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영화觀

영화를 대하는 태도 1966, <페르소나> 1편

- 지안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한 명은 유명한 배우이고 한 명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녀를 돌보는 간호사이다. 배우인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연극 <엘렉트라>의 무대에서 갑자기 몇 분간 대사를 멈추어 버린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들과 남편도 보지 않고, 일상을 정지시킨 채로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낸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히 정상이라는 의사의 소견과는 정반대로 그녀는 전혀 괜찮지가 않아 보인다. 그녀는 무엇에 대해 침묵하고 싶었기에 혹은 외면하고 싶었기에 입을 다문 것일까?

어느 날 밤 병동에 불이 꺼지고, 엘리자베스는 방 안에서 혼자 서성거린다. 어두운 방 안을 비추는 것은 티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하나뿐이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냉랭한 기운이 작게 틀어진 티비 소리마저 덮어버린다. 깊이 생각에 잠긴 듯 서성거리던 엘리자베스가 우연찮게 티비 화면을 보게 된다. 이제 화면 속 소리도 점점 커지고 그에 따라 티비 화면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방 안의 엘리자베스를 비추던 카메라는 이제 온전히 화면 속을 보여준다. 티비에는 베트남 전 당시 분신자살을 하는 사람이 나오고 있다. 시커먼 연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 와중에도 그는 정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데 오히려 경악하고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다.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겨우 꼿꼿이 세우던 그의 몸이 쓰러진다.
다시 카메라가 엘리자베스를 비추면 그녀는 구석으로 몸을 집어넣고 떨고 있다. 뉴스의 소리 또한 다시 작아진다. 비어 있고 조용하고 어두운 병실은 화면 속 세상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인다. 불타고 있는 남자의 조용한 외침이 보여주는 무게감에 엘리자베스는 공포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때의 공포는 후퇴하도록 만드는 공포는 아니다. 즉 감독 베리만의 표현대로 내가 서있는 “발 밑으로 자기 땅이 무너지고” “진실이 용해되는” 것에서 온 공포다. 그러한 공포를 느낌으로써 그녀는 침묵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녀가 말 한마디를 뱉어낼 수 있게 된다. 즉 그녀는 남자가 말하려는 것의 무게감에 압도당함으로써, 의사의 표현대로 “서로 찡그리며 웃는” 위장된 모습의 사람들, 거짓말들 속에 자신이 놓여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래서 진전하게 만들어주는 공포감이다. 이러한 ‘공포’처럼 침묵 역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영화의 전체 시간동안 엘리자베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완전한 외면의 자세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너무나 진실을 갈구하기에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방식이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 들지만 대체로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엘리자베스에게 침묵으로 거짓에서 벗어나려는 일은 나름대로 치열한 과정이다.
<페르소나>의 장면 장면은 굉장히 아름답지만 한편 장면들이 온통 수사적이라는 생각 또한 강하게 든다. 도입부부터 상당히 여러 가지 종류의 알 수 없는 이미지들로 범벅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베리만은 무척 진지하게 영화로 다가선다. <페르소나>에서 가장 멋진 부분은, 감독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영화 속으로 집어넣는 바로 그 태도이다. <페르소나>를 만들던 시기에 비로소 베리만은 자기 작업이 자의식이나 “오락거리”가 아니라 사람들로 (베리만은 “형제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하여금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할 매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고민 속에서 <페르소나>가 만들어진 것 같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영사기가 돌아가는 장면이나 <페르소나>의 실제 촬영 현장이 나오는 것에서 <페르소나> 자체가 하나의 영화를 위한 이야기임을 유추할 수 있다. 베리만은 예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영화 속에 담음으로써 영화 시작점에서 클로즈업된 화면 속 어머니의 얼굴을 매만지는 소년처럼, 베트남전에서 분신자살했던 남자처럼, 진지하게 영화로 다가섰다.

응답 1개

  1. cman말하길

    보고싶은 영화네요. 귀중한 알림과 내용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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