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가지 궁상이몽

오늘은 동네 구석구석 쇼핑하는 날

- 배추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물건을 한 아름 들고 오셔서 구경 좀 해보라고 난리시다.

“이 신발은 거의 새 거다. 첫째, 네가 한 번 신어보렴.”
“당신은 이거 빨아서 등산갈 때 메고 다녀.”
“작은 애야, 이 복합기 작동되나 플러그 꽂아봐라.”

우리 가족은 보따리장수가 된 아빠를 보면서 신기해한다. 20년 넘게 장사를 하신 탓에 집에 와서도 장사꾼처럼 물건 자랑이 입에서 술술 나오신다. 가끔 명품 가방이나 신발을 들고 오시면 백화점에서 선물 사 들고 온 아빠를 대하듯 가족들이 저 달라고 난리가 난다. 실제로 물건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의 흠집만 있을 뿐 당장 가지고 다녀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새 것에 가깝다. 신기하다. 사람들은 왜 이런 걸 버릴까.

아빠는 요즘 병치레 중이셔서 생산 활동을 왕성하게 못하신다. 가게 한 시간 보는 게 고작이다. 치료 중에 밥도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한다. 몸이 성치 않으신 아빠가 하는 최선의 운동은 동네방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다. 운동을 시작한 날부터 아빠의 쇼핑이 시작되었다. 동네를 산책하면서 골목 구석구석에서 숨겨진 꽤 깨끗해 보이는 봉지는 오늘의 핫 아이템이 가득 든 보물봉지다. 오늘도 가족들은 쓰레기를 구경해야 한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박스 줍는 거랑 뭐가 다른가 생각했다. 동네 할머니들이 박스를 주어 담고 고물상으로 가실 때 쪼르르 달려가서 리어카 뒤를 밀어드린 적은 있지만 아빠가 그러는 건 안쓰럽고 부끄러웠다. 아빠도 할머니들처럼 헛헛한 세월에 빈 마음을 채우시려고 쓰레기를 주워 담으시나, 간식 값이라도 마련하시려고 그러시나. 어느 날은 할머니들이 왜 쓰레기를 주우시는지 알겠다면서 동변상련까지 느끼고 계셨다.

아빤 넝마스타일 ~ ♪

“아빠 물건 함부로 가져오면 그 물건에 귀신도 딸려 와서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해. 그만 가져오세요.”라고 아빠의 행동에 딴죽을 걸었다. 뭐라고 하지도 않으시고 우선 따라 오라고 하신다. 금요일 새벽에 청소차가 오기 때문에 목요일 저녁인 오늘은 쇼핑의 대목 날이라면서 골목길 사이사이에 버려진 것들을 보라고 하신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와 쾌쾌한 구린내가 코끝을 찌른다. 그 사이에 책장도 있고, 빨래대, 헌 신발과 옷가지가 담겨있는 커다란 봉지가 있다. 내가 보기에도 아직 사용해도 될 멀쩡한 물건들이 많다. 세상엔 노숙자와 유기견도 많지만 상품이 되어 나온 지 얼마 안 된 버려진 물건도 많다.

아빠는 물건들을 입양하듯 집에 가져와서 물건의 상태를 본 뒤, 지저분하면 닦고 고장이 나서 작동이 안 되면 고쳐 놓으신다. 그 다음 단계는 물건이 필요한 사람을 찾는 일. 물론 우리 가족이 최초의 고객이 되고, 여기서 주인을 못 찾으면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준다. 무슨 산타크로스가 된 양 나눠주고 남은 것들은 도로 쓰레기장으로 내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동네에 있는 고물상으로 가져간다. 물건들은 고물상에서 나름대로 다시 재활용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요즘 공산품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은 노동력이 싼 나라에서 대량의 석유로 가동되는 공장의 기계로 찍어내는 물건이 거의 대부분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산품은 썩지 않는 석유 포장재로 싸여져 어마어마한 이산화탄소를 배출시키는 비행기와 배로 전 세계에 유통이 되고, 많은 부분 한국의 백화점이나 큰 마트에도 배치된다. 요즘 사람들은 석유로 만들어 진 상품을 사서 1년도 안되어 싫증을 낸다. 다시 마트로 가서 새로운 것을 사면서 기분 전환도 하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소비자가 되려 한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과 태블릿피시로 다량의 정보에 노출되어 있는 요즘 사람들에게 이 시대의 유행 주기는 짧다. 짧아도 너~~무 짧다. 오늘 유행한 재킷이 내일이 되면 파격세일 좌판대로 밀려나야 한다. 사람들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를 줄줄 내 버리고 사고 또 산다. 길거리의 쓰레기들은 제 역할 몇 번 해보지도 못하고 내쳐진다.

아빠는 예나 지금이나 옳은 말만 하시는 편이다. 평생 자가용 한 대 없어서 가족 여행을 가도 버스 타고, 기차 타고, 걸어야 했다. 올해처럼 찌는 폭염에도 절대 에어컨을 사는 일은 없다. 당신까지 전기 쓰는데 동참하여 원자력 발전소가 더 필요하게 할 수는 없다 하시면서 말이다. 어릴 때는 가난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말씀인지 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지난 세월동안 아빠의 ‘사지않기’ 철학이 진짜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 불길한 마음가짐이 생긴다. 내게도 쓰레기를 보는 눈이 생긴다면… 슬프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버려주신다면 주울 수밖에…

우리는 같이 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섰다. 예전에 행간(만행공간) 근처에 새로 들어 선 아파트가 있었다. 새 아파트엔 좋은 물건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친구들과 쇼핑을 간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명품 빽, 행간에 필요한 살림살이, 공간 앞에 작게 텃밭을 할 수 있는 스티로폼 상자가 널려있었다. 대여섯이 몰려가서 풍성한 쇼핑을 하고 왔다. 여럿이 모이면 용감해진다고 하였나.

어느 날 살림반 세미나 때 우리가 왜 모여서 같이 밥을 먹고, 수다를 떨고, 책을 읽는지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그 때 넝마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이 먹고 혼자 넝마하면 너무 불쌍하고 처량하니깐. 그래서 같이 모여야 한다고. 가난‘할’ 우리들의 삶이 처량하기까지 하면 안 된다. 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웃기고, 재미있고, 특이하고, 어쩔 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 하면서도 서로의 표정을 보면서 안심한다.

지금 만행 공간에는 버려진 책장을 재활용한 책장, 친구네 이사 도와주러 갔다가 전 주인이 놓고 간 다기 세트, 하나둘씩 모은 옷걸이, 플라스틱비닐, 길거리에 버려진 그릇세트, 공간을 왔던 이들이 선물하고 간 물건 등등이 제 주인을 만나서 잘 지내고 있다. 물건에는 그 물건을 소유했던 이의 영(靈)이 깃들어 있어서 선물을 주는 행위는 주는 이의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 덕분에 행간에는 사람이 없어도 마치 누가 있는 것처럼 훈훈하고 춥지 않다.

그리고 넝마주이 선언 $%@&

만행은 모두 넝마주이입니다.

만행은 스스로의 빈곤을 받아드리면서부터
먼저 세상을 살다간 옛날 사람들의 글로,
세상을 신명나게 살고 있는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길을 가다 만난 친구들을 사귀면서,
언제부턴가 풍족한 넝마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공간이 생겼습니다.

도배 장수에게 우주의 별들을 담은 벽지를 얻었고,
보물섬에서 지혜를 담는 책장을 얻었고,
길거리에 널브러져있던 판자로 칠판을 만들어서
행간의 모양새를 냈습니다.

각자가 들고 온 책들,
넝마주이 할머니는 누가 버린 그릇,
행간을 찾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놓고 간 것들로
어느새 살림살이가 갖추어졌습니다.

넝마정신은 만행길에서도 발휘합니다.

상상의 공간에서 하룻밤 몸을 누이고,
낡은 자전거를 내세워 따순밥 한공기와 잠자리를 얻고,
길을 가다만난 평범한 사람들의 지혜를 선물 받고는
또 그 길을 멈추지 않습니다.

누구도 쉽사리 택하지 못하는 일상에서
길 한복판에 여기저기 버려진
사람들이 버린 소중한 옛 보물들
사람들이 잃어버린 뜨거웠던 체온들
천천히 하나하나씩 집게로 집어 올립니다.
머리보다 가슴에 담습니다.

돈도, 집도 없지만
주은 것들에 기뻐하며
갈고 닦고 새기고 어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고
꿈꾸던 세상을 상상하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살려갑니다.

응답 2개

  1. 지나가다말하길

    멋진 글이예요. 저도 농사지으면서, 농사에 쓸 화분이나 비닐, 망, 기타 등등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구하지요. 걷는 게 심심하지도 않고 보물찾기 하는 기분 좋아요.

  2. 시래기말하길

    어제는 목요일. 그런데 비가 왔어요. 어제 아버님 심심하셨겠어요.. 아버님이 참 멋지신 분이네요. 그러기 쉽지 않은데~ 마지막 시 그저..아름답군요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