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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최전선

너의 얼굴

- 숨(수유너머R)

여름이 오는 걸까
우리가 여름 안에 들어가는 걸까
널 보고 있는 걸까
내 안에 네 모습이 들어오는 걸까
나무 아이 밤에 자라고
어른이 되어도
눈 감으면 볼 수 있나
열일곱 살 반딧불이
-빵, <반딧불이> 중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실눈을 뜨고 운동장을 한 바퀴 훑는다. 점심시간이라 운동장은 아이들로 가득하다. 술래잡기를 하며 뛰어다니는 아이, 철봉에 매달린 아이, 한쪽 구석에서 땅따먹기 하는 아이, 정글짐 꼭대기까지 올라간 아이. 공을 차는 남자 아이들은 “여기로 보내” 연신 소리를 지르며 시끄럽다. 저 중에 있을텐데. 내 눈은 여기 저기 다른 아이들의 얼굴에 가서 걸린다. 목표물을 찾지 못한 나는 안달이 난다.
아, 저기 있다. 그 애다. 그 애. 다른 반인 그 아이를 지금 아니면 보지 못한다. 남은 점심시간 30여분, 그 아이의 얼굴은 자석이 된 듯, 내 눈을 잡아 당겨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선생님이 하는 질문에 곧잘 대답하던 나였다. 1년 전 그 날도 수업시간 중 선생님이 던진 문제에 손을 들고 자신있게 발표했다. 질문이 무엇이었고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내가 뭐라고 멋지게 대답한 순간, 창가 2분단 셋째 줄에 앉아있던 그 아이가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있던 나를 보았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환하게 웃었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까맣고 가지런한 눈썹, 반달을 그리는 눈, 양볼에 파인 우물, 하얗게 드러난 치아. 그 아이의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아이 등 뒤에서 비치던 햇살까지.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커튼이 나부꼈다.

그 아이는 우리 5학년 4반의 반장이었다. 성적도 상위권이었지만 공부만 잘 하는 범생이는 아니었다. 바가지 머리 귀여운 얼굴에 장난도 곧잘 치고 운동도 잘했던 그 아이는 반에서 나름 인기가 있었다. 그 날의 웃는 얼굴만 아니었어도 나는 반장이 인기남이었는지 알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운명의 날 이후, 나는 그의 매력에 새롭게 눈을 떴다. 체육시간에 반 대항 계주를 할 때였다. 우리반이 6반에 50m 이상 뒤처져있었다. 다음 주자가 반장이었다. 큰 키는 아니었는데 짧은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 아이가 바람을 가르고 머리칼을 날리며 앞서 가던 6반 아이를 제칠 때 내 뱃속이 간질거렸다.
간질거리는 느낌은 수시로 찾아왔다. 발육이 부진한 몇몇을 빼고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이 가슴 몽우리가 생기고 브래지어를 입기 시작했다. 짖꿎은 남자아이들이 등 뒤에서 브래지어 끈을 잡아 당겨 튕기는 장난을 치면 여자아이들은 꺅-소리를 지르며 쫓아갔다. 반장도 여러 여자아이들의 브래지어 끈을 잡아 당겼고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나는 물론 “야, 죽을래!”하고 뒤쫓는 시늉을 했지만 그 때 진짜 화난 표정을 짓진 않았다. 소리는 질렀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이제 막 봉긋해진 내 가슴을 만지고 달아나는 더 심한 장난을 쳐도 마찬가지였다. 달려가서 때려줬지만, 그때 나는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아이가 만졌을 때 몰캉하게 느껴졌던 나의 젖가슴. 그 아이 손의 악력이 주는 흥분. 역시 이번에도 뱃속이 울렁거렸다. 묘하게 기분 나쁘지 않은 울렁거림이었다.

울렁증을 어렴풋하게 자각하기 시작했을 때 반장이 우리반 다른 여자아이와 사귄다는 소문을 들었다. 여자아이는 피부도 뽀얗고 키도 크고 늘씬했다. 학교 테니스 선수였던 나는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햇볕에 그을려 온몸이 시커맸다. 목욕탕에 가면 남자애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선머슴 같은 나와 달리 입술이 도톰하니 예쁘고 새초롬한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반장을 보며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기존의 나를 더욱 고수했다. 나는 더 터프해지고 더 쾌활해졌고 더 열심히 운동하고 말하고 웃었다. 대신 예쁨, 새침함은 내가 싫어하고 하찮게 여기는 목록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겉으로 더욱 씩씩해졌지만 마음은 더 애달팠다. 반장을 생각할 때면 뱃속이 여전히 간지러웠는데 쓸쓸함과 허전함이 덩달아 생겨났다. 혼자 있고 싶어졌고 생전 쓰기 싫어하던 일기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어스름이 지고 저녁을 해먹은 식구들이 티비 앞에 모이면 동생들은 친구와 있었던 얘기를 조잘거리느라 시끄러웠다. 입을 다물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무슨 일 있느냐고 자꾸 물어봤다. 집이 좁아 내 방이 없으니 대충 둘러대고 숨을 곳도 없었다. 그럴 때면 문방구나 책대여점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 골목을 쏘다녔다.
나는 우리집과 그 아이집을 가르던 대로를 건너지 못하고 이쪽 골목 안에서만 돌아 다녔다. 아무도 없는 길에 불이 꺼진 가게문과 내 그림자만 있었다. 노란 외등 불빛이 조용했다. 나는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그리는 마음이 가슴 속에 빈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겨울 방학이 지나고 봄방학을 맞으며 새학년의 반이 발표되었다. 나와 반장은 다른 반이었다. 편지를 썼다. 반이 달라져서 얼굴은 자주 못 보겠지만 좋은 친구로 지내자는 소심한 내용을 담아 꾹꾹 연필로 눌러썼다. 쓰는 데 일주일, 전해주기로 마음을 먹는 데 일주일, 편지를 건네는 데 또 며칠이 걸렸다. 처음 빳빳하게 이뻤던 편지가 가방 속에 잠을 자는 동안 귀퉁이가 닳았다. 친구라는 어중간한 글자에 숨어 편지를 전하는 용기를 냈다. 너무 어중간했을까. 아니면 그 뒤에 숨어있던 내 마음을 들켰던 걸까. 답장은 없었다.

답장을 받지 못한 편지를 전하고도 내 마음은 여전히 그 아이를 쫓아다녔다. 다른 반이 된 그 아이가 보고 싶어 쉬는 시간이면 괜히 복도에 나가 어슬렁거렸고 점심 시간에는 뛰어놀지도 않으면서 운동장에 나갔다. 그 아이를 발견하면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낮에는 눈으로 그 아이를 쫓고 밤에는 골목을 배회하는 날이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졸업을 하고 남중과 여중으로 학교가 갈리며 볼 일이 없어졌고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그 아이를 잊었다.
하지만 처음 그를 마음에 담았던 날은 아주 또렷하다. 가끔 그날의 교실을 떠올려보면 남자아이 하나가 나를 향해 웃고 그 얼굴 뒤에 햇살까지 덩달아 웃고 있다. 눈부시게 환한 웃음으로 기억된 그 얼굴. 내 사춘기 최초의 사건.

응답 1개

  1. 말하길

    ㅎㅎㅎ 비오는 봄날에 어울리는 수필..뱃속이 간지럽다는 표현이 묘하게 와 닿네..맞아. 그런 느낌…사랑은 심장이 아니라 배로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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