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7). – 추색이 완연하다.

- 김융희

지난 겨울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은 체, 유례 없는 강추위를 시작으로, 봄가믐이 여름까지 이어졌다. 타들어 가며 고사하는 농작물을 아무런 대책 없이 지켜만 보고 있는데, 또다시 몰려온 국지성 집중 호우로 이번엔 물난리를 겪었다. 곧이어 두 세 번의 작은 태풍은 다행히 이리 저리 비켜 가더니, 갑자기 메가톤급의 태풍이 새끼까지 뒷세우며 몰려왔다. 애비는 광풍의 힘자랑에, 새끼는 물벼락으로 산천을 온통 휘져었다. 무슨 대책은 커녕, 도대체가 숨 돌릴 겨를이 없었다. 요즘 계속 벌이고 있는 국제 행사들처럼, 마치 “자연의 기후 변화 전시 행사”를 여는것 같다. 각종의 기상 재해가 빠짐없이 골고루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독한 무더위 속에 지난달 중순부터 태풍으로, 집중호우에, 무더위로 어제 아침까지는 범벅의 지랄같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후가 되면서 싹 변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활짝 개인 맑은 하늘이다. 그동안 지켜만 보았던 허트러진 가을 채소들 정리에 갑작스런 손길이 바빴다. 모진 비바람에 어린 싹들이 넘어지고, 파묻히고, 덮이여 애처로운 몰골이 목불인견이다. 그들과 눈싸움을 계속하며 아린 허리도, 뻐끈한 종아리도 아랑곳이다. 어느덧 해가 서산에 기운듯 싶다. 허리를 펴 하늘을 쳐다봤다. 꼭 숲속의 넓고 깊은 호수가 하늘을 오른듯 싶다. 쪽빛 하늘에 햇살이 찬란한 금빛이다. 아! 위대한 자연이여!

수요일은 전시 행사로 인사동길이 많은 인파로 분주하다. 오늘 꼭 참석해야 할 전시행사가 있다. 임박한 행사에 지금 부지런히 서둘러도 맞추기가 어렵겠다. 그래도 얼굴은 내밀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당연지 범사다. 시골 농사꾼이 별다르게 꾸밀것은 없다. 얼른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바지에 써츠를 걸치고, 임박한 열차를 겨우 탔다. 긴장이 풀리며, 몽롱한 정신에 마음도 골통도 모두 멍멍이다. 스르르 졸음까지 겹친다. 두어 시간을 졸린 듯, 취한 듯, 비몽사몽지간으로 보냈다. 어느덧 종각역이다. 인파를 헤치며 행사장을 향해 부지런히 또박 또박 걸었다. 내가 사는 산촌과는 전혀 딴 세상이다. 숨이 막힌다.

[인생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유와 무, 음과 양 등이 모두 동일한 경계선상에서 그 뿌리를 맞데고 있다. 이런 이분법적인 구조는 그 경계선상에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나는 조형의 구조에서 이런 경계선상을 표현하여 감상자들에게 내면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장(場)을 제공하고 싶다. 스테인리스 스틸의 투명성을 이용하여 작품의 감상자가 조응하는 경계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스테인리스 스틸의 투영에 의한 소통을 통하여 감상자에게 ‘행복 바라보기’의 사유적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감상자들이 작품속에 투영되는 각자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 바라보기’의 장과 더불어 내면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완석 화백의 전시 도록의 ‘작가노트 중에서’이다. 일층에서 삼층까지 가득 메운 작품들, 투명하게 반짝이는 스틸 캔버스에 꽉찬 무리들의 행복한 춤사위가 춤바람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분방 자재의 힘찬 기백이 당돌하다.

모처럼 지인들끼리 인사동 골목의 민속주점이었다. 몇 순배의 막걸리잔을 나누다보니 꽤 시간이 지났다. 오늘은 가족을 찾았다. 얼떨떨 술기운에, 모처럼 함께한 가족들로 저녁을 그저렁 지나쳤으나, 해야 할 밀린 농삿일에 마냥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일찍 나서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청명한 하늘에 햇살이 빛나며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경원선 완행 열차로 전곡을 지나 연천 평야를 달린다. 모진 시련을 버티며 잘 자라준 벼는 벌써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벌써 노릿하게 익어가는 벼이삭도 보인다. 아! 가을이다.

햇살은 따갑고, 산들 바람은 한결 시원하다. 짙푸렀던 무성한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며 한결 겸손해 있다. 듬성 콩밭에 키다리 수수도 머쓱히 고개를 숙였다. 먼산의 푸른 숲도 여름에 비해 많이 가라앉잤다. 공기도 산아래로 흘러 내리고 있다. 모두가 가라앉은 분위기이다. 가을은 이삭이 영그는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이다. 영근 수확의 계절은 낮게 갈아 앉는다. 그래서 가을은 겸손의 계절이다. 그리도 까탈 부리며 지겨웠던 기상 변화에도 묵묵히 의연하게 극복하여 탐스런 결실을 이룩한 자연의 승리이다. 이는 고개 숙여 조용히 감사하는 겸손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장포에서 종일을 보냈다. 몸의 고단은 모르겠는데, 어제 오늘로 싹 변해버린 가을 날씨에, 생각은 자꾸만 가라앉은 자연의 모습들이다. 원고를 챙기는 일도 잊은 체, 풍성한 수확으로 활짝 웃는 우리 소농들의 행복한 모습만이 자꾸만 머리를 맴돈다. 풍요의 가을이 오고있다. 고완석 화백의 전시 주제인 ‘행복 바라보기’를 풍성한 수확의 바람인 나의 ‘행복 바라보기’로 삼겠다. 이 가을에 보다 겸손해 지자.

응답 2개

  1. 김정미말하길

    선생님!
    여름에 한 번 놀러오라는 말씀을 듣고도 연락도 못 드렸네요. 선생님의 글을 보니 그 곳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 합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저의 생활에만 푹 빠져있었던 여름입니다. 너무도 더워 여름이 길게만 느껴지더니 어느새 가을입니다.
    오랫만에 컴퓨터 앞에 앉으니 선생님 글들이 반갑기만 하여 이렇게 자국 남깁니다.
    여전히 건강하시고 즐겁게 활동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 그럼…..이만

  2. 말하길

    샘, 샘 덕분에 올 여름 ‘비듬’ ‘고추’ ‘깻잎’ ‘오이’ 풍성하게 잘 먹었습니다. 폭풍과 호우에 야채값이 비등하니까 더욱 샘의 선물이 간절히 고맙게 느껴집니다. 배추는 어떻게 다 심으셨나요? 올해 김장농사는 어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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