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서른, 연애하기 좋을 때

- 가은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동공에 아침의 빛을 한껏 받으면서 깨어난다. 아침에 하는 일은 똑같다. 밥 짓고, 밥 먹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선풍기 바람을 쏘이면서 마당에 봉선화가 꽃 피우는 거 감상하기, 화분에 물을 주면서 비타민D를 온 몸으로 흡입하며 나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세월이라는 스승 덕분이다. 내 나이 서른. 영화 ‘싱글즈’의 주인공처럼 일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결혼식도 못했다. 제대로 돈 버는 일은 하지도 않고, 결혼해서 살 집도 없기에 어찌 보면 영화 속 주인공과 나를 비교한 게 우스울 수 있겠다. 그러나 오해 말라. 난 꿈과 사랑이 뭔지 알아가는 속이 알찬 서른이다.

나는 한 남자에 의해 직업도 집도 없는 서른이 되었다. 정확히 말해 한 남자와의 삶을 선택한 이후 내 삶이 바뀌었다. 스물다섯 살 때, 남자친구한테 차이고 나서 주말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쓸쓸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대학의 마지막 한 학기 동안 동아리 활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뭐랄까. 진짜 토요일에 할 일이 없었다. 8월 마지막 주 토요일, 동아리 첫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머리를 안 감았는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삼선 슬리퍼를 찍찍 끌고 당당하게 다가오는 쟤는 정체가 뭘까. 꼴에 여자 친구도 있다고 한다. 완전 비.호.감…

잊고 있던 그와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솔로가 되어 길거리에서 일인 시위하는 한층 야윈 모습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거 뻔히 아는데 자뻑까지 심해졌다. 뭐 자기랑 사귈 여자는 복이 터졌다느니… 그의 자존감은 하늘을 뚫었다. 뭘 믿고 저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의 조건을 따지기도 전에 심장을 오가는 불규칙적인 혈류와 잠복하고 있던 에로의 기질이 우리를 특별한 관계로 만들었다. 오, 마이 갓! 신은 내게 생각하는 뇌 대신 이끌리는 데로 가라는 본능을 주셨다. 정말이지 세상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오늘은 그가 퇴근을 일찍 하는 날. 이럴 때면 그와 낮 2시부터 데이트를 할 수 있다. 난 일을 적게 하는지라 다양한 시간대별 데이트 신청에 기꺼이 하트를 날린다. 우린 월급이 적은 대신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린다. 가끔 평일 낮에 데이트도 할 수 있고, 황홀한 비언어의 밤을 즐기다 늦잠을 자면 눈치껏 천천히 출근하기도 하고, 책상에서 원하는 공부도 맘껏 할 수 있다. 대개 하는 일이 원하는 공부와 관련이 있다 보니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한다. 대출도 싼 이자에 받을 수 있다. 이름하야 저.소.득.층! 처음에는 우리의 계층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스스로 ‘저.소.득.층’을 자처했다. 남들 다 일할 때 푼 돈 써가면서 1년 넘게 놀고, 먹고, 여행하고, 사랑하지 않았던가. 그와 나는 노동 시장과 결혼 시장에 팔려가는 대신 그 날들을 평생에 다시없을 젊은 시절의 선물로 받았다. 이제 저금리로 대출까지 받는다. 나쁘지 않다. 5년 전,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월급 꼬박꼬박 받으면서 온갖 상사 욕은 다 해가며 꾸역꾸역 아침에 출근을 했겠지. 일주일에 한번 소개팅을 하다가 대충 결혼을 했겠지. 더 나을 게 없어 보이는 답지다.

언젠가부터 화장품과 구두와 핸드백을 버리고 운동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다닌다. 전 남친들 만날 때는 마스카라에 정성스레 매번 드라이를 하고 삐딱구두신고 데이트하느라 수고스러웠다. 이젠 그를 만나서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도서관을 가고,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화장하는 법을 까먹었다. 서로를 알기에도 부족한데 마스카라 하는데 시간을 낭비하랴. 누군가의 관상용 연애 상대가 되기엔 조금 무리인 서른이기에 애초에 노선을 달리 한 거다. 노선의 변경으로 관리 하지 못한 주름살에게는 미안하지만, 달다 못해 쓴 사랑의 열정으로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서른에게 연봉이나 결혼 여부를 묻지 더 이상 꿈 따위엔 관심이 없다. 세상이 관심 가져주지 않아서 더 애틋하게 서로가 원하는 걸 챙긴다. 실상을 알고 보면 거창하지 않다. “내일도 귓밥 파줘.”, “우리는 비 안 새는 집에서 살자.”, “치킨돈부리 먹으러 가자.”, “텃밭에 더 열심히 가자.”, “해금으로 타령을 칠거야.”, “과학자가 될 거야.” 아쉽게도 서른인 우리의 꿈에는 적당한 직업도, 형식적인 결혼도 없다. 그 대신 ‘파고’, ‘살고’, ‘먹고’, ‘가고’, ‘치고’, ‘되는’ 다소 유치한 사랑의 행위만 있을 뿐. 하고 싶은 게 유난히 많은 그와 나는 오늘도 하루 종일 하고 싶은 거 하느라 바쁘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마흔 살의 우리가 뭘 하고 있을지 더 기대가 될 뿐이다. 미래는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오늘 밤이 고민 될 뿐. 그는 은근 에로스가 부족하다. 오늘 밤엔 확실하게 알려 줘야지… 야옹~

  ▲ 파도에 곧 휩쓸려 갈 손바닥 자국, 지금의 널 영원히 사랑하지는 않아.  나와 함께 매 순간 변화해가는 여러가지의 너를 사랑해.

▲ 파도에 곧 휩쓸려 갈 손바닥 자국, 지금의 널 영원히 사랑하지는 않아. 나와 함께 매 순간 변화해가는 여러가지의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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