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마을 만들기 파트4-3] ‘그들’로부터 멀리 – 2013년 4월에서 6월까지의 어떤 감정 –

- 신지영

* 어떤 감정에 대해서. 

위클리에 글 쓰는 일이 많이 늦어졌다. 미안함이야 말할 수 없다. 그런데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글을 쓰지 못한 요 삼 개월 간 가슴 속에 그득해지고 있는 어떤 감정이다. 이 감정은 올해 4월에서 6월초까지 팽배해지고 있는 내셔널리즘적 분위기–신오쿠보의 반한 데모, 북한 때리기식 보도, 하시모토 발언 등– 때문에 고개를 들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저 멀리 있거나 과거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법과 식민주의가 갑자기 방문 앞까지 들이닥친 기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글쓰기를 2~3개월간 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내게 글쓰기란 여러 가지 장소들을 연결하면서 스스로의 좌표를 한 걸음 떨어져서 봄으로써 그 좌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행위였던 탓이다. 표현되지 못한 그 여러 순간들은 벌써 먼 과거의 남의 일인 듯도 느껴지는데, 동시에 해결되지 못한 감정도 그득해 자꾸만 심술궂어진다. 따라서 이번 글은 원거리와 근거리, 법과 일상, 현재와 과거가 잘 구별되지 않는, 2013년 4월에서 6월 초에 걸친 어떤 도쿄 유학생의 불평불만이 될 것 같다. 이 불평불만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명명백백히 존재하는 법과 식민주의적 감정을 못 본 척하지도 않지만, 동시에 마치 법과 식민주의가 없는 것처럼 살아갈 수는 없을까?

 사진1 – 4월 자이도쿠카이 집회에서 “중국 한국 유학생에게 연간 380만, 우리들의 세금”

 

 * 3월에서 4월로 – 입국관리소의 ‘그들’.

아무리 국적과는 상관없이 고분고분 살아보려고 해도 1년에 한번씩 외국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곳이 있다. 어김없이 올해도 비자갱신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전에 입국관리소에서 우연히 내게 말을 걸어 왔던 이주 노동자는 자신은 3개월마다 이곳에 온다고 했다.

작년 7월부터는 일본의 외국인등록증이 사라지고 체류카드로 대체되었다. 비자 갱신을 하러 가니 재입국 허가 신청을 별도로 하지 않아도 된다며 자랑스럽게 설명해 준다. 그러나 외국인 등록증에서 체류카드 제도로 바뀐 이유는 일본 안에서 외국인이 전직이나 이사를 하거나 출입국을 하는 모든 동태를 보다 신속하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외국인 등록증 제도 하에서는 비자를 발급받은 기간 내에는 이사나 전직을 하더라도 출입국관리소에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체류카드로 변한 뒤로는 전직, 이사 등 일본 내 외국인의 움직임이 바로 바로 입국관리소에 신고/기록된다. 체류카드로의 변경은 일본 내 외국인의 동향을 전체적으로 일제 정리하는 동시에, 일본 내 이주 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이 늘고 전직 이사가 잦아짐에 따라 이러한 동태를 좀 더 면밀히 파악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입국관리소의 4월은 사람들로 붐빈다. 나는 타치가와에 있는 입국관리소 출장소로 가는데 한번 가면 2~3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한다. 걷기는 멀고 버스는 띄엄띄엄 오는 출장소에 도착하면, 출장소 안 좁고 답답한 의자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주변 빈터 바닥에 쭉 늘어서 앉아 있다. 나는 남는 시간 동안 논문 복사나 하자는 마음에 들어 편의점으로 갔다. 입국관리소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라지만 꽤 거리가 있어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서류를 복사하는 외국인들이 계속 온 탓에 복사하는 시간은 점차 길어졌다.

사진2- 입국관리소 앞의 도로. 이 비포장 도로에 삼삼오오 앉아 기다린다.

한참을 편의점에 있다 보니 직원들이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시아계 외국인에게는 일본어가 조금 서투르면 금세 무시하는 태도와 뻐기는 듯한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서툰 일본어로 이곳 편의점을 전전하는 외국인들을 매일같이 대하는 그들로서는 짜증날 수도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 순간 키가 큰 백인 남성이 들어왔다. 그 백인남성은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지 영어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편의점 직원들의 태도는 급변하여 두 명이 모두 달려들어 서툰 영어에 손짓발짓을 섞어 너무나 친절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마치 백인남성이 일본어를 못하는 건 당연하며 영어를 잘 못하는 자신들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근데 여긴 일본의 편의점이 아닌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크게 인사하고 “땡큐 베리 마치”라는 답을 들으며 그를 내보낸 직원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씨는 영어 참 잘하네요. ” “아니 뭘요.” “저는 진짜 못해요 머리가 나빠서.” 순간 나는 가슴 속에서 어떤 감정이 불쑥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시아계에 대해 뻐기는 듯하던 일본어는 백인남성 앞에서는 쑥 들어가고 대신 영어가 튀어 나왔다. 스스로를 “머리가 나쁘다”라고 비하하길 서슴지 않는 영어. 일본인이 지닌 동양인에 대한 우월감은 곧잘 서양인에 대한 동경과 아부로 변화되곤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일본인들 아니 아시아인들 전체의 감성에 자리한 서양에 대한 열등감의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무렵 일본의 한인 타운이 있는 신오쿠보에서는 매주 자이토쿠카이(在特会: 재일의 특권을 허가하지 않는 시민의 회)의 반한 데모가 있었다. 불과 1년 전까지 일본 거리를 가득 채웠던 반원전 데모는 어느새 사라지고, 거리는 내셔널리즘적인 분위기로 경직되어 가고 있다. 이 급작스러운 변화는 그 이전의 반원전 데모가 과연 일본 사회를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게 한다. 나는 반한 데모를 한번쯤 가서 볼 일이라곤 생각하고 있었지만, 보러가자니 신오쿠보에서 살아온 분들에게 어쩐지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자이토쿠카이 소속 일본인들과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어떤 일본인 연구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가 보고 싶지만 두려워서요” 했더니 그럼 자신이 같이 가주겠다고 한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는 그분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다시금 불쑥, 두려운 건 바로 이 친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이토쿠카이를 보러 갔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위험한 일을 당할까봐 무섭다기 보다는 나를 “보호받아야 할 위치”에 놓는 이 시선이 두려웠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감정적 우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리고 반한 데모를 봄으로써 내 속에서 싹트게 될 내셔널리즘적 감성도 두려웠다. 저항과 비판의 정신을 잃지 않는 한편, 그 속에 빠져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둔탁하게 차오르는 내 가슴 속 훨씬 내밀한 저항 감정이었다.

사진3- ‘peace’라고 쓴 우산을 들고 자이도쿠카이의 반한 집회에 말없이 저항하는 어떤 여성.

파농은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에서 알제리 민중의 민족해방전선에서 비롯된 정신질환을 다루며 이렇게 말한다. “식민주의는 타인에 대한 체계적인 부정이며 타인의 인간적 속성 전부를 부인하려는 광포한 결단이기 때문에, 피지배 민중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실제로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자답하도록 강요한다”(281-282,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2007). 나는 그 어떤 감정이 내 속에서 일어날 때마다 파농이 말한 그 자문자답형 질문을 떠올리곤 했다.

 * 4월에서 5월로 – 재판소의 ‘그들’.

5월은 입국관리소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내 서류 중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법은 두렵고 귀찮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매우 주의를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뭔가 하나가 꼭 빠져 있는 것이다. 법과 무관한 듯이 살아가는 나는 사실 법에 너무나 무능력하다. 그 전화로 땅밑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국적/법이란 원래 이 흔들리는 지반 위에 사람들을 나누어 관리하고 자문 자답형 질문처럼 예기치 않게 방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고한다. 너는 법 밖에 있어. 그러니 너는 이곳에서 살 수 없어. 물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지만 이 전화는 몇 주 전 미나마타병 관련 재판을 떠오르게 했다.

일본 쿠마모토현 질소공장에서 흘러나온 수은에 중독되어 발생한 미나마타병은 그것이 병으로 공식 인정되기까지도 지난한 세월을 보냈으며, 정식 인정된 후 현재까지 57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미나마타병으로 인정받지 못한 7만명의 미결정 피해자가 있다. 4월 16일에는 미나마타 병에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재판이 있었다. 하나는 F씨의 경우로 일심에서 승소하고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그러나 의사가 미나마타 병에 대해서 위증을 하도록 환경청이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항소심의 패소를 재고하도록 요청하는 최고 재판이었다. 소송 당사자는 변론 직전 87세로 세상을 떠나고 다른 계승자가 재판을 이어받고는 있지만 그 또한 고령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조구치씨 경우였는데 일심에서는 패소하고 항소심에서 승소한 상태였다. 그는 죽은 어머니가 미나마타병에 걸려 죽었음을 입증받음으로써 다른 미결정 미나마타병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 또한 81세의 고령이었다.

이번 최고 재판은 미결정 미나마타 환자들의 이후 판결에 큰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소송을 건 당사자들이 모두 고령이어서 마지막 기회인 듯한 절박함이 있었다. 더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으로 인한 사후 발병을 판단할 때 미나마타 병을 둘러싼 소송은 중요한 전례로서 작용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이렇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에도 이번 소송은 이상하리만큼 급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활동가들은 이 사건을 급히 무마하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고 재판소 앞에서 항의 집회를 하고 및 환경성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있었다.

 사진4- 환경청과 면담 중 환경청 공무원에게 사과할 것을 요청하는 미조구치씨.

나는 수업이 있어서 재판이 끝난 뒤 기자회견장에야 도착했다. 의외로 최고 재판소는 F씨와 미조구치씨의 손을 들어주었고 기자회견장은 흥분과 기쁨으로 출렁였다. 그러나 이 판결은 너무나 늦은 인정이었다. 한평생 미나마타병 및 법과 싸워온 그들로부터는 복잡한 심경들이 전해져 왔다. 기자회견장은 술냄새인지 땀냄새인지 아니면 이 모든 법과 싸워온 세월의 냄새인지 모를 냄새로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마치 무엇인가에 취한 듯이 몽롱해졌다. 이들은 평생 법과 싸우며 살라온 사람들이었고 법과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소송 당사자 미조구치씨는 매우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환경청 공무원들과의 면담에서 그는 조용하게 사과를 요청했다. “생선을 먹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는 그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나 앞에 앉은 네명의 환경청 공무원들은 다들 발령받은 지 1년도 안 되는 신참이었고 상부로부터 “사과를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듯했다. 이야기 도중 “상소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말라”고 환경청 공원들이 필담을 나누는 쪽지를 앞줄에 앉았던 방청객이 낚아채 모두에게 공개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미조구치씨에게 법은 곧 이러한 사과를 받아내고 자신의 어머니의 고통을 인정받고 더 이상 이러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 간담회에서는 어떤 활동가가 약간 술에 취한 상태로 울음 섞인 말로 이렇게 말했다. “정말 기뻐, 그렇지만 판결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어. 감각장애가 뭔지 알아? 자신이 만든 음식이 맛있는지 어떤지 점점 모르게 되어가는 거야. 느낄 수가 없게 된다구. 법은 어찌되든 상관없어. 그게 감각장애라는 거야.”

 사진5- 환경청과의 면담 중 공무원들 사이의 필담이 폭로되었다. 여기에는 “상소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말아라”고 씌어 있었다.

이들은 항소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삶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곧 삶이라고 느끼게 한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스스로가 법 밖으로 추방된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법과의 싸움(혹은 놀이)을 멈추지 않는 방법을 그들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우리가 법의 작동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그것이 절망인 동시에 끈질긴 소송의 원동력일 수 있었던 순간에 대해서 말이다.

* 5월에서 6월로 – 내 방의 그들.

5월에 들어오면서 하시모토의 발언은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내 삶이 이 발언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4월말부터 5월에 걸쳐 뭔가 작은 사고가 계속 일어났다. 불에 덴다거나 가시가 박혔는데 마취하고 빼낸 뒤 꿰매야 한다거나, 자전거에서 떨어져 타박상을 입는다거나 하는,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무척 귀찮은 상처들 말이다.

그날은 조선문학 강의를 하는 날이었는데 늦잠을 자고 말았다. 웬만해서는 타지 않는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는 대뜸 어느 나라 유학생이냐고 물었다. 내가 한국어 선생님이라고 하자 대뜸 “무슨 요리를 잘해요?”라고 물었다. 갑자기 이게 뭔가, 왜 여학생->한국인 선생님->여 선생님->‘선생님’은 빠진 한국 요리. 이렇게 옮겨가나 싶었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글쎄요”라고 말했다. 수업에서는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를 보고 감상을 듣는 시간이었다. 재작년에도 보여준 적이 있는 영화이건만, 올해의 감상에서는 어떤 긴장감이 느껴졌다. 학생들은 선한 마음으로 재일 조선인의 아픔에 공감하기도 했지만 선한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너무나 힘들어 하다가 조국방문(북한방문)을 하고 너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북한에 가서 살면 될 텐데 왜 여기서 살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에는 재일조선인들이 받는 차별을 그들 자신의 선택 때문인양 전도시키고 일본의 책임은 망각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가 있다. 또한 이러한 질문도 두 차례 받았다. “처음에 선생님이 일본인인 줄 알았다. 일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왜 여기에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일본에서 조선문학/역사/문화를 가르치다 보면 저 사람은 한국인이기 때문에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라는 눈빛과 마주할 때가 많다. 따라서 최대한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말로 조근조근 설명을 해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당황했지만, 나는 단순한 동정보다는 이러한 질문에서 아슬아슬한 통로들을 만난다. 이러한 질문에는 자신과 다른 것을 다르다고 느끼는 감성 및 자신이 더 나은 ‘일본인’으로 보여지고 싶다는 욕망이 투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판단이 아슬아슬한 윤리감각으로 숨어 있다. 젊은 학생들의 이 방어적이기 때문에 공격적인 질문 속에는 하시모토 발언이 가능한 이 사회 속에서 조선문학을 일본의 젊은 여학생들과 함께 읽는다는 것이 지닌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실마리가 있다고 믿는다. 재일조선인들이 ‘조국’이라고 말할 때 그 조국이 결코 한국이나 북한이 아니며 그들이 그 말을 통해 담고 싶은 긴 시간 동안 형성된 꿈이 있다고 느끼듯이.

사진6- 자유와 생존의 메이데이 행진 장면.

사진7- 프리타 노조의 집회 장면.

작년과 마찬가지로 5월 4일에는 <자유와 생존의 메이데이>가 있었고, 6월 2일에는 오키나와 다카에 지방의 헬리포트 설치에 반대하는 <윤타쿠 다카에>가 열렸다. <자유와 생존의 메이데이>의 올해 테마는 “조심해! 잡민의 적이 있다(気をつけろ!雑民の敵がいる)”였다. 행진이 끝난 후 <프리타 노조> 사무실에서는 <지하대학>의 히라이 겐(平井玄)씨의 강연이 있었다. 그는 현재 제 2차 신자유주의 체제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고 그것은 아베 노믹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1%가 아닌 5%정도의 두꺼운 부유층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항하는 것은 역시 우리 친구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을 맺었다. 이날 메이데이 선언문에는 경제적 계급 격차 뿐 아니라 “낡고 새로운 적”에 대한 통찰이 나타나 있었다. “자아, 적의 이름을 대보자. 소득이나 학력, 출신지역, 성과 신체, 정신의 존재방식, 법적 지위, 우리들을 구별하고 우리들을 묶는 이 다양한 차이에 근거한 다양한 적의 이름을 대보자. 지휘명령과 착취의 역사, 돈을 불리기 위해 사람을 폐기하는 야만을 끝내고, 사람들이 참이 그 자체를 힘으로 삼아 사는 문명을 시작하자”

 사진8 – 윤타쿠 다카에 중 오키나와 자연과 동물들이 나오는 인형극, 친구 요시다가 목소리 역할로 출현했다. ^^

6월 2일에는 윤타쿠 다카에를 보러 갔다. 오키나와 집회에서는 오키나와 특유의 총천연색과 자연, 그리고 화석처럼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걸출한 오키나와 출신의 활동가들에게 압도당하며 동시에 기분이 노긋노긋해진다. 윤타쿠 다카에의 주인공은 오키나와에만 산다는 ‘노구치게라'(딱딱구리)와 ‘얀바루쿠이나'(뜸부기), 그리고 듀공들이 있는 숲과 바다다. 예전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운동을 할 때, 그곳의 자연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 싫다던 활동가의 말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모든 오키나와의 자연이, 인간을 넘어서 우주적으로 확장되는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될 것 같아서 가슴이 뛴다.

매년 있는 행사이지만, 올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메이데이와 윤타쿠 다카에가 준 기쁨은 남달랐다. 이 두 행사는 현재 일본 내부와 외부와 내 속에 확산되어가는 내셔널리즘적 감정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파농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의 결론에서 ”우리는 유럽으로부터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354)”라고 선언한다. “아프리카를 또 다른 유럽으로 만들고 싶다면, 아메리카를 또 다른 유럽으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의 운명을 유럽인들에게 맡겨도 좋다. -중략 – 그러나 인류를 한 걸음 전진하게 하고 싶다면, 인류를 유럽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싶다면, 우리는 새로운 발명과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민중의 기대에 맞추고 싶다면, 우리는 유럽 이외의 다른 곳에서 대답을 찾아야 한다. -중략- 동지들이여 유럽을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인류를 위해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새로운 발상을 만들고, 새로운 인간을 정립해야 한다”(358~359) 최대한 멀리, ‘그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가볼 일이다. 이는 ‘그들’을 모방하거나 동경하는 게 아니라 우리들 속 깊이로 들어감으로써 또 하나의 ‘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않을까?

응답 2개

  1. 낙타말하길

    이번에 글 쓰면서 파농을 다시 읽어 보았거든요.
    그런데 그 마지막 부분에 “최대한 빨리 멀어져야 한다”라고 쓴 부분이 정말 마음에 와서 닿았어요.
    유럽이 유럽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유럽 전체가 유럽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그 말에서 “빨리”라는 건 어떤 뜻일까요? 프랑스 원문이 어떤지 궁금해 졌어요.
    그리고 덤 선배, 긴 글을 매번 읽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 짧게 써야지 하면서도 도무지 그렇게 생겨먹질 않아서… ^^

  2. 말하길

    일본이나 한국이나 자꾸만 가까워지는 파시즘의 발흥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로부터 최대한 멀리 나아가는 사람들이 그래서 더 살갑고 반갑다. 땡큐! 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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