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10호] 달의 몰락 / 유하

- 은유

달의 몰락 / 유하
나의 쓸모 없음을 사랑한다

달의 몰락 / 유하

나는 명절이 싫다 한가위라는 이름 아래
집안 어른들이 모이고, 자연스레
김시 집안의 종손인 나에게 눈길이 모여지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 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아니 그 전락을 홀로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충분히 외롭다
하지만 난 편입의 안락과 즐거움 대신
일탈의 고독을 택했다 난 집 밖으로 나간다
난 집이라는 굴레가, 모든 예절의 진지함이,
그들이 원하는 사람 노릇이, 버겁다
난 그런 나의 쓸모없음을 사랑한다
그 쓸모 없음에 대한 사랑이 나를 시 쓰게 한다
그로므로 난,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호의보다는
날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냉랭한 매혹에게 운명을 걸었다
나를 악착같이 포용해내려는 집 밖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온 우주의 문밖에서 난 유일하게 달과 마주한다
유목민인 달의 얼굴에 난 내 운명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만
달은 그저 냉랭한 매혹만을 보여줄 뿐이다
난 일탈의 고독으로, 달의 표정을 읽어내려 애쓴다
그렇게 내 인생의 대부분은 달을 노래하는 데 바쳐질 것이다

달이 몰락한다 난 이미, 달이 몰락한 그곳에서
둥근 달을 바라본 자이다
달이 몰락한다, 그 속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내 노래도 달과 더불어 몰락해갈 것이다

– 유하 시집, <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다친줄도 모르다가 피를 보면 이내 울어버리는 아이처럼, 난 3월 하순부터 달력을 힐끔거리면서 나를 연민했다. 3월 24일은 딸이 태어난 날이고, 28일은 아들이 태어난 날이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날씨도 마음도 뼛속도 스산해진다. 배위로 트럭 3대가 지나가는 것 같던 아득한 통증의 부활. 한 명이 3대씩, 총 6대가 올해도 몸 위를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거기에다 새학기 스트레스가 더해졌다. 초등학생이 된 딸내미의 존재가 난감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유치원에서 책임지고 돌봐주던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날마다 주간학습계획표 보고 준비물 챙기는 것은 기본. 12시면 집에 와서 뒹구니 하루 아침에 백수가된 아이의 여가 대책마련에 쩔쩔매야 했다. 학기초라서 두 아이의 가정통신문이 세금고지서처럼 날아드는 통에 ‘학부모’란에 사인 하느라 정신 없었다. 또 월 셋째주에 집중적으로 몰리는 일감에 생리주기까지 임박해서 내 몸은 꽤나 부침이 심했다. 그러는 사이 시어머니가 김치와 반찬을 보내셨는데, 난 전화도 한 통 안 드렸다는 걸 알았다. 무려 한 달 동안.

어제가 성묘였다. 비정상 며느리와 눈도 안 마주치시는 시어머니. 한달 간 전화를 안 한 것만으로도 한 달짜리 형량인데, 하필 그 전날이 어머니 생신이었다는 걸, 두둑한 돈봉투와 케이크를 사들고 온 동서를 보고서야 알았다. 결혼하고 시어머니 생신을 놓친 건 처음이다. 이렇게까지 어머니를 서운하게 해드릴 의도가 있었던 건 결코 아니었는데. 운도 없지… 죽은자 앞에서 산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풍경도 그로테스크하거니와 바람이 불어와 초를 다 꺼뜨려버리는 불상사까지 발생했다. 어머니 안색 살피느라 힐끔거리다 한숨짓는다. 아들이 당신 생일 모르는 건 ‘바깥일’ 하느라 바빠서. 원래 아들은 무심하니까 이해하고 며느리가 그러면 영락없이 삐지시는 어머님. 가족구성원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면제받고도 구박 받고 살지 않은 남편은 먼산만 바라보고 있다. 하하호호 식구들의 웃음과 대화 속에서 난 충분히 외롭다. 나도 가정의 안락과 평화와 더불어 일탈의 고독을 누리면서 맘 편히 살고 싶다. 확실하게 몰락하지도 못하고 날마다 기우는 한 여성의 삶을, 동정한다.

– 은유

응답 2개

  1. 매이엄마말하길

    공감 100%의 글입니다. 왜 언제나 남자들의 비장한 듯한 넋두리는 예술적 제스처로 이해되고, 여자들의 진솔한 고백은 신변잡담으로 치부되는 걸까요? 시부모님 문제는…각자 부모 각자가 챙기라고 하시든가, ‘바깥일’ 하느라 바쁘고 원래 무심한 아들내미를 자식이랍시고 둔 팔자를 한탄하라 하시고, 은유님은 계속 비정상 노선을 타심이….

    • 비포선셋말하길

      살다보면 비정상 노선이 저절로 되더라고요. 어머님의 지고지순한 아들사랑 기준에 다 맞춰드릴 수가 없으니까요…울 남편은 장인장모 생일 솔선해서 먼저 챙긴 적 없거니와 어떤 상황에서도 배우자 부모에게 눈총 안 받고 사는게 부러울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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