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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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거리사랑촌’ 앞에서 설명을 들었다.
    친구들과 원주에 다녀왔다. 한 친구가 새로 알게 된 분이 원주에 사셔서 그 분 일하는 이야기도 듣고 연말 송년회 겸해서 회포도 풀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즐겁다. 술은 적지만 음식은 많고 이야기는 꽃핀다. 저번 주에 막을 내린 대선게임이 끝났기 때문에 앞날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서로의 이성친구 이야기로 끝이 났다.
  • 촛불을 켜고 방 형광등을 껐다. 주황색과 검은색이 묘하게 섞인 방 한 구석에 우린 앉아 있다. 우린 꼭 안았고 키스를 했다. 아, 이 맛이구나... 우리의 첫 섹스... 바지 앞섶이 벌써 반응을 보인다. 텐트를 친다고 하나? 텐트가 하늘을 향해 쳐진다. 느껴진다. 중력을 거스르는 우주의 힘, 정력, 에너지. 이대로라면 무엇이든 뚫지 못하랴.
  • 비가 내리는 바람에 지하가 꿉꿉하다. 아직 카드를 찍기 전, 좀 늦더라도 버스를 탈까 망설인다. 그 때 계단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일부러 대열을 맞춘 것은 아닌데 통일된 복장 때문인지 움직임에 무게가 실린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는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 뒤따라 들어간다. 지하는 더 이상 꿉꿉하지 않다. 물론
  • “다락 다락 다락” 키보드를 두들기면서도 조심스럽다. 피곤에 지쳐 웅크리고 자고 있는 짝꿍이 깰까봐. 침대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를 차마 켜지 못하고 침대 반대편으로 와 최대한 불빛을 숨기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짝꿍의 쌔근쌔근 코고는 소리를 들으니 또 괜시리 엄마 모드로 변한다. 오늘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만해도 토닥토닥 엉덩이를 두들겨주고 싶다. 고생했다며.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활
  • 뻔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아서 나 너랑 잘 생각 없는데, 하고 말한다. 이리 저리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 달 전쯤 극장에서 봤던 영화가 나온다. 참 빠르네. 그는 옷을 벗기는 손을 멈추지도 않은 채 나랑 못 잘 이유도 없잖아, 라고 대답한다. 하기야 이미 그를 따라 이곳까지 들어왔으니 얘기는 다 끝난 셈이다. 나는 더 말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서 한 말도 아니었고 그만두자고 한
  • 난 내 또래 사람들이 좋다. 성실하게 공부하고 어른들에게 공손한 친구, 머리를 여우꼬리처럼 묶어 내린 여자아이, 전학 와서 해맑은 웃음을 짓고 공부까지 잘 하는 남자아이, 스케치를 잘 하고 춤을 잘 췄던 친구, 차분하고 미소가 예쁘고 커피를 좋아했던 누나까지, 내가 좋아했던 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만큼 난 사람 볼 줄 알았다. 이들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으니까. 난 깊은 관계보다는 그들과 똑같이 성
  •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물건을 한 아름 들고 오셔서 구경 좀 해보라고 난리시다. “이 신발은 거의 새 거다. 첫째, 네가 한 번 신어보렴.” “당신은 이거 빨아서 등산갈 때 메고 다녀.” “작은 애야, 이 복합기 작동되나 플러그 꽂아봐라.” 우리 가족은 보따리장수가 된 아빠를 보면서 신기해한다. 20년 넘게 장사를 하신 탓에 집에 와서도 장사꾼처럼 물건 자랑이 입에서 술술 나오신다. 가끔 명품 가방이나 신발을 들고 오시면 백화점에서 선물
  •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나는 또 ‘거절’당했다. 무엇을? 그 동안 나와 당신이 ‘연애’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공유했던 행위 일체를 이제 그만두고 싶단다. 대체 그 이유가 뭔지, 무엇 때문에 내가 싫어진 건지 한 마디라도 해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리고 싶지만, 무응답 혹은 반대로 너무 솔직한 답을 들을까봐 지레 겁먹은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메인 목 뒤로 넘길 수밖에. 그래, 차갑게도 뜨겁게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 여태 살면서 혼자인 여자에게 관대한 남자치고 멀쩡한 사내를 본 일이 없다. 혼자 오셨어요, 라니. 너무 구식이어서 차라리 순진하게 들린다. 대체 혼자인 여자의 그 무엇이 남자들을 용감하게 만드는 것일까. 용감한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는 여자의 대꾸 없음을 수줍음이나 앙탈, 뭐 그런 식의 호감의 신호
  • ▲ 파도에 곧 휩쓸려 갈 손바닥 자국, 지금의 널 영원히 사랑하지는 않아. 나와 함께 매 순간 변화해가는 여러가지의 너를 사랑해.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동공에 아침의 빛을 한껏 받으면서 깨어난다. 아침에 하는 일은 똑같다. 밥 짓고, 밥 먹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선풍기 바람을 쏘이면서 마당에 봉선화가 꽃 피우는 거 감상하기, 화분에 물을 주면서 비타민D를 온 몸으로 흡입하며 나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세월이라는 스승 덕분이다. 내 나이 서른. 영화 ‘싱글즈’의 주인공처럼 일에 성공
  • 투박한 디자인의 통장. 필체 좋은 직원분이 통장 커버에 직접 이름을 적어준다.
    어느 서점에서 노동자를 주제로 한 잡지를 보고 있었다. 상담코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한 달 월급이 100만원이 채 안 됩니다. 그렇지만 재테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재무설계사는 이렇게 말했다. “월 소득이 100만원 이하인 분들은 재테크라고 부르기도 힘들지만… 자산 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 뒤에는 보험과 적금 등에 ‘계란을 나눠 담고’ 가계부를
  • 하나의 유령이 -오(O)자형 다리인 오다리 유령이- 서울을 배회하고 있다. 나는 어깨가 좁고 머리가 커서 초등학교 때부터 ‘가분수’라 불렸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어좁이’라는 단어가 유행해서 어좁이가 되었다. 나는 또 어렸을 때 엄마 등에 자주 업혀 있어서 오다리가 되었다. 오다리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도 떨어졌다. 하여간 나는 헐렁한 옷만 입는다. 몸에 맞는 옷을 입으면 딱 봐도
  • manhang1
    2008년 여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세 친구가 남해 다랭이마을과 부산을 여행하면서 삶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만나면 행복한 사람들’, ‘만들면서 행복한 잡지’라는 의미로 ‘만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다 보니 재미있어서 적어도 30년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만일동안 행하는 모임’이라는 의미도 추가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의 친구가 모이고, 그 친구의 친구가 모여,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