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친구들로부터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다. 학교 폭력은 반드시 근절시켜야 할 심각한 사회 문제로 진즉부터 당국은 그 대책에 부심하고 있지만, 전혀 끊일줄 모르고 여전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메스컴을 통한 실상을 접하면서 답답함과 함께 무언가 잘못된 대처 때문
하버지, 오늘 얘깃거리는 뭐야? 이제 하버지 수행에서 마지막 계율인 공감하고 연대하기야. 만약에 하버지가 괴로워하고 있는 눈앞의 어떤 피해자와 연대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괴로움을 공감했다면 이는 인간성을 회복하고 실현하려는 하버지의 수행의 공력이 드러난 거야.
잉마르 베리만이 죽었을 때 우디 앨런은 ‘심오한 질문을 던진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즈에 기고한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이안 감독은 “나는 베리만으로부터 스타일보다는 심오한 질문을 제기하는 정신과 두려운 존재에 대한 도전, 내면의 성찰 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검색엔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철학자’ ‘실존주의 영화 거장’이라는 수식어는
눈에 보이는 신체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누군가 잡았고, 그래서 이 사회의 어딘가에서 장애-비장애 교직작업이 일어났다.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지만, 최근 몇 년 간의 장애인 이야기 작업은 이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다.아픔을 간직한 사람들과의 이야기 작업에 참여해본 사람은 이야기 작업이 협력적 교직작업이라는 점을 금새
최근 나는 어떤 일본인 사상가와 한국의 친구들과 함께 이와 같은 “자기검열”의 고통을 공유해야 했다. 동시에 그러한 자기 검열을 넘어서서 흘러 넘쳤던 비밀스러운 시간을 공유했다. 번역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던 그 소중한 시간들은 언젠가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드러날 시간을 미리 사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이미 미래가 된 과거의 시간들. 그 시간들은 자신들만의 ‘시민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을 벗어나 더 멀고 풍성한 비밀스런 영역을 열어 젖히고 있다고 믿는다.
새해 첫 날을 천안에 있는 엄마 집에서 보낸 나는 밤늦게야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벌써 석 달째 이사문제로 속을 썩이는 집이었다. 집 계약은 만료된 지 오래인데 새 집 주인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만 내려오라는 눈치를 시시때때로 보냈다.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고작 1년, 아직은 서울에서의 독립생활을 좀 더 누리고 싶었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어제 밤의 일이랍니다. 나는 방 안 이불 속에 누워 설핏 잠이 든 상태였습니다. 어디선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창문 밖 겨울바람이 건네는 말처럼 그 무언가가 심술궂은 소리를 냅디다. 이 정체모를 소리는 다섯 자매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집 앞 댓돌에서 신발 다섯 켤레를 몰래 훔쳐다가 마침 지나가던 다섯 형제 커다란 열
만약 공부방을 하다 죽는다면 십중팔구는 울화통이 터져 죽거나 어처구니가 없어 죽을 경우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애들하고 있다 보면 겨우 그 따위 일로 이렇게 난리를 부리나 싶은 것투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밑바닥을 매일 봐야 하는 공부방 교사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힘겹다.
지난해 3월부터 친구들이 세들어 살기 시작한 단독주택에, 늦은 봄인 5월 부터 제가 ‘쳐들어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해가 바뀌어 다시 3월이 되었고, 겨울을 막 벗어나고 있으니 나름 사계절을 다 지내본 셈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은 거실에 창도 크고, 방도 3개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가 아니어서 그런지 살기에 부족함이 없고 참 좋았습니다. 적어도 가을까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올 겨울을 보내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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