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나는 제복이 좋다

- 찬비

비가 내리는 바람에 지하가 꿉꿉하다. 아직 카드를 찍기 전, 좀 늦더라도 버스를 탈까 망설인다. 그 때 계단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일부러 대열을 맞춘 것은 아닌데 통일된 복장 때문인지 움직임에 무게가 실린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는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 뒤따라 들어간다. 지하는 더 이상 꿉꿉하지 않다. 물론 공기야 눅눅하겠지만, 짙은 청색의 군복을 맞춰 입은 그들을 보고 있자니 시원한 청량감마저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그들을 주의 깊게 흘깃 거리면서, 관찰이 용이한 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제 전철이 올 때 까지 짧은 감상의 시간. 나는 제복이 좋다.
뭐가 좋으냐면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 제일로 좋다. 제복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각이다. 빳빳하게 날이 세워진 바지, 몸에 꼭 맞는 어깨선, 빈틈없이 아귀가 맞물린 직사각형의 가방, 색깔은 늘 검정색이나 회색, 아니면 오늘처럼 짙푸른 군청색. 무엇보다 머리 위에 정확히 사십오도 기울기로 자리한 모자가 압권이다. 모든 게 더할 것도 덜한 것도 없이 딱 떨어진다.

나는 남자들 역시 제복에 환상이 있다는 걸 안다. 정확히 말하면 남성에게 그것이 훨씬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쉽다는 걸 안다. 간호사와 스튜어디스, 그리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 열광하는 남자들은 평범한 수준이다. 꿈꿔봄직한 환상의 범위 내에서 지극히 기초적인 단계이며, 때문에 남자들의 제복 환상은 공공연하게 표현된다. 단체로 미니스커트 제복을 입고 ‘소원을 말해봐’라고 속삭이던 ‘소녀’들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 셈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환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속옷이 다 보이는 아슬아슬한 교복 차림의 여학생(을 연기하는 전문 모델이겠지만.) 사진을 수집하는 행위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나 또한 제복 차림의 남자들을 보면 자연히 시선이 간다. 취향을 따진다면 민소매 쫄티로 팔 근육을 과시하는 것보다 단추 두어 개만 풀러진 검은 셔츠 차림이 훨씬 섹시해 보인다. 물론 그 셔츠 안에 적당한 볼륨의 근육이 있다는, 혹은 그럴 것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면 나는 왜 제복이 좋을까? 어째서 나는 제복 입은 남자에게 섹시함을 느낄까? 제복은 단순한 복장이 아니다. 제복은 몸을 보호하고 치장하는 용도를 넘어서,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는 장치이자 권위의 상징이다. 규격화된 복장은 그 사람이 제도와 규율에 의해 통제 받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제도와 규율에 근거해 누군가를 통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제복은 권력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권력, 그것이 환상의 핵심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성적 욕망은 때때로 혹은 늘 권력과 관계한다. 제복의 완전무결한 외양은 권위성을 갖고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 개성이라 할 만한 개인적 특징이 일체 제거된 공적인 복장은 보는 이에게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그것은 당연한 순서로 성적 환상과 결합한다. 그 환상은 권력과 관계하면서도 유희적인 성격이 강하다. 쉽게 말해 놀려보고 싶은 것이다. 각에 맞춘 정자세의 완벽함 이면의 흐트러진 모습이 궁금하다. 나로 인해 곤란해 하는 상대방을 보면서 쾌락과 만족을 느끼다니, 역시 지나치게 유아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애 같다는 건 그만큼 본능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욕구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놀리고 싶은 동시에 놀림당하고 싶다. 지배 욕구와 피지배 욕구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짝을 이룬다. 나는 제복 입은 남자와 자고 싶다. 제복 입은 남자와 하면 참 재밌을 것 같다. 나는 그에게 제복이 증명하는 부동의 권좌에서 내려올 것을 지시한다. 그는 나의 명령에 굴복하고 권위성을 상실 당한다. 그는 언짢고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못내 흥분한다. 어느 순간에는 그와 나의 역할이 뒤바뀌기도 한다. 나 역시 그의 명령에 순종하며 흥분을 느낀다. 일방적이라면, 서로 합의되지 않은 상태라면 분명 폭력이다. 하지만 조건이 충족되기만 한다면 아주 매력적이고 충분히 실현 가능한 판타지다. 나의 섹스 판타지는 바로 그런 것이다.

남성의 섹스 판타지에서는 남성 일반이 여성에게 갖는, 그리고 갖고자 하는 권력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제복만 해도 승무원, 간호사, 교사, 학생, 경찰 등 온갖 유니폼이 이용되는데, 어떤 이들은 심지어 성직자까지 벗기려 든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는 ‘야동’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아이돌 그룹의 무대에서도 공공연하게 사용된다. 남성들은 각종 매체를 통해 아주 일찍부터 여성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행사하는 어법에 노출된다. 남성들은 거의 성적 욕망을 느끼는 그 순간부터 지배 욕구에 길들여지고 별다른 노력 없이 권력자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때문에 남성의 제복 판타지는 존중받고 거리낌 없이 표출될 수 있다. 남성에게 섹스는 권력이며, 섹스의 만족도는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반면 여성은 욕망하기에도, 욕망을 표현하기에도 불리하다. 성, 그리고 특히 ‘권력’에 관해 여성이 사용하는, 사용하도록 허용된 어법 자체가 너무나 부실하고 빈약하기 때문이다. 학습할 자료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창의적인 발상이 가능한 것도 아닌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섹스 판타지는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 성과 권력에 관해서라면 여성에게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금기시된다. 그 결과 다수의 여자들은 섹시한 남자를 찾지 않는다. 남성의 섹시함을 발견해내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 열정적이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일상적으로 드러내기 힘들다. 결국 여성은 섹스에서 늘 피지배자의 역할을 담당해야만 한다. 여성은 과연 남자가 어떤 복장일 때 섹시함을 느끼는가보다, 내가 어떤 복장을 해야 남성에게 좀 더 섹시하게 느껴질까를 고민한다. 오랫동안 여성에게 허락된 욕망의 범위는 남성이 행사하는 지배 권력을 ‘즐겁게 수용’하는 정도에 국한되었다.

…라고 얘기하고선 내가 너무 멀리 갔나 싶어 살짝 눈치를 살폈더니, 여태 말없이 듣고 있던 Y가 시큰둥한 얼굴로 한 마디 한다. “글쎄, 난 제복 별로던데.” 그렇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모두 다 나 같은 것도 아닐 테다. 그럼에도 감춰진 것, 금지된 것, 봉인된 것을 향한 나의 욕망은 끈질기게 계속될 듯하다. 그 욕망은 유희적이면서도 동시에 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권력관계를 전복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이 권력관계에서 여전히 남성보다 하위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때, 여성의 전복적 쾌락은 남성이 경험할 그것을 훨씬 뛰어 넘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분명 제복은 벗겨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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