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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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가 내리는 바람에 지하가 꿉꿉하다. 아직 카드를 찍기 전, 좀 늦더라도 버스를 탈까 망설인다. 그 때 계단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일부러 대열을 맞춘 것은 아닌데 통일된 복장 때문인지 움직임에 무게가 실린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는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 뒤따라 들어간다. 지하는 더 이상 꿉꿉하지 않다. 물론
  • 뻔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아서 나 너랑 잘 생각 없는데, 하고 말한다. 이리 저리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 달 전쯤 극장에서 봤던 영화가 나온다. 참 빠르네. 그는 옷을 벗기는 손을 멈추지도 않은 채 나랑 못 잘 이유도 없잖아, 라고 대답한다. 하기야 이미 그를 따라 이곳까지 들어왔으니 얘기는 다 끝난 셈이다. 나는 더 말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서 한 말도 아니었고 그만두자고 한
  • 여태 살면서 혼자인 여자에게 관대한 남자치고 멀쩡한 사내를 본 일이 없다. 혼자 오셨어요, 라니. 너무 구식이어서 차라리 순진하게 들린다. 대체 혼자인 여자의 그 무엇이 남자들을 용감하게 만드는 것일까. 용감한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는 여자의 대꾸 없음을 수줍음이나 앙탈, 뭐 그런 식의 호감의 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