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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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흐친과 혁명, 혹은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먼저 조심스럽다. 이유는 간단한데, 바흐친 자신의 지적 이력에서 그가 정치적인 주제에 관해 발언하거나 글을 쓴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유와 저작 활동을 철저히 문예학과 문화 연구에 한정시키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 HannahArendt
    동물행동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차피 인간 또한 영토적 동물이라, 자신의 ‘나와바리’를 만들고 타인들로부터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런’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사람이라도 다 같은 건 아니어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런 성향을 ‘본성(nature)’이라고 간주하여 고수하려는 이들도 있지만, 대면하고 넘어서려는 줄기찬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를 잡아먹는 것이 ‘자연적 성향’이라고 보아 그것과 대결하고 바꾸어보려는 이들도 있다. 어떤 문제에서도 이런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는 나타나게 마련인데, 말 그대로 어떤 것을 지키려는 태도가 ‘보수주의’가 전자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주어진 것을 바꾸려는 태도로서 ‘진보주의’라는 말에는 후자를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 po33_02
    정치란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현실 정치가 궁극적으로 어느 곳에 돈과 영향력이 배분되어야 할지 결정하는 투쟁 혹은 교섭인 것은 그 때문이다. 맑스주의는 이런 정치를 늘 혁명과 연계한다. 혁명이야 말로 희소한 자원을 가장 극단적으로 재배분하는, 나아가 무엇이 희소하고 귀중한지에 대한 관념을 바꾸어버리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 llljs78200708311904460
    ‘들뢰즈의 정치’에 대해서 말하려 하면, 먼저 ‘들뢰즈와 정치’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한다. 들뢰즈 사유의 정치철학적 함의를 다룬 폴 패튼의 저서 제목이 『들뢰즈와 정치』가 된 것도, 아마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들뢰즈는 아주 강한 의미에서의 ‘철학자’이고, 그의 사유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존재론이고, 그 ‘존재론과 함께 하는 윤리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 과학자, 정치가에 대해, 또는 그들과 함께, 자신의 사유를 펼쳤지만, 한 번도 특정 분야에 대해 ‘반성’하는 철학(가령, 예술철학, 과학철학, 정치철학 등)을,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펼친 적이 없다. 들뢰즈의 정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존재론과 정치를 접속시키는 창조적 재구성 과정이 필요하다....
  • rp31
    21세기의 첫 십년 동안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는 통상 ‘제국 3부작’이라고 불리는 3권의 책, (2000), (2004), (2009)를 펴냈다. 이들의 작업, 특히 새로운 밀레니엄의 첫 해에 출간된 은 엄청난 주목을 받았고 또 그만큼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설령 ‘운’에 불과할지라도, 어떤 ‘때’가 닥쳤을 때 그것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낚아채는 책들이 있는데, 도 그런 책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 354_데리다3
    데리다는 시종일관 경계의 문제를 자기 사유의 주제로 삼았던 철학자다. 경계란 세계에 어떤 구별을 도입하는 것, 구별짓기를 통해 질서와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경계의 이편과 저편,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거기에 권리나 자격을 할당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랑시에르 식으로 말해 경계짓기는 대개 치안(police)으로서 정치를 정초한다.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정체성의 여러 표지들, 곧 인종과 민족, 국적, 성별 등의 차별의 분할선들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데리다의 문제 설정은 경계가 경계로서 내세우는 권위의 원천이 우연스럽고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 jj01
    지금까지 슬라보예 지젝은 주로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잡다한 대중문화 현상을 재기발랄하면서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비평가로만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의 본령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사유를 통해 난쟁이처럼 왜소해진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구원하고자 하는 정치신학에 있다. 정치신학은 노모스(법)의 질서를 수립하는 정치학에 신학의 ‘외부’ 개념을 도입하여 법 바깥의 영역에서 정치와 혁명의 동력을 찾는 실천이론이다. 들뢰즈와 푸코가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정신분석학은 근대의 세속화된 유대-기독교 신학이다. 지젝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사유구조를 한계가 아니라 현실정치의 외부를 발견하는 돌파구로 본다...
  • 312_발리바르
    근래 들어 다시 번역되기 시작한 발리바르의 저작들은 그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상당히 불식하고 있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중반까지 발리바르는 맑스주의가 처한 위기의 극복을 모색하는 맑스주의자로서 면모가 강했다. 의 역자해제에서 진태원에 따르면 그는 “자본주의 분석을 위한 탁월한 지침이자,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이론가”로 수용되어왔다. 하지만 근래 번역되기 시작한 그의 저작에서는 그런 작업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역시 진태원의 지적처럼 “이 책(-인용자)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관한 논의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하겠다...
  • Agamben
    정치란 지오르지오 아감벤(G. Agamben)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삶 내지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미셸 푸코 이래로 근대정치를 생명의 정치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아감벤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는 고대로부터 서구 정치 일반이 생명의 정치 내지 삶의 정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서구에서 정치란 기본적으로 권력과 삶이 마주치는 장소에서 정의되어왔기 때문이다.
  • 263_지그문트+바우만
    바우만에 따르면 우리는 ‘유동적 근대’에 살고 있다. ‘유동적’이란 모든 것이 가변적이고 불확실하여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불확실한 것들을 제거하려는 기획 전체를 근대성으로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근대는 진보와 생산의 시대로 이해되지만, 바우만이 보기에 그런 고정적 근대성(solid modernity)은 필연적으로 부정적 결과로서의 유동적 근대성을 생산한다. 그는 근대의 기획에 따른 엔트로피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유동적 근대성의 형상을 ‘쓰레기’라는 것으로 설명하거니와, 이것은 비단 매일처럼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투기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 바디우02
    바디우에게 정치란 근본적으로 국가와 무관한 것이다. 국가가 지배를 위해 권력을 운용하는 활동을 그는 정치가 아니라 ‘관리’라고 부른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이 국가 권력에 의해 계산되지 않는 존재들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고 그것을 선언하는 활동, 다시 말해 혁명적 실천에 걸맞는 이름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관은 사실상 그의 존재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가란 상황을 지배하기 위해 상황에 속한 요소들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혁명적 정치란 그 재현의 질서에서 배재된 자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이 사건이란 그 자체가 발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일소하는 신의 현현(데우스 엑스 마키나)과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건은 섬광과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만난 이후 사건에 충실해지는 ‘주체’이다....
  • 24_rp_02
    성폭행이 물리적 폭력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적잖이 당혹스러운 이 말은, 보수꼴통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성(sexuality)이라는 범주에 깊은 통찰력을 가졌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이 문제적 발언의 주인공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성폭행에 관한 법안을 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성을 좀 더 중요한 법적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성 범죄를 여타 범죄와 다른 논리로 다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푸코는 이런 일련의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정치적 사유에 기여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를 ‘치안’과 구별하여 정의한 것이다. 즉 정치는 치안과 그 본성을 달리한다는 테제가 그것이다. 사실 정치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를 뿐 아니라,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에 대한 사유가 정치의 개념으로 집약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어쩌면 매우 자연스런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가령 슈미트가 정치에 고유한 것을 명확히 구별하여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려고 했을 때나, 아렌트가 그리스에서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구별을 통해 정치를 정의하려고 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