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Rele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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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8-17
    방학이 길어지니까 애들이 악마로 보이기 시작한다. 끼니 때마다 고개 쳐들고 웃으면서 나타나는 뿔 달린 악마. 복면한 밥도둑. 칠월말 팔월초 폭염에는 정신이 혼미해서 힘듦을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데도 최소한의 에너지가 필요한가 보다. 며칠 전. 외출했다가 5시30분쯤 귀가했다. 아들은 학원에서 친구랑 저녁 먹는다고 했던 참이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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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7-26
    글에 술 얘기가 잦았다. 술을 자주 마셔서가 아니라 술이 감각을 자꾸 자극해서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발견을, 술이 돕는다. 그렇다고 사유의 마중물로 술을 활용하기엔 육체적 한계와 시간적 제약과 심리적 저항이 크다. 습관화된 술자리가 주는 무료함, 술이 술을 마시는 강박증을 원치 않는다. 술은 신체유연제. 방심의 상태로의 초대. 냉동 초콜릿 같이 단단한 자아가 실온보관 초콜릿 정도로 부드러워지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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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7-05
    얼마 전 고1학생의 자살소식을 들었다. 죽은 시간과 상황이 유독 안쓰럽다. 일요일 아침 7시, 아빠가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위해 깨우려고 방문을 열었더니 창문 끝에 아이가 매달려 있다가 그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영화에서나 보던 가슴 조이던 장면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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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6-06
    신촌역 지하도로 내려가는 길에 할머니들이 새둥지처럼 좌판을 틀고 앉아계신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눈 마주칠 일은 없고 할머니의 나뭇등걸 같은 손이 보이는데 그 손이 발목을 잡으니, 냄새가 없고 부피가 크지 않은 품목으로 가끔 산다. 할머니 기장 얼마에요. 삼천 원. 나도 모르게 입이 딱 벌어졌다. 싸다. 왜 이렇게 쌀까. 좌판이니까 그래도 오천 원쯤 할 줄 알았다. 유기농 매장에서는 저 정도면 8천 원 대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반투명 비닐봉지에 들어있는데도 색깔이 색소 입힌 것처럼 샛노랗고 알이 굵다. 중국산이 틀림없다. 기어코 묻고 만다. 할머니 이거 중국산인가 봐요?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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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5-23
    만득귀자. 늦게 얻은 귀한 자식이 있네. 예전에 어느 역술인이 사주를 풀면서 한자로 써주었다. 표현이 하도 예스러워 신선했다. ‘늦게’라는 시간은 주관적이다. 간절히 딸을 원하다가 첫 아이 낳고 6년 만에 가까스로 만났으니 내게 너무 늦은 자식인 건 맞다. 주변 엄마들을 보아도 둘째 아이에게는 매우 관대하다. 나 역시 만득귀자를 보노라면 거의 부처님 수준의 자비심이 발했다. 발이 녹고 무릎이 없어지는 다정함의 세계. 품에서 내놓기 싫어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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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5-17
    라디오를 들으면서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라디오와 멀어졌다. 그러다가 2007년 즈음 임태경이 진행하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으려 다시 라디오 앞에 턱 괴고 앉았다. 들으니 좋았다. 평소에 듣던 노래도 디제이가 중저음으로 소개하고 강원도 삼척 사는 사람의 사연과 곁들이면 어쿠어스틱 버전처럼 낭만이 솔솔 피어났다. 음악이 손 잡아주는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라디오는, 영혼의 감기 정도는 금세 낫게 하는 ‘느낌의 공동체’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연소개 끝에 이름 대신 핸드폰 번호 뒷자리를 불렀다. 4951님 신청곡입니다. 이런 식이다. 깜짝 놀랐다. 수인번호 같았다.
  • oldgirl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5-08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랑 점심을 먹었다. 친구가 후배직원과 같이 나왔다. 뿔테 안경에 더벅머리를 인 선머슴 비주얼에다가 어딘가 겅중거리는 뒤태가 단독의 망상체계를 구축한 소년 캐릭터를 연상시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월의 다정한 햇살로 데워진 합정동 주택가 골목길을 터벅터벅 내려가는데 그 소년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말을 걸었다. “저, 등단 하셨어요?” 첨엔 놀랐고 바로 웃겼다. 너무 뜬금없어 무슨 접선하는 거 같았다. 시 읽는 여자로 나를 치장한 적은 있을지언정, 시 쓰는 인격으로 행세한 적은 없다. 그 푸른색 거짓말을 나는 모른다.
  • KOR9788932017136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5-04
    지난 주 글쓰기 수업을 마치고 여의도에 갔다. 약속한 사람이 MBC 조합원이다. 엠비시 노조는 지금 사방이 화택이다. 파업 80일을 넘기면서 본사 마당에 텐트 치고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동참하는 그와 잠시 나와서 저녁을 들었다. 파업이 너무 길어지고 회사는 요지부동이고 시민은 무관심하고. 내부에서도 업무에 복귀하는 조합원이 생기고 (파업에 합류하는 조합원도 있지만) 회사는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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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4-25
    독거친구들이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고 집에 들어가도 외로움을 달래려 TV부터 켠다고 했을 때 “나는 불 꺼진 집에 들어가는 게 제발 소원”이라고 했다. 진짜다. 동굴처럼 컴컴한 어둠이 기다리는 곳, 체온으로 덥혀지지 않아 풀 먹인 이불호청처럼 약간 서늘한 공기로 세팅된 공간에 들어가서는 오디오랑 스탠드 켜고 한 시간 정도 넋 놓고 앉아있어도 아무도 말 시키는 사람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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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4-18
    프리랜서로 글 쓰는 일을 완전히 그만둔 지 일 년이 지났다. 일명 문필하청업. 각종 사보와 공공간행물을 기반으로 주로는 인터뷰, 신입사원연수 동행기, 부서소개, 맛집 탐방, 새로 출시된 금융상품 안내, 공사 홍보책자 문건, 사장님 말씀 리라이팅 등등. 별별 일을 다 했더니 수입이 짭짤했다. 조삼모사인데, 원고료가 월정액이 아니라 여러 경로와 날짜로 들어오니 가끔 보너스 받는 기분도 들었다. 일을 그만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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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4-11
    같이 산 것도 아닌데 정이 드는 남자가 있다. 친구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다. 그들과 나는 참으로 비대칭적인 관계이다. 친구를 만날 때 같이 얼굴을 보기도 하지만 주로는 친구가 공개하는 간접 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전모를, 수다체로는 이꼴저꼴을 알게 된다. 둘이서 깨소금 쏟아지는 만남초기에는 남자들은 거의 정상성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친구는 연애 하느라 바빠서 연락조차 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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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4-05
    할 말 못할 말, 들을 말 못 들을 말. 찬란한 말, 쓰라린 말, 참담한 말, 간절한 말, 희미한 말, 비정한 말, 흔드는 말, 지독한 말, 다정한 말. 사는 동안 숱한 말의 숲을 통과한다. 도무지 그 말이 어려워 서성이기도 했고, 그 말에 채여서 주저앉기도 했고, 그 말이 따스해 눈물짓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이란 말의 기억이다. 그리고 어느 시인의 말대로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완전한 제거는 없다. 누렇게 곰팡이 쓴 말들과 소화되지 않은 말들을 껴안고 한 평생 살아간다. 가끔 텅 빈 몸에서 말의 편린들이 덜컹거리면, 외로운 몸뚱이 안에서 들려오는 그 인기척이 반갑기까지 하다. 어느새 정이 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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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3-28
    ‘소선小仙’ 작은 선녀라는 뜻이다. 지금도 이렇게 작은데 태어났을 때는 을매나 작았겠느냐며 옛날이야기 하듯 당신 생의 기원을 더듬는 할머니가 정겹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삶을 담은 영화 <어머니>를 보았다. 곱고 예쁜 이름만큼이나 영화가 소소하고 재밌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평생 살아왔는데 그런 칭호가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으니 “노동자의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뭐라고 부르겄냐”고 조단조단 말씀하시는데 웃음이 난다. 질그릇처럼 투박하게 때론 놋그릇처럼 쨍쨍하게 때론 유리그릇처럼 투명하게 울리는 어머니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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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3-20
    일 년에 0.5kg씩 꾸준히 자연증가세를 보이는 몸무게에 비례해 못 입는 옷의 중량도 늘었다. 옷이냐 살이냐. 둘 중 하나는 버려야 한다. 옷은 쉽고 살은 어렵다. 결단에 순간에는 아무래도 만만한 쪽을 택하게 된다. 체형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의류정리를 단행했다. 수년간 서랍에서 잠자던 옷가지를 추렸다. 빛바랜 옷들이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쌓였다. 그것들을 보노라니 잠시 추억이 회오리쳤다. 처음 사서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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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3-14
    ‘도시에서는 길을 헤매도 그다지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숲속에서 길을 잃듯이 도시에서 길을 잃으려면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 경우 거리이름이 마른 나뭇가지가 똑 부러지는 소리처럼 도시를 헤매는 이에게 말을 걸어주어야 하며, 도심의 작은 거리들은 산골짜기의 계곡처럼 분명하게 하루의 시간을 비추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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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3-07
    서른다섯. 일자리가 필요했다. 이력서를 썼다. 세 바닥을 채워도 시원찮을 판에 네댓 줄 쓰니 끝이다. 쉼표 없이 달려온 마라톤 인생인데 어쩜 이리도 이력서가 빈곤한가. 화폐화 되지 않는 노동-활동은 언어화도 불가능했다. 궁극적으로는 존재증명이 난감했다. 아무튼 자기소개서에 금칠과 덧칠을 해서는 두 군데 지원했다. 은행파트타이머랑 지역신문기자. 결과는 둘 다 낙방. 물 한 바가지씩 연거푸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민망하고 처량하여 고개돌렸다. 내 인생에서 슬그머니 찢어버리고픈 한 페이지. 곧이어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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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2-29
    여의도에서 잠실로 가기 위해 좌석버스 30번을 탔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는 신문을 폈다. 오후 2시의 햇살이 고흐의 노란 빛깔로 가닥가닥 쏟아져 들어왔다. 강물이 반짝이고 활자가 흔들렸다. 몸이 노곤노곤 해진 나는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미세한 기척에 부스스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문이 손에서 떨궈져 담요처럼 무릎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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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2-22
    글쓰기 수업 때 들은 얘기다. 그녀는 서른을 갓 넘긴 비혼여성이다. ‘달려라 하니’처럼 커트머리에 자전거여행으로 팔도를 누비는 씩씩한 캐릭터이다. 하루는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러 마트에 갔단다. 시식코너에서 맛있게도 냠냠 먹고 있는데 직원이 그러더란다. “고객님~ 남편 안주용이나 아이들 간식용으로 좋아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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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2-15
    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은 선택의 앙상블이다. 어떤 결정도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매번 고심하게 된다. 선택이 어려운 까닭은 내 안에 머무는 것들, 내가 몸 비비고 사는 것들이 많아서일 게다. 존재가 곧 필연이고 나눔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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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2-07
    데이트 생활자의 겨울. 근래 들어 근무태만이다. 혼자 노는 기술을 알아버렸다. 이를 테면, 파울 첼란의 시집을 사고는 카페에 갔다가 독일 깔맞춤으로 뮌헨 빵과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는 된장녀 짓을 일삼으니 지루하진 않다. 늘 그랬다. 사는 일은 가끔 외롭고 자주 괴롭고 문득 그립다. 바늘 하나로도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눈송이 하나라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삶 아닌가. 그러니 이 헛됨을 ‘누리면서 견딜만할’ 한 번의 기쁨, 한번의 감촉,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필요하다.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2-02-01
    나의 삼십대는 두 번 기록될 수 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풍파도 보람도 넘실넘실.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고통과 행복이 쌍둥이처럼 나란하던 시절, 비극버전을 쓴다면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 제목만으로도 목차와 내용을 메울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여인의 종말> <우우, 널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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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1-01-17
    지금 파리는 새벽 한 시 반이고 남자친구도 강아지들도 다 잠이 들었어요. 공부하던 책을 내려놓고 멍하니 앉았다가, 잠 안 오면 한잔씩 마시려고 사다둔 술을 병 채로 마시고 있어요. 그러니까 새벽이고 술을 마셨으니까 감정적이어도 이해해달라고 자기변명을 하는 중이에요. 아니 이렇게 해야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쓸데없는 어리광을 부려보는 중이에요....떠나...온...거 후회해요. 이제는 밤에 잠도 잘 이루지 못할 만큼. 왜 그때 떠나왔을까. 뭘 배우겠다고 떠나왔을까. 나 살던 공동체에서도 못 찾던 답이 여기에 있을 리 만무한데. 전 이제 비판 따위 할 자격도 없는 놈인 거 같아요.
  • moon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1-01-10
    배우 김영호씨를 만났다. 김영호. 한번쯤은 같은 반이었을 것 같은, 아니면 소설에서 주인공 친구로 나왔을 법한 순하디 순한 이름이다. 영화배우라 목둘레에 후광이 비친다. 훤칠한 키보다 먼저 들어오는 순박한 웃음과 허공을 응시하는 멍한 눈빛에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잘 생기셨네요?" 기어코 푼수처럼 한마디 던진다. 인터뷰 자료를 찾으면서 그가 ‘영혼’이란 말을 자주 쓰는 것과 '스님'이 되려했다는 얘길 보고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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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1-01-03
    “요즘 뭐 하고 지내셨어요?” “방황하면서 지냈어요.” 말해놓고 나니 푸푹 한숨 같은 웃음이 터졌다. 2010년 마지막 날, 수녀님과 이별을 고하기 위해 마주했다. 지난 일 년 수녀님들이 만드는 책의 표지이야기,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맡았었다. 내가 가장 애정을 갖고 한 일이었고 2011년도 길 여행 계획까지 세워두었던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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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2-28
    11월 하순 즈음, 피아노 선생님에게 아들 겨울방학에 어떤 곡을 칠까 의논을 드리니 어쩌면 레슨이 어렵겠다고 한다. 가슴에 뭐가 만져져서 병원을 갔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단다. 선생님은 대학생 아들을 두었는데 단아한 스타일 덕에 거의 내 또래로 보인다. 너무 놀랐지만 설마 암은 아니겠지 걱정일랑 묻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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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2-21
    오래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응당 그래야한다 여겼다. 골동품 같은 우정, 오래 가는 사랑. 한결 같은 마음. 세월은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한 선물이다. 맞다. 그런데 친구의 경우 한번 마음의 물길 트면 어떤 계기가 없는 한 일부러 단교할 일도 없다. 그런데도 세계 표준시간 경과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가는 since에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했다는 생각이 든다.
  • csz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2-13
    시집을 들고 다니면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나도 시를 읽고 싶은데 무슨 시집부터 어떻게 읽으면 되느냐고.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시가 좋으면 시를 읽어야지 어쩌라고. 공무원 시험과목도 아니고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겠는가. 근데 사람들은 어느 시인의 어떤 시집을 짚어주길 원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다보니 나는 요령이 생겨서 몇 가지를 일러주었다. 첫째 시집은 무조건 사라.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읽고 묵혀놨다가 다시 꺼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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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2-06
    애늙은이처럼 아기를 좋아했다. 내 나이 고작 7세 때 윗층에 사는 아기를 보러 새댁 아줌마 집을 계단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아기의 돌잔치가 열리는 날. 새댁 아줌마가 나를 부르러 왔다. 낯선 사람이 많아서 아기가 계속 운다고 사진을 찍어야하니까 와서 아기를 달래보라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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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1-29
    인천공항에 일정이 잡혀있었다. 전날 연평도에서 국지전이 벌어졌다. 대략 인천 부근이니 가까울 듯싶었다. 슬며시 걱정스러웠다. 애들이랑 뉴스속보를 보다가 엄마 내일 인천공항 가는데... 했더니 가지 말란다. 그날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니까 아들이 “엄마, 진짜 갈 거예요?” 한다...
  • kp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1-22
    가끔 궁금하다. 아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일까. 어릴 때야 먹여주고 재워주는 엄마가 침묵의 여신이지만 2차 성징에 접어든 사춘기 아들에게 엄마는 말 많은 무수리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아들에게 물어봤다. 평가가 용이하도록 수우미양가로. “아들아, 나는 점수로 따지면 몇 점짜리 엄마야?” “음..20점이요.” “뭐야? 야! 너무 한 거 아니니? 내가 오십 점도 안 돼는 엄마냐...” “왜요? 20점 만점에 20점인대요.” 어이가 없었다. 만점을 맞고도 성적표에 ‘가’라고 찍힌 느낌이다
  • poem 005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1-09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20년 전에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으로 봤었다. 돌베개에서 조영래 변호사님이 쓴 이 나왔을 때 사려다가 말았다. 안 봐도 비디오처럼 다 아는 이야기라고 여겼겠지. 책을 읽고 나자 전태일에 가려진 전태일이 보였다. 전태일은 생각보다 더 가난했고 생각보다 더 똑똑했고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화장실도 못 가고 못 먹은 채 시들어버리는 열다섯 소녀들. 차비 털어 붕어빵 사주는 태일이...
  • poem_001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1-02
    비오니까 여러모로 살겠다. 덥지 않아 살겠고, 책 읽기 좋아 살겠다. 철지난 유행가 싱크로율도 100%다. 올만에 김수철 이랑 전인권의 를 들었다. 김수철은 훌륭한 가수다. 가사와 곡조와 음성이 조화롭다. 밤 깊자 빗소리 커튼 삼아 골방모드 됐다. 비교적 행복하다. 긴 원고 한 편 쓰고나니 육신이 고되다. 삶의 진액이 빠져나간 것을 채우려 시집이 놓인 책꽂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거기가 내 우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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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0-26
    친구가 풀죽었다. 여친이 갑자기 자기를 피한다고. 작년에 둘이 해외로 여행도 다녀왔으나 두 사람 연애사를 지켜본 바로는 위태로웠다. 이런저런 이별의 징후들을 터놓는데 여친 마음은 이미 돌아선 것 같았다. 나는 충고랍시고 일단은 먼저 연락하지 말고 인연의 흐름을 지켜볼 것을 권했더니 얼마 전 명품백 선물해줬다며 서운하고 분한 표정이다. 난 명품백이 한 백만원 정도 하는 줄 알았더니 세배를 상회하더라. 정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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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10-12
    사는 일에 미련이 없다. 없었다. 그말을 예사롭게 해댔다. 진심이었다. 자식 두고 죽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쯤이면 나한테는 생의 마지노선까지 다녀온 거다. 한편으론 죽음이 목전에 닿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팔자 좋은 말잔치 같아 부끄러웠다. 지금도 크게 바뀐 건 아니다. 삶의 밀도에 연연하지 길이엔 관심없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명제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이론을 인정하고 긍정한다. 사는 동안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멈출 수 없겠지만 순한 양처 럼 주어진 시간에 복종하고 싶다.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질 길. 그저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 apple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9-28
    '난 사랑은 교통사고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피할 수 있다는 거?’ ‘응’ ‘음..그래. 어떤 점에서 그런지 더 설명해줘’ ‘주체는 자기 의지와 윤리적 선택에 따라 형성되는 거잖아. 먼저 결정돼 있는 게 아니고’ ‘그래도 싫은 사람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잖아.’ ‘좋은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나는 어떤 남자에 굉장히 빠졌었거든. 그 때 외로워서 그랬던 거 같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거야.’ ‘왜? 섹스하고 싶어서?’ ‘응. 근데 뻔히 보였어. 굉장히 강하고 복잡한 사람이었어...
  • old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9-14
    지하철에서 소요했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두어 시간을 보냈다. 취재였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잠실에서 무학재까지, 3년간 매일 세 시간 가량을 지하철에서 보냈다. 사춘기 시절 나의 자궁이었다. 지하철에서 수많은 책을 읽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친숙하고 중요한 삶의 장소인데 ‘이용자’가 아니라 ‘관찰자’의 배치에 놓이니까 그 공간이 한 없이 낯설었다. 개찰구 주변 저만치에 나처럼 서성이는 남자아이가 보였다. 열다섯살 정도 되었을까. 얼굴은 검고 키가 작았다. 몸집이 왜소했다. 생기없는 낮은 걸음걸이. 보라색 셔츠에 검은 넥타이로 멋을 냈는데 몇 개월 갈아입지 않은 옷 같았다...
  • og31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8-31
    사랑하는 일을 왜 사과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영화에서 그런 설정이 많이 나온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놓고 배우자 혹은 애인에게 눈물 흘리며 속죄의 발언을 한다. 난 그것이 못마땅하다.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사랑했다는 것인가?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사랑의 자유의지를 전제하는 것이다. 맹금류가 양을 잡아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와 같다. 동의할 수 없다. '그 잔인'은 아무 죄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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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8-17
    학교가 파하는 12시 40분이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에 새겨진 이름 꽃수레. 집 전화다. 며칠 전엔 현관문을 열었을 때 책상에 엄마가 없으면 너무 허전하다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제목으로 일기를 써서 나를 놀래킨 딸내미. 이번엔 또 어떻게 마음을 달래주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받는다. 짐짓 밝은 척 오버한다. “어, 우리 딸, 집에 왔구나!” “오늘로 6일째야. 엄마가 집에 없는 거....” 풀이 다 죽은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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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8-01
    나를 키운 8할은 오빠들이다. 열아홉 이후에는 늑대소굴에서 살았다. 그들을 남자로 보았을 리 만무하다.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여지도 없었다. 성적인 것에 무지했다. 순결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줄도 모른 채였다. 당시 내게 남자란 이성理性. 다른 성별이 아니라 합리적 존재였다. 같이 있으면 말도 통하고 배우는 것도 많고 즐거웠다. 좋은 사람의 좋은 기운에 끌렸고 그들도 나를 국민여동생처럼 예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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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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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7-07
    시골구석에서 사는 아이가 희귀난치병이다. 몇 번 들었어도 이름을 외기 힘든 척수성근위축증. 태어나자마자 사지에 힘이 빠진다. 심폐기능이 약해 호흡이 어렵다. 지역 내 큰 병원에서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억척스레 아이를 들쳐 업고 상경했다. “그래도 큰 병원 가봤다는 소리는 들어야지 원이 없잖아요.” 난 이런 얘길 들을 때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투박하고 새까만 문신한 눈썹과 실밥 뜯어진 비즈가 처량하게 매달린 네크라인을 멀뚱멀뚱 훑는다...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6-29
    꽃단장 컨셉에 맞추느라 신발장을 지키던 7센티 정통 하이힐 신고 외출했다가 아주 고생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벌겋게 달궈진 발을 따순 물로 씻고 로션을 발랐다. 왠지 뼈랑 힘줄이 툭 튀어나온 것 같아서 발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구겨진 발톱을 폈다. 불과 작년까지 멀쩡히 신어놓구선, 저 신발 당장 버릴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 꼴을 아들이 보더니 “그러게 왜 하이힐은 신었어요” 한다. 그 뉘앙스가 꼭 전원일기 김회장이 팔순 노모 나무라는 말투였다...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6-22
    뭇 남성동지들의 연인이 되어주며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선배다. 뜻밖에 서른중반에 같이 일하는 연하남 동지랑 결혼했다. 아이없이 지냈다. 마흔이 넘으니 슬슬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아기를 가지려니 생기지 않았다. 두 번의 유산. 언니가 '유산했다'고 전화한 날, 언니네 잠시 들렀는데 서랍장 위에 장난감 같은 아기신발이 놓여있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짠했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6-16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삼류 멜로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 순박해서 익살스러운 이것은 니체의 말이다. 니체가 평생 사랑했던 단 한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처음 보고 건넸다는 유명한 인사말이다. 38세의 니체는 21세의 루에게 변변한 데이트도 없이 청혼했다가 묵사발이 된다. 안타깝게도 루는 단 한번도 니체를 사랑하지 않았다. 루가 꽤 매력적이고 총명했나보다. 루는 훗날 릴케, 프로이트까지 당대의 지성들과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6-09
    선거 전후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냥 다 속상하고 안타깝고 갑갑했다. 적합한 관념을 취하지 못해 심하게 작용 받았다.;; 화병이 났는지 선거 날은 아침부터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침대에 자석처럼 붙어 있다가 오후 2시에 가까스로 투표장에 갔다. 줄이 길었다. 안에서 먼저 투표를 하고 나오던 40대 남자가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반갑게 아는 척이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6-02
    직감이라는 것.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경험치에 비례해 발달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고통 체험이 감각세포를 단련시킨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번뇌 그 후,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한테 가을날 단풍이나 밤하늘 둥근달이 이전처럼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또 자아 붕괴의 통증으로 몸부림쳐본 사람은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고유의 느낌을 짚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5-26
    작년 여름까지 매주 월요일 점심때면 아버지가 오셨다. 빈 반찬통이 들은 가방과 아이들 과자를 한보따리 들고 오신다. 그러면 나는 일주일치 밑반찬을 만들어서 빈통에 담아 드렸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뭐 별거 있을까. 멸치나 북어를 볶은 마른반찬 한 가지, 삼색나물 중 두어가지, 오뎅이나 두부조림, 불고기나 오징어볶음 같은 단백질류 등등이다. 일요일에 준비하거나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준비하는데, 그 시간이 한없이 우울하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5-19
    나는 시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누구도 행복할 땐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살만할 땐 시를 읽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생이 막막할 때 삶에 지칠 때 처방전을 찾기 위해 시집을 편다. 톨스토이의 통찰대로 행복한 사람들의 이유는 대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 오만가지 상처의 사례가 시집에 들어있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5-11
    "나는 광주가 참 좋아요." 두해전 5월이었다. 광주역 앞. 기차를 기다리던 나는 가슴팍으로 짱짱하게 파고 드는 남도의 햇살을 쬐이면서 중얼거렸다. "만약에 서울을 떠나면 광주에서 살고 싶어요." "왜요?" 옆에서 물었다. "따뜻하니까, 뜨거우니까, 맛있으니까" 내게 광주는 온통 뜨겁고 따스하고 맛깔스런 기억 뿐이다. 열아홉 어느 날, 명동성당 앞에서 삭발한 모습으로 거리선전전을 펼치던 조대생 언니를 보았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4-28
    "저는 혼자 살아요" "결혼.... 안 하셨나봐요?" "해봤어요" 영화 <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대화다. 신선했다. 여자주인공의 이혼을 심각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렸다. 심지어 ‘해봤어요’ 할 때 은수가 능력자로 보였다.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본, 그래서 삶의 다양한 세계와 접속한 강자 말이다. 10년 전, 이 영화가 나올 때만 해도 이혼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부정적이었는데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4-21
    소싯적부터 눈물이 많았는데 아줌마 되니까 더 궁상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혹은 음악을 듣다가 찡해서 눈물짓는 일 다반사다. 사진을 보고 울어본 적도 있다. 딱 두 번이다. 뭐 울었다기보다 핑하니 뜨거운 것이 고였다가 흘렀다고 해야 맞겠다. 둘 다 좋아하는 선배가 찍은 사진이다. 한 번은 한대수선생님 흑백사진. 홍대 연습실에서 취재를 마치고 뒷풀이 가는 길, 뒤따라가다가 우연히 찍은 컷이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4-14
    봄을 겨울로 살았다. 2월에 스위스에 다녀오고 달력을 두 장이나 넘겼다. 그런데도 내도록 얼얼했다. 알프스의 눈이 녹지 않았고 그 위로 서울의 봄눈이 쌓였다. 책상에는 컨베이어벨트처럼 할 일이 끊임없이 돌아왔다. 순간이다. 글 쓰는 일이 글을 해치워야 하는 노동이 될 때가 있다. 제일로 마음 슬프다. 자본가세상 살찌우는 글은 안 쓰고 싶은데 그러면 자본가세상에서 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4-07
    여성암 무료검진을 받으라는 통지서가 서울시에서 왔다. 작년 가을 즈음에. 기한이 12월 31일까지였다. 병원 가는 일이 좋을 리 없다. 특히 산부인과. 애 낳고 병원을 한 번도 안 가봤다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김점선 화가를 생각했다. 또 무료 건강검진을 받지 않다가 암에 걸리면 보험 혜택이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8년 전 애 낳고 진료실 출입이 1회도 없었던 나는, 아직 에미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새끼를 둔 나는,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3-31
    다친줄도 모르다가 피를 보면 이내 울어버리는 아이처럼, 난 3월 하순부터 달력을 힐끔거리면서 나를 연민했다. 3월 24일은 딸이 태어난 날이고, 28일은 아들이 태어난 날이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날씨도 마음도 뼛속도 스산해진다. 배위로 트럭 3대가 지나가는 것 같던 아득한 통증의 부활. 한 명이 3대씩, 총 6대가 올해도 몸 위를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거기에다 새학기 스트레스가 더해졌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3-24
    삼사십대 남녀 다섯이 인사동에서 모였다. 전시를 끝낸 지인의 뒤풀이 자리다. 조곤조곤 수다 떨며 와인 한잔 마시는데 마흔 지난 남자가 물었다. “내 나이에 사랑을 하는 게 좋은 거야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여자들이 개구리합창처럼 답했다. “당근 하는 게 좋지.” 능력 있음 해보라는 식이었다. 남자는 이내 도리질이다. 희생이 너무 커서 싫단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3-17
    맥도날드 2층. 평일 1시. 방과 후 친구엄마들을 따라 온 아이를 데리러 왔다. 200여석이 엄마들로 꽉 찼다.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식은 커피와 감자튀김 앞에 두고 열띤 대화가 오간다. 우리반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개학후 일주일 지났건만, 2학년 1반부터 6반까지 각반 담임의 행적과 신상명세와 성향 그리고 교문 밖의 뜨고 지는 학원 현황까지 시시콜콜 공유되고 있었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3-10
    가난한 사람은 많지만 밥 굶는 사람은 없다고들 한다. 그래도 그들을 생각하면 심히 걱정스러웠다. 시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 시집은 정말 안 팔리는 책이다. 책값도 헐하다. 활동가들도 박봉으로 어떻게 3~4인 가족이 먹고 살까. 몇 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이 갔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알아보았다. 대체로 그들은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았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3-03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는 시구처럼, 창밖엔 겨울비가 내리는데 나는 겨울잠을 잤다. 까맣고 촉촉한 겨울밤 공기에 휩싸여 화양연화ost 라도 들었어야하는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겨울비도 아닌데 아깝다. 으슬으슬 춥고 몸이 땅으로 꺼져 최대한 웅크리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간 애들 방학하고부터는 매일 아침 10시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눈뜨니 8시. 어제 빨리 자 일찍 일어난 줄 알았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2-24
    나의 화장대 세간은 단출하다.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 비비크림 정도. 가끔 아이크림이나 향수도 끼어있다. 입국자들에게 선물 받은 건데, 끝까지 써본 적이 없다. 성의가 고마워 간직하다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고서야, 그것들은 쓰레기통에서 서글픈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아이크림은 사용률 50%를 상회한다. 향수는 거의 0%다. 그런 내게, 재작년에 업무관계자가 향수를 선물했다.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2-10
    우리가 조직을 이탈해 첫 만남을 가진 날, 대화의 주제가 '첫사랑'이었다. 신천역 새마을시장 포장마차. 그는 첫사랑의 여자와 7년 연애 끝에 헤어졌으며 독신으로 살거라고 말했다. 사랑하던 여자가 부모의 의견에 따라 다른 데로 시집을 가버렸으니 혼자 살면서 지순한 사랑을 지키고 싶은 눈치였다. 좀 귀엽기도 하고 참신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편하고 커피보다 술이 더 좋았던 나는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2-03
    "내가 어떻게 너를 낳았을까. 태어나줘서 고마워~" 딸아이만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고장난 벽시계에서 뻐꾸기 튀어나오듯이 수시로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딸아이는 즉각적으로 화답한다. "괜찮아. 어차피 엄마가 낳았으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114 안내원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매번 같은 대사가 나온다. 고 작은 입에서. 그걸 지켜보는 아들은 '둘이 잘한다'며 ...
  • 은유 in 올드걸의 시집 2010-01-20
    15층 부엌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단지 풍경이 아름답다. 오층짜리 아파트 자주색 지붕이며 놀이터며 주차장 자동차며 동산의 소나무, 그리고 건너편 용왕산까지 하얀 눈 수북하다. 근하신년 연하장에서나 보았던 비현실적인 그림이다. 지붕에 눈을 태운 163번 버스도 토마스기차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우리 아파트 옥상에도 눈이 덮여있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