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최전선

Releases

  • 시아버님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 건 작년 추석 이후였다. 그 전에는 스스로 몸을 가누고 앉아있으실 수 있을 정도였는데 추석 때엔 아예 몸을 일으키지 못하셨다. 요번 설에는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 “수안아 이게 누고? 숙모 아이가.” 마흔 넘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우리 부부가 대견해서인지 조카 수안이에게 나를 가리키며 수십 번도 넘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그 말씀을 듣지 못한다.
  • 나는 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신문 사회면의 그래프, 도표의 퍼센티지 숫자들 중 한 점으로 자리해서 당신들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쥐 죽은 듯 살던 내가 졸업 선물로 88만원 세대라는 딱지와 함께 취업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출산도 포기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선물 받은 후부터였다. 점으로 만들려는 당신들에게 포획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결론은 점이 되어 버린 아니 원래부터 점일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이야기다.
  •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실눈을 뜨고 운동장을 한 바퀴 훑는다. 점심시간이라 운동장은 아이들로 가득하다.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니는 아이, 철봉에 매달린 아이, 한쪽 구석에서 땅따먹기 하는 아이, 정글짐 꼭대기까지 올라간 아이. 공을 차는 남자 아이들은 “여기로 보내” 연신 소리를 지르며 시끄럽다. 저 중에 있을텐데. 내 눈은 여기 저기 다른 아이들의 얼굴에 가서 걸린다. 목표물을 찾지 못한 나는 안달이 난다.
  • 벌꿀 in 글쓰기 최전선 2013-04-13
    왜인지 우리는 아빠보다 먼저 영등포 기차역에 도착해있기 마련이었다. 길면 한 시간, 짧으면 30분 가량의 시간동안 발을 동동 구르며 아빠를 기다렸다. 내가 여덟 살 되던 해, 공무원이었던 아빠는 삼년 간 부산의 하숙집에서 기거했다. 장기 출장을 가면 그 만큼의 수당을 추가 할당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네 명의 어린 자녀 그리고 그때까지 앞 길이 불분명했던 두 명의 성장한 동생을 집에 두고
  • 또다시 3월이 되었다. 교칙상 겨울코트를 입을 수 없는 달이지만 그렇다고 봄이 오진 않은 교실에 오십 명 남짓의 여중생들이 모여 있었다. 3월에는 난로를 켜주지 않았다. 얇고 때가 묻은 커튼을 활짝 걷어놓아도 햇살은커녕 바람만 더 들어 왔다. 그나마 몇 줄기 비치는 햇살에는 먼지만 방향 없이 춤추고 있었다. 봄방학 동안 신지 않은 실내화는 체온까지 앗아갈 만큼 차가웠다.
  • 구름 in 글쓰기 최전선 2013-02-19
    "야, 우리 데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지난 추석을 앞둔 평일 늦은 저녁, 직장동료와의 통화 중에 순이가 내던진 말이다. 불과 3개월 전, 내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전원 복직을 위한 희망걷기'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너 데모 같은 데 다니니? 니가 그럴 처지야? 니 앞가림이나 신경 써."라고 했던 그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어쩌다 '데모'라는 단어가 나왔는지 궁금해졌다.
  •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앞 벤치에 앉아있다. 지나가는 학생들도 별로 없고 조용하다. 50분이 되어 건물 경비원께 미화숙소가 어디 있는지 여쭤본다. 웅얼웅얼, 머뭇거리시더니 미술원 별관으로 가면 있단다. 별관이면 근처에 있을 텐데…. 지나가는 한 학생에게, 교수님 같은 분께도 물어도 모른다한다. 약속시간이 2분이 남았다. 순간 다급해진다. 왠지 길이 없을 것만 같은, 건물의 뒷길로 들어간다. 걸래가 빨래 줄에 가지런히 걸어져있고 스테인레스 철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여기야! 그렇게 조용하던 학교에서, 왁자지껄한 육성을 들으니 반가워 긴장한 마음 한번 들이쉬는 것도 까먹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머, 학생들 왔네~ 밥은 먹었어? 우리 학생들한테 커피한잔 타줘야지~ 뭐 이런 걸 다 가져와! 돈도 없을텐데.”
  • 작년 가을, 두물머리에 3백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이날 가 열렸다.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간식을 먹고 다시 음악을 듣고,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음식이 마련된 비닐하우스 입구의 대형 지짐판에 부침개가 빼곡했다.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친 사람들은 술판을 벌렸다. 안주도 푸짐하다. 순대, 소세지 야채 볶음, 김치 부침개, 호박 부침개, 조청 가래떡, 오뎅이 바닥을 보이지 않고 화수분처럼 계속 나왔다. 화수분의 중심에는 생협 언니들의 진두지휘가 있었다. 거기에 최소영이 있었다.
  • 현아는 인사성이 밝은 아이다. 맥에서 일하는 알바생들은 서로 친하지 않으면 인사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아는 누구에게나 반갑게 먼저 인사한다. 일이 서툰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다가가 도와준다. 누군가 모르는 것을 물어볼 때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상냥하게 가르쳐준다. 사람들은 그런 현아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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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이 in 글쓰기 최전선 2012-11-15

    지난 10월 내 동생 짱구(가명)가 전역하며 혼자 살던 집이 시끄러워졌다. 짱구는 입을 옷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며칠 동안 방에서 뒹굴더니 인터넷에서 알바를 검색했다. 내년 3월에 복학하기 전까지 다섯 달 동안 집에서 할 일도 없으니 바짝 돈을 벌어 “급전을 땡겨놓겠다”고 말했다. 22살 짱구는 외모에 관심이 많다. 알바비를 받으면 요즘 유행하는 워커 1켤레, 가죽 재킷 1벌, 싱글 버튼 블랙 울 코트를 사겠다고 단단히 …

  • 송이 in 글쓰기 최전선 2012-11-08
    <구여친들ex-girlfriends>은 지난 4월 송이와 해어린이 결성한 여성듀오다. 해어린의 '나도 누군가의 구여친이고 싶다!'는 외침과, 송이가 어떤 사정으로 집에 있던 구구구남친의 남방을 해어린에게 넘긴 것에서 영감을 얻어 그룹 이름을 정했다. <구여친들>은 그룹을 결성한 것 외에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다. 골든디스크상 수상을 노리고 음반을 기획했으나 아직 구상에 머무르
  • 남색 모자를 쓴다. 검은색 머리망 사이로 머리카락이 빠져 나오지 않게 머리카락을 구겨 넣는다. 시선을 아랫도리로 옮긴다. 지퍼는 잘 닫혔는지, 신고 있는 신발이 검은 구두가 맞는지 확인한다. 가끔 의도한 건 아닌데 어짜자고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지퍼를 내리고 있는 경우가 있어 민망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윗도리 검은색 티셔츠 OK. 검은색 깔맞춤 완성. 휴대폰을 보니 9시 55분. 지금 내려가면 10시 정시 출
  • 아파트 입구에 집을 짓는다. 오후 두 시부터. 소요되는 시간은 20분이면 족하다. 파란색 비닐 지붕의 집, 뒤에는 짐을 싣고 온 작은 트럭을 대기시켜 놓았다. 아줌마가 가지고 온 짐은 단촐하다. 떡볶이 양념과 호떡 반죽과 오뎅, 튀김 만두, 종이컵, 기름, 핫도그 등등. 끈으로 묶은 비닐을 펼치고 옆 비닐을 마저 내리면 작은 포장마차. 또 다른 아줌마의 집이자 일터가 완성된다. 완성된 일터에서 준비 작업
  • 이번 추석 전날 집에는 식구가 달랑 셋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 최소 인원 대여섯은 되던 명절 집풍경이 조금 썰렁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고등어를 구워라 갈치를 구워라 반찬 걱정이시다. 가난한 서울자취생 둘째 딸래미가 싱싱한 생선은 입에도 못 대지 싶은가보다. 노릇하게 굽힌 도톰한 갈치살 위에 직접 양념간장을 올려주시며 어서 먹으라고 성화다.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며 뼈바르는 것까지
  • 희정 in 글쓰기 최전선 2012-10-09
    “첫돌 돌잡이할 때 붓을 잡았어요. 당시엔 펜을 잡으면 회사원이 돼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고 어른들이 생각했대요. 그런데 웬걸 나중엔 보니 그 펜이 그림 그리는 붓이었던 거라.”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거란 어른들의 기대와는 달리 가난한 화가가 된 그에게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물으니 첫돌 때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만화를 따라 그렸죠. 학급 게시판 뒤
  • 2012년 6월 14일 저녁 6시 50분. 홍대입구역 3번 출구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지잉”하고 손에 든 핸드폰이 울린다. 내달리다 시피 걷고 있는 발걸음이 꼬일까 주의하면서 황급히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전에 교육학 세미나 하던 방으로 오시면 돼요~] 역시 먼저 와 있구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오늘도 회색빛 교복치마 차림으로 연구공간 수유너머N에서 저녁을 먹은
  • 세실 in 글쓰기 최전선 2012-09-13
    이혜승은 고3 딸. 그러나 고3답지(?) 않다. 내가 봐도 여유가 있고 SNS 이용이 하도 활발하여 공부 안 하는 아이로 소문났다. 아이는 고3답지 않아도 고3 엄마답게 나는 속이 끓는다. 진지한 대화의 장을 마련해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인터뷰 과제가 주어졌다. 혹시나 하고 아이에게 물어보았는데 흔쾌히 "O.K." 했다. 의외였다. 제 오빠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사실 1분 1초가 아깝다고 보면 이 또한 고
  • 어렸을 적에는 하도 예뻐서 숭어리(꽃송이)라고 불리셨단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이미 손주를 셋 씩이나 둔 ‘할머니’였기에, ‘숭어리’라 불리던 그녀의 꽃 다운 시절을 상상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문득, 그러나 계속 궁금해졌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 토요일 저녁 6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와보는 시청은 쌍용자동차 희생자추모제가 한창이다. 집회 현장은 난생 처음 와보는 소심한 나였다.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해고는 살인이다’ 외치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을 헤집고 지나가기가 망설여진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대형 스크린 쪽은 백 미터 남짓 앞이다.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집회 발표자의 쩌렁쩌
  • 구름 in 글쓰기 최전선 2012-08-22
    역삼역엔 하루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오고간다. 대부분이 금융권회사건물이기에 3~40대 직장인들이나 그보다 조금 나이가 있으신 보험 아주머니들을 주로 볼 수 있다. 무심하게 높이 솟아 있는 잿빛 건물들, 제복이나 무채색의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 비슷한 색깔, 비슷한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늘 무언가에 쫓기듯 자기 갈 길만 바쁘게 오고가는 곳이 바로 역삼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