코너를 주기적으로 기획하려 합니다. 유명하지 않지만 그 이름 속에 삶과 싸움의 특이성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밀착 취재하는 코너입니다. 앞으로 많은 기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이계삼 선생님을 인터뷰하면서 밀양 송전탑 공사가 강행될 위험이 임박했음을 느낍니다. 그에 따라 늙은 농민분들의 결전의 의지 또한 높아가고 많지는 않지만 외부 세력들도 밀양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예고한 ‘두개의 문을 본 사람들’ 기획을 한 주 미루고(그때쯤엔 10만 돌파하겠죠?) ‘밀양, 765kv’를 싣고자 합니다. 핵발전 전력을 위한 송신선로의 초고압만큼이나 압력이 높아진 밀양, 그 전쟁의 기운을 전하고자 합니다. <추적자>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어쩌면 약하고 선한 자들의 막판 반전에 허구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핵마피아들에게 벌레 취급당하는 늙은 농민들의 승리에 자그마한 힘이나마 보탤 궁리를 하겠습니다.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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