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팀장은 잘 들어라!

- 고구마

“다락 다락 다락” 키보드를 두들기면서도 조심스럽다. 피곤에 지쳐 웅크리고 자고 있는 짝꿍이 깰까봐. 침대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모니터를 차마 켜지 못하고 침대 반대편으로 와 최대한 불빛을 숨기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짝꿍의 쌔근쌔근 코고는 소리를 들으니 또 괜시리 엄마 모드로 변한다. 오늘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만해도 토닥토닥 엉덩이를 두들겨주고 싶다. 고생했다며.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활을 상상도 못했다. 와이셔츠 옷깃과 소매의 땟국물을 벌써부터 고민할 줄이야! 넥타이를 고르는 아침을 맞이하다니.

짝꿍과 참 오래도 만나고 있다. 첫 만남은 2006년이었으니 횟수로는 7년째다. 얼마 전엔 짝꿍이 2년짜리 군대도 다녀왔다. 정말 하루하루는 힘들었는데 2년은 금방 가더라. 입대식에서는 웃는 얼굴로 보내 놓고는 서울로 오는 버스 안에서 꺼이꺼이 울었는데, 그때가 민망할 만큼 시간은 휘리릭 흘렀다. 이제 그는 내 옆에 있다. 군대 가기 전과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말이다. 도서관에서 책만 보고 과외나 아르바이트로 생활할 것 같았던 그는 놀랍게도 취업의 길을 걸었다.

취뽀? 취업뽀개기가 뭐더라…?

어언 5년 전이었던가, 나도 대기업이라는 곳에 원서를 쓰고 시험을 보러 왔다갔다한 적이 있다. 그때만해도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고, 못하는 영어 실력으로 유학을 꿈꿨다. 그런데 생계 걱정과 함께 주위 친구들이 모두 은행이나 금융권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조바심이 났더랬다. 그런 생각이 머리 속을 빙빙 돌 때 인터넷 화면에 한 기업 광고가 떴고, 바로 지원서를 썼다. 1차 합격. 2차 시험을 보러 갔다. 인적성이라나 뭐래나. 뭔가 아이큐 테스트 같은 시험이었다. 한 고등학교에서 시험을 본 후 시험장을 빠져 나오며 생각했다. 우씨! 내가 왜 이런 시험을 봐야 하지?

그 후 난 큰 기업보다는 작은 기업에 잠시 몸을 담았고, 연봉 2000이 넘지 않는 (실은 넘지 못하는 ㅠ_ㅠ)곳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 그리곤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이 연봉 수준을 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비영리를 지향하지는 않지만(!) 실상은 그렇게 굴러가는 단체나 조합 등등에 몸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간 5년 동안 취업을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몰랐다. 허나 나의 짝꿍의 취업 도전기를 통해 수능보다 더 고달픈 2달을 보냈다. (나보다 짝꿍이 심리적, 육체적으로 더 힘들었을텐데 그의 이야기는 추후에 듣기로 하자. 야근 없는 시즌이 오면 말이다.)

광탈, 빛의 속도로 떨어지다

“D그룹 1차 합격 떴습니다. 사람이 미래다? 난 사람이 아니무니다. 광탈 ㅠ_ㅠ” 2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어간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글이다. 짝꿍네 학교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모여 수다를 떠는 온라인 공간인데, 이곳은 취뽀(취업뽀개기) 같은 카페보다 더 정보가 빠르다. 그룹의 계열사에서 합격 통지가 올 때마다 게시판은 들썩인다. ‘광탈’이라는 말이 유행인가보다. 광탈(光脫). 빛의 속도로 떨어진다는 뜻이다. 게시글이 올라오면 댓글이 쭈르륵 달린다. “합-” “광탈 ㅜ-ㅜ” “나도 탈” “탈탈탈” 쓰디쓴 유머가 돌기도 한다. “이제 S사도, L사의 제품도 안 쓸거고, L사의 과자도 안 먹을건데… 그럼 외국계 회사꺼만 사야 하나” 등등.

게시판에 글이 올라올 때마다 내 심장도 쫄깃해진다. 짝꿍에게 연락해서 바로 물어보고 싶지만 미안한 마음에 차마 먼저 연락하지는 못한다. 마치 엄마 같다. 주위 아줌마들한테서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으로 온 아들 눈치만 살피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먼저 이야기해 줄 때는 기뻤다. “합격했어~. 나도 이제 주말에 인적성 보러 다니는 취준생(취업 준비생의 줄임말)이야!” 다이어리를 펼쳐 짝꿍 시험날을 표시해둔다. 마치 시험날을 체크하는 엄마처럼….

인적성 책을 펼쳐보았다. 말그대로 인성과 적성을 검사하는 시험일테다. 문제를 한번 살펴보자.

0~9까지의 숫자를 한번씩만 사용하여 네 자리 숫자의 비밀번호를 설정하려고 한다. 아래의 조건에 맞는 비밀번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인가? (단, 0은 짝수가 아니다) (출처: A기업 2012년 출제문제, 한국고시회 언어논리 5쪽)

ㄱ. 소수가 아닌 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ㄴ. 큰 숫자에서 낮은 숫자의 순서로 나열한다.
ㄷ. 짝수는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① 1은 항상 세 번째에 온다. ② 모든 비밀번호는 5의 배수이다. ③ 가장 작은 경우는 9410이다. ④ 모든 경우의 수는 네 가지이다. ⑤ 비밀번호는 짝수이다.

이런 언어논리(?) 문제부터 시작해 수학, 물리 등등의 문제를 풀고 마지막에는 ‘인성’ 검사를 본다. ‘가끔은 욕을 하고 싶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길 수도 있다’ 등등과 같은 뭔가 심리테스트 같은 문제에 1에서 5까지 점수를 매긴다. 이 문제들로 어떻게 적성을 검사하고,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인성을 테스트하는지 모르겠다만 이 난관을 거쳐야 비로소 면접의 기회를 얻게 된다.

PPT 발표, 영업 전략 발표, 논술 시험 등 기업들은 다종다양하게 그들만의 인사 방침을 정해뒀다. 짝꿍을 비롯해 모두 왜 자신이 면접 보는 기업 마케팅 전략을 짜야 하고, 면접자들끼리 집단토론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휩쓸려 갈 뿐이다. 입사 동기는 생계유지를 위해서인데, 이걸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멋진 말을 짜낸다. 그리곤 면접 후유증을 겪는단다. 면접 때 한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 누워 죄 없는 이불만 뻥뻥 차댄단다. 이걸 지켜보는 사람의 맘은 쓰리기만 하다.

칼퇴근은 정말 꿈일까

사람 마음이 간사한지라 난 짝꿍에게 여지를 주지 않은 것 같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지만 그가 그 길을 가지 않길 바랬고, 여러 단체의 훌륭한 활동가들이 앞으로 올 날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알지만 그는 다른 길을 선택하길 바랬다. 제도의 안과 밖에 있다고 한다면 이기적이게도 나는 제도권 밖에서 꼼지락 거리면서 뭔가를 해도, 그는 제도권 안으로 쑥 들어갔으면 했다. 나에게 결핍된 걸,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걸,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걸 짝꿍에게 은연중에 강요하지는 않았을까 늘 생각했다. 아무튼, 그는 자발적 의지(라고 믿고 싶다 ^^)로 취업의 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짝꿍 옆에 2개월간의 취업 도전기를 지켜보며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기업에 취업하려는 벗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겠다고. 모두 애써서 살고 있고 방식이 다양하지 못할 뿐이라는 걸. 자기소개서를 자소설이라고 말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기업이 정해 놓은 인재상에 자신을 맞추는 청춘들도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늘 젊은이들이 맥이 없다며 비판하는 여럿보다 취업 준비생이 더 많이 알고, 눈치 채고 있다. 생계 때문에 차마 주먹을 못 들뿐이다.

여튼, 짝꿍은 여러 고민 끝에 한곳에 입사했고, 동시에 회사에 짝꿍을 뺏겨버렸다.

회사 팀장은 잘 들어라! 업무가 마치면 우리 짝꿍을 집에 보내줘라. 네가 집에 가기 싫다고 밑에 사람까지 붙잡아두는 그런 만행을 그만둬라! 그만둬라!
짝꿍은 잘 들어라! 체력 안배가 필요하다. 녹즙이라도 먹고 에로스를 지키자! 지키자!

응답 1개

  1. 말하길

    ㅎㅎㅎ ㅋㅋㅋ 마지막 구호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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