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나는 유령이다.

- 오다리 유령

하나의 유령이 -오(O)자형 다리인 오다리 유령이- 서울을 배회하고 있다.

나는 어깨가 좁고 머리가 커서 초등학교 때부터 ‘가분수’라 불렸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어좁이’라는 단어가 유행해서 어좁이가 되었다. 나는 또 어렸을 때 엄마 등에 자주 업혀 있어서 오다리가 되었다. 오다리 때문에 육군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도 떨어졌다. 하여간 나는 헐렁한 옷만 입는다. 몸에 맞는 옷을 입으면 딱 봐도 이상하다.

12년의 공교육을 마치고,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다행히도 나를 ‘어엿비’ 봐 주었던 회사가 있어 졸업 후 바로 취직이 되었다. 1년 간 기획, 온라인 마케팅, 영업, 무역실무, 쇼핑몰 관리, 홈페이지 관리, 해외출장, 회원 관리, 문서 작성, 회계, 물품 배송, 창고 정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직원은 혼자였다. 나는 아직도 쓴웃음을 짓고 있다.

나는 모아놓은 돈으로 컵닭과 초코우유를 사먹고, 여자친구 집에 빌붙어 밥 먹고 자고, 도서관 가서 책을 본다. 가끔 몰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몰아서 삶을 즐긴다. 또 농업‘협동조합’에 채무가 있다. ‘정부보증’ 학자금대출을 받아 매달 10만 원 가량의 이자를 공돈으로 버린다. 이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아닌 나에게도 돈을 쓰라고 했으며 처음부터 내 상환능력을 평가하지도 않고 정부가 보증했다는 이유로 내게 돈을 빌려주었다. 정부는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나 보다.

나 여기 있어…

그럼 내 하루를 살펴보자.
가만, 그런데 하루가 언제 시작되더라?…
아침부터 시작되어 밤에 끝나는 하루는 바쁜 현대인의 하루인데, 나는 바쁘지도 않고 현대인의 기준에도 맞지 않으니까 내 하루는 저녁에 시작하는 것으로 해 본다.

여자친구 손을 잡고 여자친구네가 있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10시, 11시가 되면 슬슬 여친 집으로 들어간다. 단독주택인데 대문 위를 슬쩍 보면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불이 켜져 있으면 여친 여동생이 있는 거다. 여친이 대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면 나는 대문을 조용히 닫는다. 현관문에 들어서면 내 구두를 신발장에 넣는다. 여친 동생은 보통 자기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거나 문을 닫고 큰 방에 있다. 다만 인기프로그램인 ‘OOO’을 하는 날이면 거실에 앉아 있는데 이 때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1초간 고민하지만, 인사를 하지 않는다. 난 쏙 여친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그런데 이상한 건 여친 동생은 가만히 있네 이거? 여친 동생 눈을 쳐다본 적이 없어서 시선이 어디로 왔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곁눈질로 알 수 있는 건 여친 동생은 제자리에 꿈쩍 않고 있었다는 거다.

예전에 여친이 여행 갔을 때 내가 지낼 곳이 없어서 여친 집에 있을 때, 여친 동생이 과자를 접시에 담아 내게 준 적이 있다.

“이거 좀 드세요.”
“아, 고마워.”

이때가 우리 대화의 마지막이었다. 여친 동생은 여친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조용하고 뭔가를 집중하며 열심히 한다. 그러다 가끔, 아주 가끔, 속이 좋지 않은지 방귀를 시원하게 한다. 서글프다. ‘OO야, 나 여기 있어…’ 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여친 방과 동생 방은 원래 한 방이었는데 가운데를 막아 나눈 거라서 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데… 난 모른 척, 내가 없는 척 핸드폰 벨소리 볼륨을 최대한 낮춰 놓고 조용히 책을 본다.

그렇게 책을 보고 있으면 여친 어머님께서 12시 즈음 들어오신다. 낮에는 가게에서 일하시고 저녁부터 밤 시간까지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어머님은 참 부지런하시다. 늦게까지 자는 나와 여친은 할 말이 없다. 어머님께 그냥 토 달지 말고 잘 해드려야 한다. 어머님께서 현관에 들어오시면 난 여친 방에서 쪼르르 나와 인사를 드린다. “응, 밥 먹었어?”라고 인사를 건네시는 어머님. 그러다 가끔, 아주 가끔, 어머님께서 씻으시기 전에 여친과 나랑 대화할 때가 있다.

“딸, 넌 그만 놀고 취직 좀 해 좀.”
“알았어 엄마. 지금 알아보고 있어.”
“그리고, OO아, 요즘에 남자도 직장 마흔 넘으면 짤린대. 공무원 시험이나 봐라. 알겠지?”

“예.” 라고 말하기 전에, 난 여친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웃기만 한다. “알겠니?” 소리가 두 세 번 더 나와야 그새야 “예.”라고 마지못해 대답하게 된다. 대답하지 않으면 내 딸을 주지 않겠다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OO이는 머리도 좋으면서 왜 시험을 안 보려고 하나 몰라.” 이 말씀은 내 부모님한테도 항상 듣는다. 자기 자식은 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다던데, 그럼 여친 어머님은 나를 당신 자식으로 여기시는 건가? 그렇다면 난 여친과 맺어질 수 없는 건가…

뭔가 찝찝한 여친 어머님과의 대화가 끝나면 잠을 청한다. 하지만 뭔가 불안하다. 어쨌든 나는 지금 여친 어머님께 여친 집에서의 숙식에 대한 어떤 허락도 받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여친 어머님은 그런 점에 대해 나에게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있다.

11시쯤 일어나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린다 싶으면 옆에서 여친이 자고 있다. 큰 방에서 여친, 여친 어머님, 여친 동생이 함께 자다가 여친 어머님과 동생이 나가면 쪼르르 들어오는 거다. 그래서 밤엔 마음 놓고 키스도 못한다. 쪽쪽 소리 내다가는 금방 들키니깐.

자다 보면 부엌이 분주하다. 여친은 벌써 깨어나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다. 백수 주제에 점심 대접이라니. 나는 사양하지 않고 찌개, 김치, 갓 지은 밥, 계란 반찬, 마른 반찬, 김 등으로 나름 성대한 점심식사를 한다. 이럴 때 정말 행복하다. 그래서 난 설거지를 자청해서 한다. 싱크대도 행주로 물기 없이 깨끗하게 닦아 놓는다. 행복하니까.

그러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 뇌리에 번뜩 스쳐 지나간다. 앗, 여친 아버님… 불안해진다. 아버님이 오시면 어쩌지? 여친 아버님은 집에 거의 오지 않으시고 가게에서 지내신다. 여친 어머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고, 그냥 딸 둘이 불편해 할까봐 그러신다고 한다. 가끔 목욕하실 때만 집에 들르신다. 여친 어머님은 아버님이 집으로 향한다 싶으면 즉시 딸에게 문자를 보내 나를 집에서 내보내게 하신다. 만일 여친 핸드폰이 꺼져 있거나, 갑자기 아버님이 들이닥친다 싶으면 나는 숨는다. 큰 방에 장롱이 있다. 거긴 큰 방이라 위험하다. 여친 방에 책상과 의자가 있다. 책상 밑에 숨을까? 한 번은 여친 아버님이 갑자기 오셨을 때 방 불을 끄고 책상 밑에 숨어보려 했지만 내 몸까지 들어갈 정도로 공간이 나오지 않아서 그냥 문 닫아놓고 숨죽여 있어야 했다.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방 불 끄고 문 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거다. 그러다 아버님이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시면 재빨리 양말바람으로 집을 나간다. 휴우… 이번에도 선방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아버님께서 갑자기 오실까봐 가까운 도서관으로 간다. 이제는 마음 놓고 책을 본다. 피곤한 마음에 퍼져서 졸기도 한다. 책만 보면 재미없으니까 넷북도 꺼내서 책 정리도 하고 글도 쓴다. 진짜 가끔 취업정보를 들여다보지만 왜 이리 시시할까? 멋지고 재미있는 일이 도무지 없다. 이제는 일을 내게 맞추면 안 되고, 내가 일에 맞춰야 할 때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보면 책이고 뭐고 눈에 안 들어온다. 어깨는 펴지만 눈은 흐리멍텅하게 다시 여자친구네 동네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간다. 그리고는 엄마한테 전화를 한다.

“잘 지내세요? 건강하시죠?”
“아이고, 서울에서 어떻게 사냐. 밥은 잘 먹고 다녀?”
“네, 잘 지내요. 건강하세요. 또 전화할게요.”

사실 집에서는 나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가끔 집에 내려가는 주말이면 나를 보시고 한숨을 쉬며 아쉬운 말투로 말씀하신다.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 나오고 왜 이렇게 되었냐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 앞에 있는 학교 보낼 걸…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공채 많이 나올 때 무작정 써보라며… 대학 안 보냈어야 했다는 말씀은 안 하시지만. 어쨌든 사실, 나도 혹하긴 한다. 한 번 지원해 볼까?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청개구리처럼 하라는 거 안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만(대부분 돈이 안 되는) 했는데, 쉽게 써지지 않는다.

유령의 꿈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얼 하든지 직장은 곧 잡아야 하고, 집도 얼른 구해야 하며, 하고 있는 공부들을 더 구체화시켜야 한다. 학자금도 이자 더 붙기 전에 빨리 갚아야 하고, 가족, 친구, 지인에게도 잘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좋은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 남은 건 의무 뿐이다. 하지만 태어난 지 30년 된 지금의 나는 학교에도, 직장에도, 가정에도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한 친구는 나를 ‘유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다리라서 ‘오다리 유령’. 좋은 인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점점 다리가 더 휘어져 가는 유령…

글쎄… 나라는 유령은 이 험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딱히 욕망하는 것이 많지 않다. 있다면 안정된 가정과 공기 좋은 살 집 같은 그런 것. 그래서 딱히 유령의 살 권리를 주장할 마음도 없다. 평생 유령으로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도 어서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여친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단 말이다. 더 이상 여친 가족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다.

나 여기 있다고…

그럼에도 나 오다리 유령은 이런 내 만행을 고백한다. 우리가 스스로 유령이고 싶어서 유령이 된 건 아니지 않은가? 유령은 당당해야 한다. 여친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자. 누구도 인사하지 않고 누구도 봐주지 않아도 밥을 먹고 화장실을 쓰고 방귀를 뀌자. 유령도 고기 먹고 방귀 껴서 냄새가 독하다는 걸 알리자. 나 여기 있다고… 이런 만행이 널리 퍼져 나가서 우리 유령끼리 한 번 서로 알아가면 좋겠다. 유령 개별적으로 투쟁하려면 쉽지 않으니까. 유령이 유령 맘을 알아주지, 인간이 유령 맘을 알아주겠나? 응? 그러니까, 만국의 유령이여, 단결하라!

응답 1개

  1. tibayo85말하길

    참, 재밌어 하면 안 되는데,참, 막막하면서 재밌네요. 이 코너,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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