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해변에서의 하룻밤

- 찬비

“혼자 오셨어요?”

여태 살면서 혼자인 여자에게 관대한 남자치고 멀쩡한 사내를 본 일이 없다. 혼자 오셨어요, 라니. 너무 구식이어서 차라리 순진하게 들린다. 대체 혼자인 여자의 그 무엇이 남자들을 용감하게 만드는 것일까. 용감한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는 여자의 대꾸 없음을 수줍음이나 앙탈, 뭐 그런 식의 호감의 신호로 착각했는지 슬그머니 옆으로 와 앉는다. 나는 일부러 몸을 뒤로 확 젖힌 채 남자의 눈과 눈 사이를 똑똑히 바라보며 말한다.

“네. 혼자 오셨어요. 계속 혼자이실 예정이고요.”
“아이 참, 너무 딱딱하시네. 저 그런 놈 아닙니다.”

안 그래도 딱딱한 얼굴이 더 굳어진다. 그런 놈인지 아닌지 관심 없다.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도 않다. 쏘아붙이려는 찰나 남자가 생글거리며 다시 말을 건다.

“분명 어디서 뵌 것 같은데….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순진하단 말은 취소다. 웃음 띤 얼굴로 능수능란하게 수작을 이어가는 남자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떤 말을 해야 한 번에 떼어 낼 수 있을까. 어쭙잖은 대답은 놈이 물고 늘어질 꼬리가 될 것이다. 빤하디 빤한 대화를 단박에 끊어 낼 강력한 한 문장이 필요하다. 한 문장, 생각해보면 바로 그 한 문장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도 모른다. 단 한 문장조차 고칠 수 없다는 나에게 대표도 그렇게 말했다.

“아, 김 작가 너무 딱딱하다.”

졸업 후 세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 어이없게도 처음 쓴 시나리오가 공모에 당선됐고 그 해에 영화사에서 감독을 소개받았다. 감독과는 말이 꽤 통했고 취향도 비슷했다. 감독님, 작가님 하는 존칭이 낯간지러워 이름을 부르게 됐고, 전화하고 밥 먹고 극장에 가고 하다 보니 손도 잡고 잠도 잤다. 이를테면 우리는 연인이자 팀이었다. 연애의 목적이 영화의 완성임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여름에 저희 횟집 한 번 오셨잖아요. 영화 찍는다는 남자 분이랑. 맞죠?”

그와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어제 부로 세 번째까지 전부 엎어졌다. 처음엔 돈을, 두 번째엔 스스로를, 어제는 서로를 탓했다. 여름에 바다를 눈앞에 두고 회를 먹을 때만 해도 비난의 화살은 암만 끌어 모아도 부족한 돈에 꽂혔다. 돈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과 그러한 불신에서 비롯한 맹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우리는 자신의 무능력을 문제 삼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차마 너 때문이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 여기, 해가 몇 시쯤 져요?”

될 대로 되라지.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그는 늘 큰 소리로 웃었다. 허풍 한 점 없이 텅 빈 웃음은 순식간에 귓가에서 부서졌다. 왠지 그대로 부서지도록 두는 게 미안해서 나도 따라 말하곤 했다. 뭐라도 되겠지.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패기인지 포기인지도 따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을 탓하는 척 했을 뿐 속으로는 오래 전부터 상대를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향한 비난을 끈질기게 미뤄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곧 집니다. 바닷가는 밤이 순식간이에요. 여자 혼자선 위험하죠. 근데 혹시 숙소는 잡으셨어요? 아직 이시면 제가 잘 아는 데가 있는데….”

될 대로 되라 했으나 될 대로도 되지 않았고, 뭐라도 될 줄 알았으나 뭣도 되지 않았다. 결론이 그랬기에 그 말은 더없이 부정적인, 포기를 예언한 문장으로 남았다. 우리는, 우리의 연애는, 우리의 영화는 그렇게 항복했다. 너 때문이야. 네가 다 망쳐버렸어. 아니, 네 잘못이지. 네가 또 망친 거야. 항복은 고달팠다. 서로에 대해 아는 만큼 빈정거려야 했다. 어느 순간 그에게도 나에게도 끝이 보였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내가 그 때 횟집에서 얼마나 욕을 했는지 알아요? 값은 더럽게 비싸면서 횟감은 한 삼일 묵은 것처럼 눅눅하고 말예요. 반찬이랍시고 나온 것들은 오히려 식욕을 떨어뜨릴 정도였다니까요. 양배추 샐러드, 그건 언제 만들었는지 물이 잔뜩 생긴 바람에 배추 위로 마요네즈가 둥둥 떠다니고, 아주 보기만 해도 역했다고요. 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내가 그래서 당신 안 따라가는 거예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자기가 간판 걸고 하는 횟집이 그런데, 하물며 중간에서 소개하는 숙소는 오죽하겠어요? 요금은 바가지로 씌우고 시설은 형편없겠죠. 도대체 어울리지가 않는 벽지에, 냄새나는 이불에, 아마 복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수상한 얼굴로 웃으면서 지나갈 걸요. 이제 보니 순 사기꾼 아냐. 왜요? 왜 그렇게 봐요? 더 할 말 있어요? 아님 나랑 자고 싶어? 당신 잘 해?”

넉살 좋게 엉덩이를 붙여 앉았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바지를 털었다. 눈앞에서 모래 먼지가 날렸다. 닿을 듯 가까이 있던 바다가 부옇게 흐려진 시야 사이로 점점 멀어져 갔다. 남자의 말대로 해변의 밤은 금방 시작될 것이다. 나는 바다에서 연인이 헤어진다고 썼고, 그는 바다에서 헤어지는 연인을 찍었다. 우리에게 그 다음은 생각한 바 없었다. 고칠 문장과 삽입할 장면은 아무데도 없었다. 우리가 진정 소중히 하는 것들을 누군가는 그냥 지나치기를 강요했고, 누군가가 진정 원하는 것들을 우리는 보란 듯이 내팽개쳤다.

“미친년.”

오랜 시간 비타협을 위안으로 삼았으나 조급은 도무지 달래지지가 않았다. 숙소도 정하지 못한 채 해변에서 일몰을 보는 심정이었다. 바닷물이 점차 짙어지자 한나절을 그저 멍청히 보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억지스러울 만치 길게 원망했다. 우리를 우리로 지속해주던 방식, 강요당하고 무시하는 비타협의 방식대로 우리는 끝에 다다랐다. 그 끝까지 강력한 한 문장은 내 몫이 아니었다. 미친년, 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뒷모습이야말로 강력한 한 문장이었다. 거봐, 밤은, 금방, 이라니, 까, 아. 잦아드는 파도 소리가 추궁한다.

응답 2개

  1. 지나가다말하길

    꺄오~ 재밌다. 이걸루다 단편영화 한편 찍어봐요…글이 참 맛있네요.

  2. 폭풍전야말하길

    궁상이몽은 늘 재밌네요. 읽다보면 피식피식 웃음도 나고.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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