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술, 밤, 음악, 그리고 당신에 기대어 떠오르는 말

- 숨(수유너머R)

눈발이 아래위로 휘몰아치던 날, 그 풍경을 같이 보고 있던 연구실 동료에게 말했습니다. “이런 날은 밤새도록 술을 마셔야해요.”  이날 밤 오랜만에 취했습니다. 분분이 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한잔, 두잔, 석잔… 맞은 편에 앉은 친구와 근황을 나누다가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평소 섭섭했던 이에게 전화해서 꼬부라진 목소리로 투정도 늘어놨구요. 다음날 아침, 세상은 하얀 눈가루를 뒤집어쓰고 빛나고 있더군요. 전날의 술주정은 모두 그 속에 덮여있을 거라 믿기로 했습니다.

겨울은 술마시기 좋은 계절입니다. 짜릿한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몸을 데웁니다. 얼굴이 이내 달아오르고 몸 여기저기에 모닥불이 피어올라요. 따뜻한 열기를 받아 심장이 펌프질을 열심히 해댑니다. 내뱉는 숨에서 알콜향이 올라오고, 내뱉는 말에서 진심이 묻어납니다. 앞뒤 사정을 생략해도, 촉촉한 눈빛으로 우리는 서로를 보듬습니다. 기꺼이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계절, 겨울. 그래서 겨울밤에는 술을 마십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다음날이면 후회를 합니다. 너무 내밀한 마음까지 보여준 건 아닐까. 술은 깼지만 낯이 뜨거워집니다. 낮의 언어와 밤의 말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에 이불 속 하이킥을 날립니다. 하이킥을 백번 찬대도, 술술 흘러나왔던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대신 금주를 선언해봅니다. 혼자, 조용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기에 혼자만 조용히 하는 겁니다. 선언은 쉽게 깨어지죠. 태양처럼 환한 대낮의 말만 있다면 답답하니까요. 밤은 오프더레코드의 시간입니다. 공신력을 갖지 못할, 아니 그럴 필요도 없는 말들이 오고갑니다. 그런 점에서 밤은 우리에게 소중한 시간입니다. 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혹은 보고 싶지 않았던 내 몸속의 말들이 기어 나옵니다. 밤의 말이 목소리를 갖습니다. 술에 기대어. 어둠에 기대어. 음악에 기대어. 그리고 맞은 편에 앉은 당신에 기대어.

그 말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서 표정으로 대신할 때도 있습니다. 낮의 태도와 상반된 말이 등장해서 당혹스럽기도 해요. 하지만 우리는 밤의 말을 잘 버무려, 대낮의 언어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여백에 넣습니다. 그림이 썩 이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어때요. 그게 우리의 관계들인 걸요.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이 있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합니다. 애매하고 모호한, 명확함에 짓눌린, 흐릿한 부분들. 규명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니까 드러나는 것을 소중하게 건져올립니다.

이번 호에서는 “두물머리 토크쇼”를 다룹니다. 2009년 4대강 사업반대, 팔당 유기농지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투쟁이 2012년 8월 정부와 합의를 하며 일단락되었습니다. 두물머리의 싸움이 함께 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정리하고 이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가 이번 토크쇼입니다. 10월과 11월, 매주 1회씩 총 6주동안 진행되었습니다. 투쟁 속에서 엮어진 관계와 두물머리라는 장소가 각자의 삶에 깊이 드리운 의미를 되짚어보는 시간이었겠지요.

두물머리의 3년을 담아내는 밤은 아무리 길어도 짧았을 듯합니다. 그 밤, 드러나고 조근조근 갈무리된 말은 이후 두물머리를 지키는 촘촘한 그물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응답 2개

  1. 말하길

    그 꼬부라진 혀의 수혜자가 바로 나~? ㅋㅋ

  2. 말하길

    ㅎㅎ 술을 마시면 차도녀 숨님에게 숨어있던 부산 가시내의 애교와 씩씩함이 나타나죠..그게 참 보기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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