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발리바르의 맑스주의 정치학, 혹은 일반화된 맑스주의를 위하여

- 정정훈(수유너머N)

1.발리바르와 맑스주의의 전화

근래 들어 다시 번역되기 시작한 발리바르의 저작들은 그에 대한 기존 이미지를 상당히 불식하고 있다.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중반까지 발리바르는 맑스주의가 처한 위기의 극복을 모색하는 맑스주의자로서 면모가 강했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의 역자해제에서 진태원에 따르면 그는 “자본주의 분석을 위한 탁월한 지침이자,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이론가”로 수용되어왔다. 하지만 근래 번역되기 시작한 그의 저작에서는 그런 작업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역시 진태원의 지적처럼 “이 책(<우리, 유립의 시민들?>-인용자)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프롤레타리아독재에 관한 논의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고 하겠다.

최근 번역된 <스피노자와 정치>, <대중들의 공포>, <우리, 유럽의 시민들?>과 같은 저작은 그의 관심이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것이나, 프롤레타리아독재론을 정밀하게 구성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권이나 시민권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치적 권리의 구성가능성을 모색하는 권리의 정치철학자와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인권과 시민권을 비롯한 권리의 정치철학은 사실 전형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특권적 개념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제 발리바르는 인권이나 시민권의 정치철학적 기초를 논의하는 자유주의자로 변모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발리바르가 새로운 권리의 정치철학을 모색하는 이유는 현재의 정세가 해방의 정치는 물론 변혁의 정치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가는 폭력의 잔혹성 속으로 함몰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는 <위클리 수유너머> 24호에 실린 필자의 글 “정치의 가능성을 위한 질문들”을 참조하라.) 발리바르의 현재적 작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는 ‘정치의 가능조건을 확보하는 정치’라는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관심사 속에서 그의 작업은 인권이나 시민권과 같은 권리이론에서부터 인종주의, 민족주의, 폭력, 국민국가형태, 주권형태, 유럽 구성, 세계화와 같은 폭넓은 정치적 주제들을 가로지르며 정치의 가능성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발리바르의 사유 역시 이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가 그간 맑스주의의 고유한 아포리아를 지적해온 작업을 해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그러한 아포리아를 드러내는 작업은 맑스주의적 정치의 가능성이 봉쇄되는 정세 속에서 맑스주의가 당면한 자신의 무능력을 확인하는 작업이며, 이러한 정세 속에서 맑스주의가 재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변화의 지점을 찾기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발리바르가 맑스주의를 어떻게 전화시키고자 하는지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맑스주의의 난점 : 이데올로기 개념의 동요

발리바르는 맑스주의의 독창적 성과이자 핵심적인 아포리아를 이데올로기론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포리아는 맑스주의의 시작점인 맑스와 엥겔스 자신에게서부터 나타난다. 맑스와 엥겔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특징적인 이론적 동요, 부단히 실종되고, 부단히 반정립적인 편향들로, 문제설정들의 전위들로 번역되는 이론적 동요”(<대중들의 공포>,214)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맑스와 엥겔스의 텍스트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분포에서 어떤 공백이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이데올로기 개념은 1845-46년기에는 빈번히 사용되다, 1847-52년에는 간혹 주변적으로 출현할 뿐이고, 그 후 거의 사용되지 않다가, 1870년대에 <반-뒤링> 이후로 다시 대량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공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이 산출하는 허위의식으로 나타난다. 허위의식으로 이데올로기는 철학적으로는 관념론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관념론의 반대편에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데올로기가 비판될 수 있는 특권적 장소, ‘진리의 진정한 장소인 동시에 세계변혁의 장소’라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독일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와 프롤레타리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이데올로기적 환상/전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의식이 대치된다. 그 자체로 아무런 매개도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명한 의식.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자신의 혁명적 실천의 선결조건이자 최종결과이다. 2)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계급에 반하는 자기 이익을 가진, 즉 적대하는 계급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의상 보편성을 결여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가 계급이라면 자기계급의 특수이해를 가지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난점이 발생하게 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가 무매개적으로 진정한 보편성과, 실천 그 자체와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 이해는 계급 이해이기를 멈추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체가 계급이기를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계급/비계급’이어야 한다.”(<대중들의 공포>,224) 그래서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대중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구별이 도입된다. 그런데 이는 ‘계급’투쟁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시각에서 부르주아지는 역사상 유일한 계급이다. 그리고 프롤레타이라트는 그 개념에 충실하게 된다면 더 이상 계급이 아니라 대중이 된다.

이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트와 정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두 항 사이에 양립불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의상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추상과 동일시되는 모든 정치의 부정이며, 또한 공산주의는 비-국가, 정의상 일체의 정치적 매개가 소멸한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된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계급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의식을 결여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독일이데올로기>의 답변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적 의식을 지니고 있는 노동자계급이라면 그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는 것.

이러한 난점을 맑스는 해결할 수도 없었고, 회피할 수도 없었다. 이 문제가 혁명적 정치 그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더욱 더 무이데올로기적 존재로 등장한다. <선언>은 자신의 입장을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적 입장들과 구별한다. “바뵈프의 (그리고 블랑키의) 공산주의를 구별해주는 것은 바로 그 공산주의가 순수히 정치적이며, 스스로를 ‘체계들’, 즉 그 자체 개량주의와 동일시되는 체계들과 동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실천적, 혁명적 의지와 동일화된다는 점이다.”(<대중들의 공포>,234) 하지만 이 지점은 곧 <선언>에 내재하는 모순의 한 복판이기도 하다. “정치적 이데올로기 없이, 즉 국가 또는 미래의 국가 또는 국가의 미래에 대한 담론 없이 어떻게 정치를 생각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선언>의 맑스의 답변을 발리바르는 ‘정치유물론’이라고 개념화한다. 이제 계급투쟁에 대한 사고, 혁명에 대한 사고가 달라진다. 혁명은 일거에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모순들의 실제의 형세로부터 출발하여 계급사회로부터 무계급사회로의 통과를 실현시키게 될 하나의 과정, 또는 이행’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실천의 개념도 달라진다. 실천에는 이중적 의미에 지도의 계기가 포함되게 된다. 혁명의 현실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직접적 인해와 목표들을 운동의 미래와 연결할 수 있는,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다양한 형태의 분할을 초월하여 통일할 수 있는 세력들의 전진적인 건설 또는 구성이 되는 것이다.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비-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유일계급)와 구별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독일이데올로기>와 달리 <선언>은 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계기로 이해한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난점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특수한 계급으로서 행동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고유한 이데올로기의 담지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내포하는 표상들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극히 어렵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행동 속에서, 또는 자신의 행동의 전략적인 변전 속에서 이 표상들에 의해 결정된다.”(<대중들의 공포>,236)

그러나 맑스는 이 문제를 제기하는가? <선언>은 이데올로기에 발본적으로 외재하는 계급의식이라는 신화를 결코 정정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일지를 전혀 말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다. 이때부터 이론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의 추방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데올로기론은 제기되었으나 사유되지 않은 채로 공동화된다.

3.스피노자로의 우회 : 또 하나의 토대 이론을 위하여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맑스에게서 이데올로기론은 정치와 긴밀한 관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정교한 사유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것이 공백으로 남아버렸다는 것은 또한 맑스에게는 정치에 대한 사유가 충분히 숙고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숙고되지 않은 채 남겨진 대신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를 위한 특권적 장소를 경제에서 찾아냈다. 바로 경제였다. 경제는 정치를 규정하는 정치의 타율성, 즉 토대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의 정치경제학비판 프로젝트는 바로 이 정치의 율성으로서 경제에 대한 이론화작업이었다. 발리바르는 정치의 타율성로서 경제를 ‘일반화된 경제’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정치의 타율성이 단지 일반화된 경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정치를 규정하는 또 다른 타율성에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가 있다. 맑스에게서 제기되었으나 그 난점으로 인하여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아버린 영역. 발리바르는 이 타율성을 또 하나의 토대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토대는 경제만이 아니다. 이데올로기 역시 토대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라는 또 하나의 토대를 사유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반면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라는 토대를 사유했지만 또한 경제라는 영역을 인지하지 못했다. 맑스와 스피노자는 공히 정치의 타율성을 사유한 사상가이지만, 양자는 모두 불충했다. 한쪽은 정치의 타자로서 일반화된 경제를, 다른 한쪽은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를 사유했지만 각자에게 상대방의 문제설정은 공백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맑스와 스피노자를 연결시킴으로서 일반화된 토대이론을 구축하고자 한다.

“스피노자에게는 (정서들의 모방으로부터 시작되는) 대중의 동일시/정체화에 대한 이론 속에 심리학적 분석 또는 ‘상호개인적인 정신 현상’에 대한 분석의 한 요소가 존재하며, 우리는 이것을 단지 맑스주의의 한계로서만이 아니라 유물론적 역사관에 본래적인 아포리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는 분명히 정치에 내재적인 경제적 조건 및 더 나아가 그것에 내재적인 적대들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생산’에서 개인적 역량들의 합성을 보여주는 공리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관점 때문에 본질적으로 스피노자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스피노자와 정치>, 245)

그렇다면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라는 또 하나의 토대는 어떻게 정치의 타율성이 되는가? 이는 무엇보다 정치적 주체화와 관련이 있다. 이미 알튀세르가 보여주었듯이 대중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적 조건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관계들을 인식할 수 없고,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그것들과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즉 발리바르에게 있어서도 이데올로기란 현실에 대한 주체의 상상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주체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자장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미 다른 곳(“정치의 가능성을 위한 질문들”,<위클리수유너머>,24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배제된 대중들이 배제하는 자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배제된 서로를 향해서 폭력으로 휘두르는 탈정치적 폭력의 주체가 되는 이유에는 그들이 자신의 현실을 상상적으로 인지하는 방식, 즉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배제된 대중들은 공포의 정념에 사로잡혀 현실과 상상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 가운데서 자신들이 경험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종이나 종교와 같은 동일성에 고착됨으로써 정서적 안정감을 누리려 하며, 이 동일성에 부합하지 않는 또 다른 배제된 이들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상상하게 된다. 그 결과는 공포의 정념 속에서 행사되는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정치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며,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폭력을 유발하는 정념적인 상상, 즉 이데올로기를 전화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때 이데올로기의 전화란 대중의 상상계를 전화하는 작업과 결부되고, 대중적 상상계의 전화라는 문제의식은 바로 스피노자 철학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대중들의 부정적 정념을 긍정적인 것으로 전화하여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정신에 따라 인도되는 신체’처럼 구성하는 것이 스피노자의 정치적 문제의식이었다면, 이 과정의 핵심에는 이데올로기를 긍정적인 것으로 전화하는 것이 놓여있다. 이데올로기적 조건에 따라서 대중이 폭력의 주체가 될지, 해방적 정치의 주체가 될지가 갈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정치의 또 다른 타율성이며, 또 하나의 토대이다.

4.일반화된 맑스주의를 위하여

발리바르의 맑스주의 전화 프로젝트의 핵심에는 이렇듯 토대론의 재구성에 있다. 맑스는 이데올로기라는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허위의식과 참된 의식의 이분법적 구별 속에서 이 문제를 정교하게 이론화할 수 있는 길을 상실했다. 스피노자는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과 그것의 힘을 사유했으나 경제의 차원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스피노자가 맑스에게는 지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하고 “맑스가 스피노자에게는 지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어떤 것을 설명”(<스피노자와 정치>,245)한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생각이다. 발리바르는 양자의 접합을 통하여 정치의 타율성으로 일반화된 경제와 일반화된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제와 이데올로기의 접합을 통하여 일반화된 맑스주의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마도 발리바르의 맑스주의 전화 프로젝트의 핵심일 것이다.

응답 3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김강기명, Kimkang, claudine. claudine said: [weekly 수유너머] 정정훈 / 발리바르의 맑스주의 정치학, 혹은 일반화된 맑스주의를 위하여 http://suyunomo.jinbo.net/?p=5095 […]

  2. ............말하길

    아래 글 제가 잘 못 썼네요. 몽롱한 상태에서 바보짓 했군요.
    지워 주시기 바랍니다.

  3. ........말하길

    19c 당시를 생각해보면 프롤레타리아는 실제로 이미 국민 국가들을 횡단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미 국민 국가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맑스를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옳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맑스와 엥겔스가 에서 혁명과 프롤레타리아가 상상적인 것과 무관한 것으로 본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혁명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상상계와 이데올로기로의 회귀가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적인 혁명 프로그램으로 회귀하는 것이죠. 혁명은 달성되어야 할 상태도 아니고, 어떤 이상적인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문제도 아닌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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