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예쁘고 향긋한 방울토마토

- 숨(수유너머R)

생리양이 많은 둘째 날, 피를 흠뻑 머금은 면생리대가 묵직하다. 찬물에 하룻밤 담궈 놓으면 선홍빛 핏물이 쫙 빠져나온다. 피냄새가 약간 비릿하지만 꾸릿꾸릿하지는 않다. 생리혈 자체의 냄새는 역겹지 않은데 화학생리대를 쓰면 냄새가 변하게 된다.

핏물을 뺀 생리대에 비눗칠을 열심히 해가며 그 달의 몸 상태를 가늠해본다.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후로 생리양이 매달 야금야금 줄더니 30대에 접어들자 감소추세가 확연하다. 주변 언니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이 서른 넘으면 원래 그런 거라고 한다. 손빨래의 양이 줄어 편하긴 하지만 좀 섭섭하다. 싱싱한 내 몸에서 언제까지 퐁퐁 솟아날 줄 알았던 생리혈도 이제 귀한 것이 되어간다.

팅팅 붓는 얼굴과 뻐근한 아랫배, 묵직한 다리. 한 달에 한 번 내 몸은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는다. 면생리대를 쓰면서부터 월경은 때 되면 겪는 변화만이 아닌, 수행해야하는 노동이 되었다. 생리대 빨래가 처음에는 귀찮았는데 하다 보니 꾀가 생겼다. 핏물을 뺀 후 세탁기로 여벌빨래를 한다. 비눗칠을 해서 뜨거운 물에 하룻밤 불려놓고 손으로 비벼 빤다. 햇빛에 잘 말린다. 생리가 끝나고도 며칠간은 생리대 정리 노동이 덧붙는다.

올해는 여기에  하나의 과정이 추가되었다. 생리대에서 빠진 핏물을 물 조리개에 담아서 옥상으로 가지고 가 상자텃밭에 휘휘 뿌려주는 거다. 반지하방을 탈출하여 옥상 바로 밑 3층에 입주한 나는 상자텃밭 농사의 로망을 막 이루기 시작한 터였다. 고추, 호박, 참외, 방울토마토, 부추, 쌈채소를 심었다. 냉장고에서 쉽게 상하던 파도 흙상자에 꽂아 놓았다. 매달 내 몸에서 나온 생리혈은 그곳에 뿌려졌다. 왜 그랬냐고? 어느 여성 농민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해봤다. 그 분 밭의 농작물이 너무 풍성하게 잘 자라서 이웃들이 비결을 물어봤단다. 한참을 웃던 여성 농민의 대답. “생리혈을 거름으로 줬다.” 내가 이 얘기를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듣자마자 바로 이거야 하고 다음 생리날을 기다렸다.

상자 다섯 개는 음식물 퇴비의 양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음식물 퇴비만들기는 포기했다. 괜찮다, 나에게는 생리혈이 있으니까. 옥상 위의 채소들은 하루 한통의 물과 매월 두 세 통의 핏물을 받아먹었다. 5월부터 한 4 달 동안 핏물을 뿌려줬나 보다. 그렇게 옥상에 올라갈 때는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작물의 가지 사이를 들여다본다. 어디 보자, 참외 꽃이 몇 개나 폈나, 방울토마토는 얼마나 익었을까. 작고 노란 참외꽃과 나날이 빨걔지는 방울토마토를 확인하는 뿌듯함이란! 싱싱한 파는 필요할 때마다 쏙쏙 빼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난 여름 옥상 텃밭에서 난 수확물은 참외가 7개, 고추가 3 봉지, 쌈채소 2 봉지, 부추 3 단, 방울토마토 3 봉지 정도였다. 호박은 일찌감치 병 든 것을 제 때 방제해주지 않아 망했다. 누군가는 나의 수확물을 보고 에게~고작 그 정도?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자 둘이 사는 집이라 먹거리의 소비 속도가 느려 이 정도로 충분했다. 오히려 고추는 둘이 먹기에 양이 많아, 나눠주고 남은 것은 냉동실에 보관중이다. 아직 수확물을 갈무리하는 실력은 없어 내년에는 주종목을 변경하려고 한다. 둘 다 샐러드를 좋아하니 그때그때 뽑아 먹을 수 있는 쌈 종류와 간식거리로 먹을 수 있는 참외, 방울토마토, 딸기 등으로 할까 싶다.

시뻘겋고 비릿한 생리혈은 화학생리대에 꽁꽁 뭉쳐 쓰레기통에 버려야할 것으로 취급당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 여름, 생리혈을 다르게 대우해 보았다. 면생리대가 고이 품어서 물에 뱉어놓은 생리혈을 상자텃밭 속에 뿌렸고 식물들은 그것을 빨간 토마토, 노란 참외, 파란 고추, 싱싱한 부추의 육즙으로 만들었다. 동거녀와 나는 수확물을 먹으며 그 육즙의 향긋함에 감탄했다. 아무 쓸모없이 버려졌던 나의 생리혈이 예쁘고 향긋하게 태어나는 경험. 의외로 괜찮았다. 매월 시뻘건 대야와 약간의 피냄새를 아무 말 않고 감내해준 친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응답 4개

  1. 찬비말하길

    우와*_* 정말 피와 땀의 결실?!이네요ㅎㅎ

  2. 미리퐁말하길

    허허, 덤 샘의 똥거름은 익숙한 소재라 별로 놀라지 않았는데요,
    생리혈로 기른 작물의 육즙이라니.. 정말, 저 벌겋고 노란것들이 살아있는것처럼 보이는,
    갑자기 육식을 왠만해선 하지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지..

    • 말하길

      식물이든 동물이든 서로의 폐기물 혹은 잔해들이 순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건데. 생리혈이 토마토의 육즙으로 전환되는 이미지가 뭔가 비릿하고 징그럽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 자체가 문명화된 감각에서 생기는거 같아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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