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큰 계산은 계산이 아니네.

- 김연어

친구들과 원주에 다녀왔다. 한 친구가 새로 알게 된 분이 원주에 사셔서 그 분 일하는 이야기도 듣고 연말 송년회 겸해서 회포도 풀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즐겁다. 술은 적지만 음식은 많고 이야기는 꽃핀다. 저번 주에 막을 내린 대선게임이 끝났기 때문에 앞날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서로의 이성친구 이야기로 끝이 났다. 커플 네 쌍과 솔로인 한 친구가 함께였는데 다들 이 친구의 짝을 맺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람끼리의 인연을 맺어주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굳이 소개팅 자리가 아니고서도 배고픈 사람은 배고픈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기 때문에 내년에도 만남의 장을 많이 만들어야겠다.

타지 사람으로서 강원도는 춥고 배고픈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고난의 상징이었던 화전이나 탄광도 이제는 역사 속으로 들어간 마당이지만, 강원도 출신 친구는 고향에 가서 살기 싫다고 했다. 그러나 강원도에서 지금 세상을 함께 살아나갈 수 있는 희망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원산에서는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여 일제에 저항했으며, 박정희 정부 하의 원주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협동조합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영화 ‘훌라걸스’에서도 탄광촌 사람들이 시련을 이기고 훌라댄스로 희망을 주지 않았던가. 처음 가져보는 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희망. 원래는 이런 것들을 신자유주의가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근원이라고 보고 의도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왜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무시할 수만도 없다. 혼자 꿈꾸지 않고 함께 꿈꿀 수 있다면 뭐든 좋지 않으랴. 그래서 춥지만 춥지만은 않은 곳 강원도, 그 중에서도 협동조합 운동의 산실인 원주에 왔다.

원주 하면, 강원도의 대표 도시고, 일단 치악산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생활협동조합이나 신용협동조합 같은 협동조합 운동이 꽃피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어떨까? 일단 우리는 시장으로 갔다. 중앙동 민속풍물시장은 2,7일 장인데 마침 운 좋게도 장날이었다. 여행을 가면 제일 먼저 현지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시장이다. 우리는 저녁 찬거리를 위해 야채, 고기, 간식거리 같은 것을 샀다. 그리고 특별 미션으로 친구와 교환할 2,000원짜리 선물을 골랐다. 난 이름 모를 작은 잎 화분을 샀고, 다른 친구들은 김 세트니 양말이니 털모자니 고르다 보니 신이 났다. 심지어 국수 건지는 체 망도 있었다. 누가 가져가게 될까?

시장과 멀지 않은 곳에 협동사회경제의 한 축이자 회합장소인 밝음신협 건물이 있다. 이 건물에 밝음신협, (사)무위당사람들, 여성민우회, 의료생협 등의 단체들이 입주해 있다. 원주를 흔히 생명사상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협동사회경제를 추구하는 단체들이 많은 것도 이런 사상적 맥락에서 발달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로 돕는 것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데 그것이 발현되려면 특정 인물이나 특정 생각의 도움이 필요하고, 원주의 근현대사에는 장일순, 박경리, 지학순, 김지하 등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지 않았을까.

‘갈거리사랑촌’ 앞에서 설명을 들었다.

‘갈거리사랑촌’ 앞에서 설명을 들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으나 원주에 계시는 분들의 의견은 달랐다. 장일순 선생은 그저 술 잘 먹는 한량이나 할아버지 정도로 인식되고 그를 모르는 원주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는 장일순 선생이 어떤 사안에 있어서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 있었으며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은근한 조언과 ‘배후’를 자임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박경리 선생도 원주에서 『토지』 4, 5부를 쓰는 15년 동안 거의 외부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주 사람들이 그에게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학순 주교나 김지하 시인도 민청학련 사건 등을 겪으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리영희 선생의 말처럼 지학순 주교는 본래 사회의식이 분명하지 않았으며, 김지하 시인은 최근 박근혜 후보 지지발언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쨌든 이런 ‘선생’들은 알게 모르게 대중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이제 와서야 선생으로 인식되지, 그 때 당시에는 그냥 대중 속에 섞여서 대중 스스로 바뀌게끔, 대중들이 혼자 살지 않고 모여서 살게끔 분위기를 만든 것이 아닐까. 으레 하는 선생과 대중이라는 구분조차 없었던 게 아닐까. 그 점에서 지금 원주 사람들이 오히려 ‘선생’들을 잘 인정하지 않는 까닭을 알겠다. 원주의 보통 사람들이 지금의 원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 사람이 알고 지내던 후배에게 ‘표열이, 큰 계산은 계산이 아니네.’ 라는 붓글씨를 써준다. 표열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집에 와서 잊어버린다. 표열은 원주에 새로 만들어진 신용협동조합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군가 돈을 가지고 날라버린다. 임원들은 회의를 열어 회계책임자였던 표열에게 죄를 덮어씌우기로 한다. 표열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분한 마음이 들어 소송을 준비한다. 소송장을 들고 법원을 가기로 작정한 날 아침, 부인이 신발장에서 ‘표열이, 큰 계산은 계산이 아니네.’라는 글씨를 발견하고 표열에게 보여준다. 표열은 이 글씨를 한참 바라보더니 엉엉 울었다. 그리고는 소송장을 찢어버렸다.

실상 우리가 꿈꾸는 작고 밝은 세상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유명인이든 전문가든 벗이든 간에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따를 스승이 많지 않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힐링캠프나 멘토 란도교수가 우리의 유일한 방향일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삶의 모토로 삼고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찾는 방법밖에 없을까. 우리에게 함께 돕기란 머릿속에만 있는 어려운 것일까. 그런 저런 고민을 하며 원주의 협동세상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진행 중인 협동의 이야기들이 펼쳐졌고 우리로서는 쉽게 와 닿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방식이 옳다는 점만은 확실히 느꼈다.

무위당기념관에서

무위당기념관에서

저녁에는 감사히 잘 곳을 마련해 주셔서 편하게 밥 해먹고, ‘서영이’ 보고, 수다 떨고, 게임하면서 밤을 보냈다. ‘백수’, ‘결혼’, ‘세종대왕’ 같은 단어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방과 방 사이’ 게임도 하고, 시장에서 샀던 선물 교환도 하고, 고민도 나눴다. 우리 여행은 가볍고 고민은 뜨겁다. 고민이 쉽게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고민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고 또 고민을 함께 하니, 더 이상 자기만의 고민이 아닌 것이 된다. 우리가 2,30년 후 살아갈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늘그막에 연금 걱정, 자식 걱정 하며 걱정에 휩싸여 살아갈까. 우리가 지금 먹는 마음이 꾸준히 그때까지 이어질 수는 없을까.

시간이 나면 가끔 원주에 들러야겠다. 그리고 혼자 생각을 나누고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

응답 1개

  1. evariste말하길

    우리 여행은 가볍고 고민은 뜨겁다! 멋진 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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