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숲에서 보낸 하룻밤

- 찬비

나 사랑해? 직전에 내가 물었다. 지금에서야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혹 목소리가 떨렸거나 재촉하듯 다급하게 들리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을 한다.

뻔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아서 나 너랑 잘 생각 없는데, 하고 말한다. 이리 저리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 달 전쯤 극장에서 봤던 영화가 나온다. 참 빠르네. 그는 옷을 벗기는 손을 멈추지도 않은 채 나랑 못 잘 이유도 없잖아, 라고 대답한다. 하기야 이미 그를 따라 이곳까지 들어왔으니 얘기는 다 끝난 셈이다. 나는 더 말하지 않는다. 하고 싶어서 한 말도 아니었고 그만두자고 한 말도 아니었다. 뭐 좀 먹고 할래? 그의 물음에 그냥 나머지 옷을 벗어버린다.
그와 자면서 냉장고를 생각했다. 냉장고에 넣어둔 반찬통을 하나하나씩 떠올렸다. 김치는 너무 익어 시어 빠졌을 거다. 감자조림도 이번 주 안에 먹어 치워야하고, 계란이 얼마나 남아있던가? 가는 길에 잊지 말고 사가야겠다. 우유도 떨어졌을 거야. 이건 뭐 있는 게 없네. 그러다가 아 참, 하고 엄마가 보내온 커다란 보따리가 생각났다. 부들부들한 하늘색 보따리엔 반찬통이 큰 것, 작은 것 모두 합쳐 다섯 개가 야무지게 포개 있었다. 엄마는 내가 집을 떠나 산지 8년이 되던 해부터 무슨 일인지 일 년에 네 번씩,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꽁꽁 싸맨 보따리를 보내왔다. 차라리 대학시절 변변찮은 고시원방에서 라면 끓여먹고 살 때나 이렇게 해줄 것이지 지금 와서 무슨 유난을 떠느냐고 그만해라 말려도, 엄마는 듣는 체를 안했다. 아무튼 그래, 그 보따리를 냉장고에 넣어두었던가?
냉장고와 반찬통을 생각하는 여자와 자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서두른다. 낯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침대 위에 엎어져 있는 그의 맨 등을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기 때문이다. 계속 냉장고와 반찬 따위를 생각해선지도 모른다. 허기진 몸에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아주 이상한 곳에 도착했다. 저녁 일곱 시쯤 영등포역에서 그와 만났다. 비가 와서 어디 들어가 뜨거운 커피라도 한잔 하고 싶었지만 그냥 그가 하자는 대로 두었다. 역을 나와 큰길에서 길을 건너고 조금 걷다가 오른쪽 샛길로 빠지니 모텔들이 즐비했다. 그 중 두 번째 건물이었다. 길을 잃어버릴 이유는 전혀 없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 길로 나가면 바로 역이 보여야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딘가 하면, 숲이다. 이 주변에 공원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숲은 더더욱. 여기는 영등포다. 영등포의 모텔촌 뒷골목이다. 당황스러워 뒤를 돌아보니 모텔은 사라졌다. 번쩍거리던 네온사인 간판들 대신엔 푸르고 축축한 나무들만 울창하다.
하지만 당황스러움도 잠깐이고 나는 다시 배가 고파온다. 그의 맨 등을 보고난 후로 허기는 계속 심해지고 있다. 당장 뭘 좀 먹었으면 좋겠다. 보따리가 아쉬워진다. 엄마가 보내준 반찬은 철에 맞고 대부분 오래두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번 반찬통엔 봄나물들이 가득했다. 취나물은 볶고 미나리는 데쳐서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고 무쳤다. 민들레는 메밀떡을 만들고, 쑥은 손으로 큼직하게 뜯은 명태포와 함께 반죽해 전을 부쳤다. 한 끼라도 먹고 나올 것을. 숲 한가운데 주저앉아 반찬통이나 아쉬워하고 있다니. 땅에 짚은 손가락 사이로 민들레 노란 머리가 걸린다. 순간 어쩌면 엄마도 이 숲에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 걸으면서 냉이 뜯고 쑥을 개키는 등을 본 것도 같다. 모른 척 지나쳤던가? 이 숲 어딘가에 엄마가 있을 것이다. 엄마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숲 밖으로 나가는 대신에 숲 속 어디선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엄마를 찾기로 결정한다. 그 등에 나물 반찬을 서넛 올리고 밥부터 먹어야겠다.

나 사랑해? 직전에 내가 물었다. 지금에서야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을까, 혹시나 목소리가 떨렸거나 재촉하듯 다급하게 들리진 않았을까, 그런 걱정을 한다.

응답 4개

  1. 미리퐁말하길

    냉장고, 영등포역, 엄마의 반찬,등,어두운 공원숲
    허기와 당신.
    아름답습니다…네…

  2. 말하길

    소설? 쑥과 손으로 뜯은 명태포 버무린 전,,,어떤 맛일지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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