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맛따라 정따라… 남쪽의 겨울바다에 가다.

- 김융희

지난 1월 초순, 가까운 친지들과 겨울바다를 다녀왔다. 완도가 건너다 보이는 득량만의 자지포 연안인 남쪽 바닷가이다. 이곳은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다. 장흥과 고흥의 양안을 끼고 깊숙이 들어서 보성땅 벌교에 이르는 득량만은 공해시설이 거의 없는 청정지역으로, 넓은 갯벌이 발달하여 고막을 비롯한 각가지 조개와 수산자원이 매우 풍부한 곳이다.
특히 물이 맑고 잔잔한 자지포는 완도의 여러 섬들로 둘러싸여 마치 호수처럼 아름다우며, 우럭 도미와 같은 고급 어족이 풍부하여 사철 낚시꾼들이 모여든 곳이다. 굴과 고막, 김과 미역, 매생이등의 조개와 해초, 그리고 숭어와 가재미와 같은 생선들의 수산물이 풍부하여, 본격 제철인 겨울동안은 많은 여행객들의 나들이로 잘 알려진 곳이다.

우리는 1박 2일의 여정으로 떠났다. 500km가 넘는 거리로 6시간이 너머 걸리는 시간을 감안하면, 너무 빡빡한 일정이다. 쉬엄 쉬엄 좀 여유있게 즐기는 여행은 아닐지라도, 2박 3일은 되어야 하는 거리이다. 더구나 나들이의 안내와 운전을 맡은 나로써는 제발 아니라며 일행들을 설득해 보지만, 마치 하루가 없으면 큰일이라도 있을 듯, 모두가 바쁜 일상들이다. 몰리고 쫒기는 일상으로부터 자기를 되돌아보며 마음의 여유를 찾아 떠나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모든 강박관념으로부터 완전 자유로워야 하는 나들이에 무리한 스케쥴의 강행은 과욕이다. 어떻든 출발부터 시간의 강박감을 갖고 여가를 즐겨야함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혼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오늘이라도 출발할 수 있지만, 남과 함께 떠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H D 소로우’는 ‘윌든’에 썼던가? 나는 혼자만의 나들이를 좋와한다. 여행은 단촐해야 한다. 절대로 두 셋은 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단체이다. 여럿이 다니는 여행은 스케쥴이 있어야 한다. 그 일행들과 더불어야 하니 어쩌겠는가? 하긴, 요즘은 홀로의 여행이 좀 허전하다. 아마 나이 탓인가 싶다. 아내와 손을 꼭 마주 잡고 함께하는 여행은 행복하다.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며 부담 없는 지기와의 여행은 편하며, 막걸리 맛과 입맛이 맞는 친구라면 여행이 더욱 즐거울 것이다.

잘 발달된 교통의 편리와 시간만 나면 훌쩍 떠나는 행위는 비례하는가? 하찮고 번잡스런 많고 많은 세상사를 잠시라도 떠나 새로운 자연과 환경의 분위기에 젖어 의지하려는 마음도, 반짝의 틈만 보이면 바랑을 챙기려는 들쑤심의 유혹이 결코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 같다.
눈만 뜨면 지겹게 보고 듣게 되는 매스컴의 새로운 볼거리와 먹거리, 잘 발달된 편리한 교통편이 계속 소개되고 있다. 집안에서의 균질화된 생활에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자연과 풍물을 맞으려 훨훨 떠나는 기분의 설레임이란, 각박한 삶의 현대인들에게는 간절한 마음의 소망이다. 여행이랄 것도 없는, 기껏해야 일 박의 나들이일망정, 좀더 여유롭게 즐거는 여행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다.

여행하면 먼저 그 곳에는 어떤 맛깔스런 음식이 있을까를 생각한다. 색다른 음식을 생각하며 미리부터 군침을 흘리기도 한다. 어떤 아름다운 여행길에도 맛있는 먹거리가 없다면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한자 ‘美’자는 ‘羊’자와 ‘大’자의 결합이다. 이는 커다란 산양을 잡아 부족과 함께 배불리 나눠 먹는 포만감으로 행복도 아름다움도 느낀다는 뜻의 유래가 본원적 정체인 것이다. 한자에서는 글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으면 같은 뜻으로 읽힌다. 美와 味, 즉 아름다움과 맛,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뿐이 아닌 ‘맛’의 뜻도 포함한다. 이는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는 맛있는 먹거리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이번 우리의 여행도 스케쥴을 맛기행에 맞췄다. 점심은 나주 곰탕이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송정리에 새로 차렸다는 친구의 식당으로 바꿨다. 친구란 부담으로 처음부터 탐탁치 않았다. 오리 요리로 맛은 무난했다 싶었는데, 값이 탈이었다. 한참 남행 운전중, 식당 친구로부터의 전화이다. 밥값을 더 받았단다. 그것도 1/3이상을. 그제서야 일행들의 말문, 어쩐지 비싸더라니, 경험이 없기로 어쩜 그런 실수를…. 조마스러웠던 마음이 이렇게 터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어쩔수 없는 것, 그래서 스케쥴은 지켜져야 하는 것을…

어느덧 장흥 읍내에 도착했다. 맨 먼저 챙긴 것은 양조장에 들려 막걸리부터 확보했다. 이곳 막걸리는 맛도 좋지만, 어떤 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 불편했던 경험 때문이다. 비좁은 공간의 먼거리, 지루한 자동찻길에 노년들의 지친 심신을 위해 먼저 찻집을 찾았다. 억불산자락에 평화의 마을, 조용한 호숫가에 대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이층에 자리한, 제법 운치있는 명소로 알려진 찻집이다. 주인은 이미 다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전통 명차 ‘청태전 차’ 제조의 명인답게, 이곳 찻맛은 일품이려니와, 후식으로 나온 다식의 감칠맛은 지금도 감친다. 그런데 행사가 있어 모처럼 만들어 쓰고 남았다며, 메뉴에 무관한 시루떡이 나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행운, 많은 여행길에도 흔치 않는 아주 특별한 행운이다. 그 시루떡은 옛적 내 어렷을 때,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먹을 수 있었던 무우 시루떡이었다. 그동안 전혀 기회가 없었던, 귀하고 그리운 향수의 떡이었기에 더욱 맛이 좋왔다. 따스한 차맛에 일행들의 짜증이 좀 풀리는지 얼굴과 표정에 나타난다. 몸도 녹았고 해도 기울었다. 부탁을 받은 후배가 탐진강이 내려보이는 강변에 마련해 준 만찬장으로 갔다. 모른척 슬쩍 지나칠 수 없는 몇 지인들과 합석해, 즐거운 담소와 함께 남도의 맛에 젖고 막걸리에 모두가 취했다. 전국 어데를 가도 개성이 무시된 획일화로, 지금은 고유의 음식이나 향토음식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한우촌에 와서 맛보는 육회, 등심에 키조갯살과 묵은지, 홍어에 돈육과 묵은지를 곁드린, 이곳 특유의 향토음식인 두가지 삼합은, 맛기행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시래기에 듬뿍 넣은 선지국은 먹어도 결코 질리지를 않는다. 만족스런 맛에 즐거워하는 모두의 모습을 보는 안내자도 흐뭇하며 다행이다.

출발의 설레임이 희망과 의욕이라면 평화와 충만은 저녁의 잠자리일 것이다. 한 달 전에도 예약이 어렵다는 명소 “편백숲 우드랜드”를 후배의 배려로 미리 예약을 했지만, 초행길이 조마스럽다. 그런데 어두운 초행 밤길을 안내받아 들어선 황토 한옥의 잠자리는 무엇 하나 불편없이 잘 갖춰져 있다. 미리 조마했었던 마음이 오히려 이제는 쑥스럽다. 아쉬움이 시간이다. 하룻밤을 잘 지내고 억불산 정상을 오르는 가장 편한 참살이길인 마레길을 걷지 못한 채, 멀리 바라만 보면서 아침 바다를 맞으러 남쪽 자지포의 회진행이다. 친구인 미백의 문학 무대인 자지포, 생전의 그와 함께할 때면 “아야 지중해 연안이 아름답다냐, 나는 여기가 훨씬 아름다워야” 찐득한 이곳 사투리로 늘상 되내인 말이 다시 듣고 싶고, 새삼 그가 그리웠다.

아침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됀장 물회’로 정했다. 새꼬시를 재료로 미리 예약을 했다. 허름한 체 꾸미지 않은 홀에 차려진 아침상은 제법 풍성했다. 모처럼 서너 친구들도 식사를 함께하자며 초대했는데, 마침 낚시물때라서 바다에 나가 불참했다. 아침부터 반주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운전 때문에 지금까지는 권해도 참았었지만, 자청해 한 잔을 비웠다. 청청정 갯벌에서만 나는 감태김치, 고막, 생미역에 생굴로 버무린 새콤한 맛, 순박한 주인아줌마는 빈그릇 체우기에 정신이 없다. 어디나 바닷가에 가면 물회는 있다. 그러나 여기의 물회맛은 아니다. 여린 새꼬시의 감칠맛, 열무김치에 된장을 풀고 싱싱한 횟감을 듬뿍 넣은 물회맛은 이곳이여야 맛 볼 수 있다. 요즘 도미가 많이 잡혀서 오늘은 특별히 도미새꼬시만 사용했다고 한다. 초대한 세 친구 몫까지 모두 내왔다는데 벌써 바닥이 들어났다.

점심을 삭금에서 겨울 참숭어회와 매운탕으로 예약을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불가능하다. 예약 취소겸, 주문했던 말린 참숭어 때문에 삭금을 미리 들렸다. 돌아오면서 먹을 몫으로 숭어회를 시켰다. 내가 자란 동내와 마주한 삭금은, 완도의 약산을 마주보면서 잔잔한 푸른 바다가 넓은 호수처럼 펼쳐진 평화로운 어촌이다. 지척의 건너 고향집도, 선영도,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그토록 애낀 자지포를 바라보며 말이 없는 미백의 유택에 눈길만 주고는, 또 다음 길을 독촉해야 했다. 보고, 만나고, 맛보고, 들려야할 곳은 아직인데, 벌써 상경길이 바쁘다.

두 시가 넘도록 점심을 못챙겼다. 나들이 장흥의 마지막 식사로 시장내의 국밥집을 들렸다. 고향이요, 나들이 안내자인 나는 아직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점심 접대가 걸린다. 그런데 국밥맛이 보통이 아니라며 맛있게 먹었다. 삭금에서 떠온 숭어회를 이곳에서 먹자, 말자는 이견이다. 모두 먹고는 싶은데 식당 눈치가 두려운 것이다. 용감하게 슬적 먹으려는데, 벌써 주인이 미리 알고서 접시를 준비해 준다. 한사코 사양을 했지만 막걸리 잔도 마련해 준다. 처음으로 가장 실감 넘치는 일행들의 감탄이다. 지극한 인정에 감복한 것이다.

그래 이것이 내 고향의 인심이다. 찻집에서의 무우시루떡에서, 저녁 만찬장의 무한 공짜에 무한 주문인 선지국 무한 제공, 물회집에서는 주문을 했지만 불참한 초대분의 돈은 받을 수 없다며 사양한다. 주문양을 다 먹었으니 결코 받으라고 했더니, 그럼 잠시만 기다리란다. 가면서 안주하라며 새로운 물회를 포장해 준다. 삭금에서는 점심 주문을 해약했는데도 불평은커녕, 주문한 숭어회를 듬뿍, 받기가 거북한 많은 양이었다. 우리는 국밥집 주인을 불러 지금까지의 장흥 인심을 알리면서 고마움을 전했다. 내 고장을 찾는 손님께 배푼 당연지사에 과찬은 천부당이라는 주인의 말에 또 감동한다. 이 집은 TV드라마 ‘대물’의 국밥집, 바로 그 집이다.

목적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간다는 것만으로의 즐거움이 여행이다. 촉박의 일정에 아쉬움을 남긴 채, 이제는 나들이를 마치고 상경길만 남았다. 더없는 기쁨의 행로일수록 여행의 귀로는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 법이다. 지금까지의 무탈 무난에 감사하며, 이제는 집에 무사이 도착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F B 윌 콕스’는 여행이 즐거우려면 돌아오게 될 훌륭한 보금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을까?

무사히 돌아와 한참을 지낸 지금에사 그 때를 회고하려니 감회가 새롭다.
즐거웠던 일들과 함께 고마웠던 많은 이들께 늦었지만 새삼 간곡히 감사를 전한다.

응답 4개

  1. 여강말하길

    덤님, 아직은 추워요. 별꼴도 못가고 있지 않아요. 쉬 갈께요.

    바다님, 실은 맛도 정도 훨씬 깊었는데 내 표현의 한계가 이것 뿐이요. 다음 다녀오셔서 보충해 주시오.

    ……… 우리 꼬뮤넷 팀과 꼭 다녀 오겠소. 꼬뮤넷 아 ㅅ 싸 아 ….

  2. […] | 여강만필 | 맛따라 정따라… 남쪽의 겨울바다에 가다._김융희 […]

  3. bada말하길

    고향나들이, 생생한 중계만으로도 행복 바이러스가 팍팍 번집니다. 1박 2일이 무척 짧았군요. 당분간은 새록새록 들춰볼 좋은 추억 장만하셨습니다.

  4. 말하길

    “혼자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오늘이라도 출발할 수 있지만, 남과 함께 떠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참 와 닿네요. 샘, 또 봄이 오고 있습니다. 올해 농사계획은 어떠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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