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여강만필의 필자로 계시는 김융희 선생님 댁에 다녀왔습니다. 함께했던 멤버들은 병권, 은유, 단단, 꼬기, 그리고 유나, 서형으로 모두 수유너머R의 식구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행을 갔던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도 안 납니다. 별로 바쁘게 살았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리 돼버렸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그것도 산 좋고 물 맑다는 강원도 연천에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껏 부풀었더랬죠. 강원도 연천은 서울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 재미난 수다를 떨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논과 밭,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푸른 잎의 나무들을 동물원 온 것 마냥 두 눈 똥그랗게 뜨고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선생님 댁에 도착했습니다.
인가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시골마을, 사방에서 산이 둘러싸고 한 쪽에는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는 그야말로 달력 사진에나 나올 법한 풍경이었습니다. 사람 손 한 번 닿은 적 없는 자연의 숲 한 가운데에 조용한 농가 하나가 한적히 잠들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하면 대강 상상이 되시려나요?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 모습이었다니까요.
잘 아시다시피 연구실에서는 채식을 합니다. 아직 수행이 덜 된 이 가련한 중생은 가끔 고기가 그리워지곤 하는데요. 그런데 이게 웬일! 선생님께서 제 마음을 아셨는지 고기를 무진장 많이 준비해놓으셨지 뭡니까. 덕분에 저희들은 오랜만에 정겨운 시골반찬과 함께 고기를 맘껏 먹으며 한을 달랠 수 있었답니다.(같이 가셨던 분들 혹시 저만 소원 풀었던 건가요? 흑ㅠ_ㅠ;) 은유 선생님께서 벅벅 찢어 주시던 김치 생각이 지금도 나네요. 서울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 묵은 김치 맛!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배불리 먹고 두툼해진 배를 두드리다 개울가로 달려갔습니다. 유나와 서형이는 진즉에 준비를 하고 물속에 몸을 풍덩 잠근 채였죠. 세상에 개울가라니. 시골에서 살았던 저도 유치원 졸업 이후에는 볼 수 없었던 풍경입니다. 어찌나 물이 맑던지 자글자글한 송사리들이 난생 처음 보는 인간들의 습격에 놀라서 도망가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더라구요. 유나와 서형이는 물고기를 잡겠다고 이쪽저쪽에서 나름 포위 작전을 펼치며 그 자그마한 손으로 연신 물속을 뒤져댔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잡히나요. 결국 한 마리도 못 잡고 제 풀에 지쳐버린 아이들이었습니다. 그치만 그것도 좋지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연 그대로의 물가에서 신나게 노는 경험을 하고 또 물고기들은 물고기대로 간만에 운동을 했으니 뭐 서로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보고 경영학에서는 윈윈게임이라고 한다죠. 허허. 뭐라구요?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고 있다구요? 무슨 말씀을. 인공적인 물가 말고 자연적인 물가에서 놀아본 기억 잘 떠오르십니까? 어렸을 때 말고는 없으시지요? 아니면 혹시 어렸을 때조차 그런 기억은 없는 거 아니신지? 한 번 해보셔요. 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란 걸 아시게 될 겝니다. 흐흐흐.
자기도 보고 싶다고 달이 해를 부러워한 탓인지 연천의 해는 일찍 졌습니다. 서울보다 달이 금방 찾아오지요. 주변에 별다른 인가도 없고 변변찮은 가로등도 몇 개 없어서 새까맣게 타버린 밤이 세상을 온통 칠해버렸지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칠흑 같은 밤 메밀꽃이 피어있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는 기막힌 구절이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밤이었습니다. 저희는 반딧불을 찾겠다고 길을 나섰습니다. 어둠 속에서 옹기종기 달라붙어 구불구불 구부러진 시골길을 걷는 동안 뻐끔뻐끔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와 차분히 제 할 일 하는 온갖 풀벌레들 소리, 시원한 바람이 풀밭을 흐드러지게 훑고 지나가는 소리가 스르륵 귀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인생에서 언제 또 한 번 이런 경험을 하게 될까요. 묵묵히 길을 밝혀주는 달밤에게 감사의 기도라도 하고 싶어졌습니다. 아쉽게도 반딧불은 찾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그날 밤 풍경이 들려줬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 소리는 서울에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돌아와서 뭘 했는지 아세요? 아니 그게, 요즘 대학생들 MT가도 잘 안한다는, 무려 모닥불을 피웠더랬습니다! 산어귀에 이리저리 놓여있는 나뭇가지들을 주섬주섬 모아다가 붙여보고 또 붙여보기를 몇 차례 드디어 불이 붙고야 말았습니다. 아 그건 정말이지… 그래서는 안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인간에게 선사하다니. 그건 너무 과분한 선물이었어요. 새까만 밤에 모닥불 하나만 조촐하게 타오르는 그 낭만, 낭만, 낭만적인 풍경이라니! 제 아무리 무드없는 사람도 그 불꽃 앞에선 가슴을 녹이고야 말았을 겁니다. 온몸의 초점을 잃게 만드는, 하염없이 흔들리는 불꽃들의 춤사위. 인류 초창기의 모든 원시인들의 기억이 섬광처럼 내 몸에 현현하는 그 황홀한 순간. 어느 시인의 말처럼 거기에 내 고향도 아버지도 다 있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아무리 이성으로 중무장을 했어도 날 것 그대로의 자연 앞에 던져진 불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게 만듭니다. 지나간 삶의 순간순간들을 기억하고 또 앞으로 있을 수많은 삶을 떠올리며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들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이런 말을 한 적 있지요. 인생에서 기쁨과 슬픔을 모두 충분히 겪은 다음 친구와 함께 악의 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적어도 행복 하나는 누렸던 밤이었습니다.
다음 날 선생님은 일찍부터 일어나시고는 저희를 위해 아침을 준비해주셨습니다. 그윽한 눈으로 유나와 서형이가 밥 먹는 모습을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인자한 모습이 빼놓을 수 없는 별미였습니다. 언젠가는 저 역시 그런 모습을 하고 아이들이 밥 먹는 걸 바라보는 날이 오겠지요? 서울 사람들은 벌레도 싫어하고 귀찮은 것도 싫어하지만 시골에 오면 자연스럽게 벌레와 친하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몸에 부지런함이 자연스럽게 배게 된다고 말씀하시던 선생님. 돌아오는 길에 거울에 비친 선생님은 처음 왔을 때의 그 모습처럼 한 폭의 동양화 안에 들어가 계신 듯한 모습으로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정말 좋은 추억 하나 싸가지고 왔습니다, 선생님.
– 서동욱(수유너머R)
ㅎㅎ왜이러십니까~ 귀신놀이(?)한걸 빼먹다니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