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마을 만들기 파트 4-6]우리‘들’의 비밀을 되찾는 주문, ‘A씨가 나다’

- 신지영

-특정비밀보호법안(12월6일) 강행 채결의 시간들-

 

* 애매해지는 법 – 변화무쌍한 통치술

12월 4일 - 특정비밀보호법 NO!

12월 4일 – 특정비밀보호법 NO!

2013년 12월 6일 ‘특정비밀보호법안(特定秘密保護法案)’이 날치기로 강행 채택되었다. 이를 막으려던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도 배반당했고 일본의 민주주의는 퇴보했다. 그러나 중의원 표결을 통과한 11월 28일부터 현재까지 법안폐지를 위한 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이 파시즘의 시대에 “NO PASARAN”이라고 외치는 정신이 점차 깨어나고 결집해 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비밀’을 선포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하자 일본 학자들은 <특정비밀보호법안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모임(http://anti-secrecy-law.blogspot.jp/ 이후 특반학)>을 결성하고 성명서를 발표해 법안의 즉각 폐안을 호소한다. 참의원 결정일인 12월 6일을 일주일 남겨두고 모이기 시작한 서명은 4일에 2000명을 넘어서 현재는 5000명을 돌파했다. 그 일주일 간 국회 앞에서는 하루 종일 집회와 데모가 이어졌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특반학> 성명서에는 “우리들은 학문의 이름으로 “비밀 국가” “군사국가”에의 길을 여는 특정비밀보호법안에 반대”한다고 호소했다. 영화계 변호단 등 다양한 집단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12월 4일 – 마스크에 X를 붙인 사람들

‘특정’한 비밀을 보호한다는 이 법안은, 사실 권력자를 위한 알리바이 제조기이다.(법안전문은http://www.tokyo-np.co.jp/feature/himitsuhogo/news/131206zenbun.html)안전보장에 관련된 특정 정보를 비밀로 하고, 이를 제공한자 및 취득한 자에게 최장 10년 징역의 중벌을 과한다는 것이 골자이자만 문제는 ‘비밀에 부친다’는 것만이 아니다. 무엇을 ‘특정’한 비밀로 정해 언제 어떻게 실행될는지도 비밀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이 법의 범법자가 될 수도 있다(혹은 귀찮은 어떤 집단을 맘대로 범법자로 만들 수 있다). 비밀지정기간은 최대 60년까지 연장할 수 있으며 이 기간 동안 비밀 문서는 행정부서 판단 하에 맘대로 폐기될 수 있다. 비밀로 지정된 동안은 ‘공문관리법(공문서의 자의적 폐기를 금지하는 법)’의 예외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 아직 누구도 이 법이 어떻게 작동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처럼 불명확하고 애매한 이 법은 정작 법을 만든 아베 내각조차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오키나와 반환시의 미국과의 밀약문서, 식민지 및 전쟁 책임을 기록한 문서 등이 영구 미공개/폐기되어 영원한 비밀이 될 가능성도 크다. ‘특정비밀’을 ‘보호’한다는 이 법은 사실 표현, 보도, 결사 및 알 권리를 빼앗고, 비밀이 비밀을 낳는 법안이다. ‘애매함’을 ‘법’으로 인정해줌으로써 과거를 봉인하고 변화무쌍한 통치술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법-파시즘인 것이다.

12월 4일 - 검은칠한 법안 거부한다.

12월 4일 – 검은칠한 법안 거부한다.

* 빼앗겨가는 말 – 소문과 비밀.

어릴 때 나는 아름다운 것이나 재밌는 것을 발견하면 언니보다 먼저 ‘아름답다’ ‘멋지다’라고 말하려고 전전긍긍하곤 했다. 그 신비하고 비밀스런 명명행위는 마치 그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어주는 주문 같았기 때문이다. 특정 단어의 명명/표현에는 이러한 소유의 권력과 비밀스런 공감이 동시에 작용한다. 명명자에게 요구되는 윤리는 바로 이러한 명명에 대한 소유욕과 소유욕을 넘어선 비밀스러운 감정의 공유, 그 둘을 구별하는 것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12월 4일 - 하루 종일 춤추며 외치던 분

12월 4일 – 하루 종일 춤추며 외치던 분

특정비밀보호법안에 체질적으로 몸서리가 쳐지는 것도 바로 ‘명명행위’의 윤리감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의 말이었던 ‘비밀’을 ‘그들’에게 빼앗겨 버려 비밀은 ‘애매한 통치술’과 같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비밀’ 뿐이 아니다. 식민지기 관동대지진 때에는 매체를 갖지 못한 민중들의 여론형성수단인 ‘소문’을 식민권력과 경찰이 장악하고,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일본 민중이 조선인과 중국인과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을 학살하게끔 했다. 그리고 현재는 ‘비밀’을 장악할 권리를 법으로 인정받아 역사적 책임을 영원히 은폐하고 전쟁준비를 향해가려 하고 있다. 우리‘들’의 말이었던 비밀, 소문과 같은 말들이, 그 말들이 지녔던 주술적인 힘들과 이미지들과 이야기들이, 권력에 의해 선취당해 빛을 잃는다. 우리‘들’ 스스로가 그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12월 4일 - 나치스 복장을 입은 아베 총리

12월 4일 – 나치스 복장을 입은 아베 총리

이시바(石破茂) 간사장은 “비밀보호법안 반대 데모는 테러와 같다”고 말함으로써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공론장인 집회와 데모를 ‘테러’와 겹쳐 놓았다. 12월 6일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이 후쿠시마에서 열었던 비밀보호법안 공청회에서 전원이 이 법안에 반대했다는 점을 지적하자, 자민당 의원이 “후쿠시마를 이용하려는 건가!”라고 말했던 것은 정말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적반하장이었다. 이러한 적반하장격 명명법은 민주주의, 평등, 평화, 진실, 화해와 같은 말을 그들이 사용할 때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비밀보호법안이 통과되기 하루 전날 넬슨 만델라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화해가 명확한 죄의 인정/사죄를 통한 진실규명/기록 없이는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던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현재의 일본에서는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12월 4일 - 강행 채결 이야말로 테러다!

12월 4일 – 강행 채결 이야말로 테러다!

비밀보호법안이 중위원을 통과하기 열흘가량 전인 11월 19일, 한국에서는 1953년 한국 정부가 조사했던 3.1운동과 관동 대지진 피살자 명부, 강제 징용자 명부가 발견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6605478)일본 대사관을 이전하며 우연히 발견된 이 공문서가 공개된 지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 특정비밀보호법안이 통과된 것도 우연치고는 시사적이다. 공문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마무리되었다는 논리를 지속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 출근부를 찍게 되는 분노

12월 6일 저녁, 친구들과 제미 도중에 빠져 나와 국회 앞 집회로 향했다. 우리는 어쩐지 No Pasaran 이라는 플랜카드 아래로 향하게 되었고 많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다. 수업을 마친 우카이 선생님이 합류하여 시간은 이미 9시를 넘어가고 있었으나 국회에서는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10시가 넘어가자 거리로 국회상황이 생중계되었고 숨을 죽이고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기명투표가 시작되어 의원들 이름이 하나씩 불려졌다. 일본 국민들이 뽑은 의원들이었다. 그리고 10시 50분이 지난 시각 비밀보호법안은 통과되고 말았다. 그 순간우리‘들’은 분노에 찬 비밀스러운 눈빛을 주고 받았다.

12월 6일 - NO PASARAN 깃발 아래.

12월 6일 – NO PASARAN 깃발 아래.

그러나, 나는 이날 기명투표 결과가 발표된 이후의 적막에 대해서, 그렇게 바라던 폐안도 연기도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모두들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던 그 괴상한 침묵에 대해서, 사람들의 분노를 봉인해 놓고 출근부를 찍는 것처럼 되었던 분위기에 대해서 어떤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일본의 사운드 데모를 참 좋아하고 국회 관저 앞 데모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좀처럼 일본의 데모방식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12월 6일에는 엄청난 인원이 국회 앞으로 몰려들었지만 교통경찰의 지휘를 받으며 도로 위로만 움직였다. 따라서 길고 두꺼운 옴축달싹할 수 없는 긴 줄이 이어진 형태가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멋진 장식들을 달고 왔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경찰은 요소요소에서 사람들의 통행을 제한해서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었다. 데모는 그 무엇보다 길과 호흡하면서 거대한 흐름이 되는 경험이다. 일본의 교통질서를 지키는 데모는 이러한 길에 대한 감각, 도로를 점거했을 때의 해방감을 질서정연히 컷트해 버린다.

더구나 이날 우리가 있던 곳에서는 “비밀보호법안 철폐”와 같은 아지테이션을 사람들 사이에 낑겨 앞 사람 뒷모습만 보는 상태에서 몇 시간이고 추위 속에서 반복해야 했다. 춤을 추는 사운드 데모는 가끔 눈에 띠었지만, 보다 널은 광장에서 음식도 나눠먹고 불도 피우면서 추위를 달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국회 앞에는 그 흔한 편의점도 없다. 멀고 황량한 국회 앞으로 갈 때마다 아, 어차피 국회란 게 우리가 만들어준 건데, 우리가 사는 곳으로 그들을 오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회 바로 앞에서 데모를 할 때의 상징성과 우리의 삶 속에 국회가 있다는 메시지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12월 6일 - 길목마다 막은 경찰들

12월 6일 – 길목마다 막은 경찰들

여러 번 갈등의 씨앗이 된 문제지만 주최측이 집회 참여자들이 흥분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문제도 여전히 느껴졌다. 10시가 넘어 국회상황을 생중계하기 직전 주최측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결코 흥분하지 말고 질서를 지켜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 순간은 사람들의 감정이 폭발하고 표현되어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법안이 통과된 뒤의 교수를 비롯한 훌륭한 분들의 발언도 전혀 속시원하지 않았다. 분노해서 도로로 쏟아져 나오지도 않았고 부둥켜안고 우는 울음도 없었고 국회로 몰려가 밤새워 폐안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마치 일하는 시간이 끝난 사람들인 양 우리‘들’은 집으로 퇴근했다. 법안이 교묘하게 지하철 막차 시간에 맞춰 통과되었다는 것도 꼭 덧붙여 두고 싶다. 대체 우리의 분노를 누가 훔쳐간 것일까? 데모의 일상성과 지속성이 갖는 소중한 의미를 경찰권력과 닮아가는 질서의식에서 벗어나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까?

12월 6일 - 자유 발언대의 우카이 샘

12월 6일 – 자유 발언대의 우카이 샘

이 불편한 고요 속에서 우리‘들’을 구한 것은 집에 돌아가던 도중 만난 프리타 전반 노조 쪽 사람들이 중심이 된 발언대였다. 발언대에서 누군가는 올해 초 일본에서 아베가 당선되고 한국에서 박근혜가 당선되었을 때, 일본인들은 한국인들보다 훨씬 더 빨리 이 상황을 용서해 버렸고 분노하지 않았고 그 결과가 이렇게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어제가 넬슨 만델라가 죽은 날이며 그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는 자유와 권리는 매일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했고 누군가는 이것이 싸움의 끝이 아니라 싸움의 시작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고 또 누군가는 울면서 분하다고 소리치며 그들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고 또 누군가는 이미 그들은 우리가 두려워 우리들의 대오를 이렇게 조각조각내고 길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우리‘들’은 발언대를 지켜보다가 우카이 선생님의 차를 타고 돌아와 새벽 2시에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 불편한 고요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반성하면서도 그 명확하고 불편한 감정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집으로 안고 돌아간 분노는 지금 어디쯤에서 고이고 있는 것일까 도리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A씨가 나다”- 비밀보호법안 국회 방청 중 체포당한 그가 나다.

12월 4일 - 비밀보호법 폐안으로

12월 4일 – 비밀보호법 폐안으로

한 삼주쯤 흘러 12월 26일에는 비밀법안 통과 국회회의 방청 중 구두를 던졌다는 이유로 체포당한 A씨의 기소를 막기 위한 원내 집회가 열렸다. 「A씨의 해방과 「비밀보호법안」폐지를 요구하는 12.26 원내집회(https://www.youtube.com/watch?v=RLH6wvQFMoo)」가 그것이다. 소노씨에 따르면 A씨는 활동가가 아니라 2011년 재해 이후부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일반 시민이라고 했다. 그는 12월 6일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에 감동했고 국회까지 들어가서 방청하게 되었는데, 밖에서 고조되는 반대 목소리와 국회 안의 상황이 너무나 다른 것에 분노했고, 10시 50분 법안 통과되자 유일하게 자신이 갖고 있었던 구두를 던졌다고 한다. 구두는 누구에게 맞은 것도 아니며 심의에 영향을 끼친 것도 아니었으나 A씨는 체포당했다. A씨는 12월 7일 메시지를 보내 왔다.

“(방청자인 우리에게는) 발언은 커녕 박수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여당 의원이 ‘우리가 주인이고 국민은 우리 밑에 있다’고 착각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여당 위원들의 오만불손함을 직접 봤고 그것은 차마 눈에 담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저는 비밀보호법 폐안을 간절히 원하는 일본의 양심적 동료들과 세계 각지에서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우리들은 절대로 이 강행 체결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분노가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여당의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문에 방청하고 있던 저는 어쩔 수 없이 제 구두를 본 회의장에 던졌던 것입니다.”

현재 인터넷상에서는 “A씨가 나다”라는 말이 퍼지고 있다. 분노를 전달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자신들을 대신해서 구두를 던진 A씨가 바로 나이다. 무수히 많은 분노한 A씨가 우후죽순 퍼져 국회를 향해 몰려가고 있다. 이런 감정을 사람들은 “A씨가 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의 기소를 막기 위한 움직임은 「12.6 비밀보호법 국회 방청자 탄압 구원회」로 결성되어 서명, 캄파를 벌이고 있다.(http://himitsuhokyuen.wordpress.com/2013/12/27/452/)

12월 26일의 원내회의에서는 비밀보호법안의 문제점을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이뤄졌다. 첫째 섹션인 「「12.6 비밀법국회탄압」의 문제는 무엇인가?」 라는 섹션에서 우카이 사토시는 A씨가 어떤 광경을 보고 구두를 던지는 상징적인 행위를 했는가를 우리들은 반복해서 상상해야 하며, 그 국회의 광경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길 필요성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특히 그는 이번 비밀보호법안 중 제 5장에 명시된 “적정평가(滴定評價)” 에 대해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적정효과란 특정 비밀 정보를 다룰 권리를 누가 갖는가를 결정하는 판단기준인데, 한명의 공무원이 만나는 친구, 가족 더욱이 국적을 확인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베가 13년 전 NHK에서 여성국제전범법정 방송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개입했던 그 사상이 연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暴かれた真実NHK番組改ざん事件―女性国際戦犯法廷と政治介入』西野瑠美子・東海林路得子・「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編、現代書館、2010)비밀보호법안에서 말하는 국가 안전보장이란 일본의 전쟁책임, 식민지책임,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해 현재 밝혀진 매우 적은 근거조차도 비밀로 부치려는 의도를 담은 “역사를 봉인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 법안이 말하는 공공이란 곧 특정한 정치수단 관료수단 행정수단을 국가의 사유물로 하는 것이며 A씨를 되찾아 오는 이 싸움을 통해서야말로 민중의 공공성을 되찾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4일 - 비밀법제 폐안, 전쟁은 싫다!

12월 4일 – 비밀법제 폐안, 전쟁은 싫다!

아사노(浅野史生) 변호사는 A씨의 구류 및 기소의 정당성이 없음을 조목조목 짚었다. A씨가 구류이유는 “威力業務妨害罪”이다. 그러나 비밀보호법안이 악법이며 강행채결 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이 국회 자체가 헌법위반의 소지를 지니며 공무방해가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운동화를 던져 심의를 방해했다고 하지만 주변인의 진술에 따르면 심의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셋째로 구류의 조건은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있을 때, 도주의 가능성이 있을 때인데 당당하게 재판을 통해 싸워가겠다는 A씨의 의욕적인 상황을 볼 때 도주의 가능성도 없고 따라서 구류의 이유도 성립하지 않는다. 아사노 변호사는 A씨의 구속부터가 이미 비밀보호법안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햇다.

* 민주주의의 죽음-나에겐 구두밖에 없었다.

비밀보호법안의 문제는 법조항의 성립으로 그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이른바 ‘민주주의적’이라고 하는 절차에도 있다. A씨의 눈에 비친 그 국회의 절차와 광경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하필 그때 ‘구두’를 던져야 했을까?

A씨 석방 및 기소중지를 위한 원내 대회에서 가이토(海渡雄一) 변호사는 여태까지 여러 가지 심의과정을 보아왔고 정권교체도 봐 왔지만 이렇게 급히 강행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베 정권은 보통의 자민당 내각이 아니라 “전체주의 독재 정권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다. 한 예로 11월 25일에는 후쿠시마에서는 비밀보호법안 공청회가 열렸다. 당시 자민당의 추천자를 포함한 7명의 의견진술자 전원은 비밀보호법안에 반대를 표시했다. 원전 정보가 비밀에 부쳐지는 등 국민의 “알 권리”가 침해될 것을 우려한 탓이다. 그러나 아베내각은 이를 묵인한 채 중의원, 참의원 표결로 넘어갔다. 가이토씨는 비밀보호법안에 의해 공안 경찰의 기능은 전전의 독고경찰(特高)이 지니고 있던 기능–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취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강화되는 것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비밀보호법안에 대한 반대 데모를 ‘테러’라고 말한 이시바의 발언에는 전쟁을 향해 가려고하는 그들의 본심이 나타나 있다는 것이었다.

12월 6일 -아베 왈 "비밀보호법안의 법안을 통과시켜 모두 전쟁으로 가자!" 이게 정부의 본심이다.

12월 6일 -아베 왈 “비밀보호법안의 법안을 통과시켜 모두 전쟁으로 가자!” 이게 정부의 본심이다.

국회 방청자의 한명이었던 키무라(木村結, 東電株主代表訴訟)씨는 비밀보호법안을 통과시킬 당시 국회가 어떤 곳이었는가를 증언했다. 국회의원들은 너무나 바빠 법안을 제대로 읽지 않고 출석했며 여당 의원들 중 많은 수가 출석하지 않아 텅텅비어 있어서 야당 의원들이 보도진을 향해 이 상황을 보도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기명투표를 할 때 자신의 이름을 잘못 듣고 일어난 사람도 있을 정도로 산만했으며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의원들은 그저 관료가 제출한 법률을 통과시킬 뿐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A씨의 행위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로 인한 심의의 중지나 업무방해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그가 구두를 던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실 우리들은 현재 항의할 수 있는 행위는 우리 모두 구두를 벗어 던지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소지품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구두를 벗어 던지는 것은 당시 방청객에게 가능한 최선의 의사표현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국회란 국민이 만든 것임에도 그곳을 방청권이 자유롭게 주어지지 않음을 비판하면서, 지역의 국회를 방청해 분위기를 알리고 방청 자격에 문제를 제기해 가지 않으면 우리들은 민주주의를 점차 빼앗겨 버릴 것이라고 말햇다.

12월 4일 - 원전은 필요없다, TPP 반대, 헌법을 지켜라, 되찾고 싶은 것은 평화와 인권 존중의 헌법의 정신을 자랑스럽게 존중하는 아름다운 마음, 비밀보호법안 반대!

12월 4일 – 원전은 필요없다, TPP 반대, 헌법을 지켜라, 되찾고 싶은 것은 평화와 인권 존중의 헌법의 정신을 자랑스럽게 존중하는 아름다운 마음, 비밀보호법안 반대!

국회 관저 앞 데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간바루(神原元) 변호사는 이시바의 ‘테러’ 발언에 대해 국회에 이의를 제기했을 때 고압적이었던 대응을 예로 들면서, 그들은 소수의견을 듣지 않고 논의시간을 최대한 축약하고 강제 채결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비꼰다. 다수결을 통한 선거가 민주주의이며 이 의견을 거부하면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파시즘과 한발차이라는 것이다.

이날 뜨거웠던 원내 대회의 열기는 비밀보호법안의 통과 절차가 지닌 문제점을 폭로하는 동시에 기존의 민주주의적 제도가 더 이상 민의를 대변할 수 없게 된 상황을 드러낸다.

* 우리‘들’의 비밀 – 말을 잃은 친구의 말.

사실 나는 12월 26일의 구원활동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이 활동에 참여했던 친구의 말을 통해 전해 들었고 27일에 만들어진 구원활동 홈페이지의 영상을 참고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나는 친구의 목소리와 A씨의 구원활동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상황을 접하고 있는 이 과정이 많은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 친구는 비밀보호법안이 통과되기 한 달쯤 전, 한국에서 관동 대지진 사상자에 대한 새로운 문서가 발견되었을 때,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의 중국인 조선인 학살 장소를 돌며 역사의 책임을 되새기는 행사에 참여한다. 관동대지진시 조선인 중국인 학살 현장을 둘러싼 필드워크(関東大震災時の朝鮮人・中国人虐殺の現場をめぐるフィールドワーク)http://noracismnodiscrimination.blogspot.jp/가 그것이다. 이 기획은 “우리들이 사는 도쿄가 바로 최악의 헤이트 크라임(차별범죄)를 경험했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 두기 위해, 학살의 현장에 발을 옮겨, 희생자를 추도하는 필드워크”였다. 이 기획은 자이도쿠카이(在特会)에 대한 항의 운동을 통해 역사적 정치적 사실을 “알리는” 행동을 해 왔던 블로그「9월 도쿄 노상에서 (http://tokyo1923-2013.blogspot.jp/2013_09_01_archive.html」와, 「민족차별에 대한 항의행동 알리기 부대」와 산야에서 오랜 시간 지원활동을 계속하며 도쿄 동부권에서의 반차별운동에 참여해 왔던 藤田五郎(차별 배외주의에 반대하는 연락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그런데 행사에 참여했던 친구는 추모비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러나 자신이 사는 곳과 너무나 가깝게 있던 학살장소를 돌아본 뒤 일주일간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되었던 그 비밀스러운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를 통해 나는 12월 26일의 구원활동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대체 왜 지금 특정비밀보호법안이 필요한지, 데모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지, 후쿠시마 원전은 대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오키나와의 긴박한 상황은 왜 이 비밀보호법안과 맞물려 일어났는지, 왜 연말연시만 되면 노숙자에 대한 탄압이 격렬해져 이삼일 사이에 미야시타 공원에 있는 야숙자들이 쫓겨나야 하는지, 하필 왜 이 추운 계절에 그래야 하는지, ~해야 하는지,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비밀보호법안 없이도 이미 너무나 많은 비밀로 속여서만 겨우 유지될 수 있는 ‘비밀 군사 국가’가 이곳이다.

그러나 나는 이에 반해 우리‘들’의 비밀스러운 공감과 집단들도 우후죽순 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목소리를 잠시 잃었던 그녀의 입을 통해 전달된 구원활동처럼, ‘구두를 내던지다’라는 행위에 숨은 분노와 용기처럼, “A씨가 나다”라는 명명법이 울려퍼지는 것처럼. 그들의 비밀이 아니라 우리‘들’의 비밀이, 그들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 소수자‘들’의 민주주의가, 그들의 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입소문이, 비밀스럽게 퍼져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12월 6일의 분노는 우리‘들’의 비밀이 되어가고 있고, ‘A씨가 나다‘라는 말은 이 비밀을 확산시키는 주문이 되고 있다.

응답 2개

  1. 낙타말하길

    선배! 반가워요!! ^^ 얼마 전 집회에 갔다가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 중 재밌는 걸 들었어요. “아베는 사기도 잘 못친다!”는 것이었죠. 근데 그렇게 빤한 사기를 치는데 말은 이쁜 거예요. ^^ 거기에 법과 정치제도가 더해지면 뻔한 사기는 이른바 ‘제정’ 되어 버리고 그러면 제정한 사람들도 어찌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해서 살아있는 것처럼 활개를 치고, 괴담과 소문만 늘어가요.
    며칠 전 오키나와 나고시 선거에서 헤노코 이설 반대파쪽(이나미네)이 당선되었어요. 아베 정권에 대한 최초의 강한 브레이크는 결국 오키나와에서 시작되는구나! 생각했고 주변 오키나와 친구들도 그 이야기하면 아주 쨍쨍한 얼굴들이 되어서 참 좋았는데,…. 정확히 이틀 뒤인 21일 일본 정부는 후텐마 비행장의 헤노코 이설을 강행하겠다는 방침을 정하곤 공사 수주 입찰 공고를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정말 신속 정확하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올라온 새싹은 신속하게 싹뚝! 꼭꼭 숨겨라 머리카락 보일라! 정치 위에는 자본이 있다. 이런 느낌이랄까요?
    참 루쉰에 대한 글 재미나게 읽고 있어요! 사람들의 삶에 괜한 참견을 했다가 게딱지에 딱 갇혀 버린 법사(?)이야기도 아주 상징적이라고 생각했어요.

  2. 고추장말하길

    우리가 싸워야 할 적과 투쟁의 형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여러 생각이 드네요.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도 갈등은 점차 ‘비밀’과 ‘괴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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