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그후 / 정일근

- 은유

그후 / 정일근
‘한 잔 물이 흔들렸을 뿐’

그후

사람 떠나고 침대 방향 바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고
벽으로 놓던 흰머리 창가로 두고 잔다
밤새 은현리 바람에 유리창 덜컹거리지만
나는 그 소리가 있어 잠들고
그 소리에 잠깬다, 빈방에서
적막 깊어 아무 소리 들을 수 없다면
나는 무덤에 갇힌 미라였을 것이다, 내가
내 손목 긋는 악몽에 몸서리쳤을 것이다
먹은 것 없어도 저녁마다 체하고
밤에 혼자 일어나, 열 손가락
열 발가락 바늘로 따며
내 검은 피 다시 붉어지길 기다린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심하게 흔들렸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 정일근 시집, <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저는 혼자 살아요” “결혼…. 안 하셨나봐요?” “해봤어요” 영화 <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대화다. 신선했다. 여자주인공의 이혼을 심각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렸다. 심지어 ‘해봤어요’ 할 때 은수가 능력자로 보였다.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본, 그래서 삶의 다양한 세계와 접속한 강자 말이다. 10년 전, 이 영화가 나올 때만 해도 이혼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부정적이었는데 허진호 감독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 주변에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다보니 이혼 비율이 높다. 돌싱남녀들.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한다는 거다. 남자들의 경우 아이는 엄마에게 맡기지만 양육비를 꼬박꼬박 잘 준다. 애들 학원비만이 아니라 생활비 수준으로 충분히 준다. 반면에 여자들은 전 남편에게 양육비를 거의 못 받는다. 하나같이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남자 몫까지 참으로 열심히 산다. 존경스러울 만큼.

난 혼자서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어서 남편이랑 헤어지지 못했는데 한동안 혼자 살고 싶어서 몸살을 앓았다. 이혼, 아니 ‘독립’이 화두였다. 남편이 싫다기보다 누구랑 같이 사는 그 자체가 싫었다. 남편과 자식까지, 내 몸보다 큰 배낭 세 개쯤 짊어지고 사는 기분이었다. “결혼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는 일”(율리히백) 이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고단하고 지쳤다. 남편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홀가분하지 않았다. 아쉽기도 했다. 남편이 출장 가는 직업도 아니라서 연애기간 포함하면 어른이 되고부터 내내 붙어살았다. 그 없이 살려니까 불편했다. 특히 아이들이 문제였다. 아들은 아빠가 보고 싶어 풀이 죽어 지냈다. 별거라고 말하기 민망한 짧은 기간. 한 달 후 다시 만났다. 남편은 가라니까 갔고 오라니까 왔다. 그것이 그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언제나 내 뜻대로 살도록 해준다. 어리석은 사람이라 어리석어 잊고 산다.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다만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 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 은유

응답 7개

  1. 길들여 지지 않는 자유말하길

    요즘 제 화두이기도 해서 그런지 더 마음에 와 닿네요.
    이혼이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지만 다만 ‘아픈 선택’이 아닌 ‘즐거운 선택’일 수도 있었으면 해요. 더 물러날 곳이 없어서 하는 선택이다 보니 늘 아프고 또 이혼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무겁습니다. 광고 속에 가족은 늘 엄마 아빠 아이가 함께 웃는 모습으로 행복한 가정상을 강요합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 가정이 화목해야 국가가 굳건해진다는 초등학교 공책도 생각납니다.
    화목해서가 아니라 화목해야 하는 거죠.
    앞으로 무엇에 의해서 살지 않기로 해봅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즐거울 수 있는 이유가 내 안에 있을때 가족이 함께하면 더 즐거울 수 있지 않나 싶어요.

    • 비포선셋말하길

      아침에 하루키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요. 하루키가 22살에 결혼한 아내랑 아이도 안 낳고 지금껏 사랑하고 존중하며 사이좋게 잘 산다는군요. 아내가 최초의 독자이자 편집자래요. 말그대로 아름다운 동행이죠. 부러웠어요. 단출한 삶이요. 아직 고립 아닌 독립의 욕망이 사그라들진 않네요. 이번생은 이렇게 그냥 살아야하나 싶기도 하고..^^

  2. 놈리말하길

    옙!! 아침에 이글 보고 시집을 다시한번 읽었더니 은유님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서 또 왔어요. 그새 덧글을달아 놓으셨네요(죄송). 맞아요 아내가 없으니까 홀로 어머니 병수발을 했을 것 같습니다. 전 어렸을 때 바다가 보이는 교실로 시인을 처음 접했는데요. 상처를 계속 받으면서 더 좌절하지 말고 어르신 힘 내시길 바라게 되네요. 앞으로도 좋은 시 많이많이 소개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3. 놈리말하길

    백팩… 인디에어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그런데 정일근 샘의 이 시는 이혼보다는 어머니 보내고 쓰신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만^^;)

    • 비포선셋말하길

      침대방향과 이불과 베개 새것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한 침대 쓰던 아내가 아닐까요.. 이혼하신 걸로 저는 읽었어요. 그치만 시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어머님이라 해도 어색하진 않아요. 상실의 고통은 같으니까요. 인디에어 못봤는데 보고싶어지네요..

  4. 매이엄마말하길

    찡한 느낌이네요. 그런데 저는 결혼 전에 꽤 오래 독신생활을 해봐서 그런지, 혼자 사는 것, 다시 혼자 살게 되는 것에 두려움이 있어요. 저는 지금의 남편이 좋기도 하지만, 누군가와 같이 사는 그 자체가 좋아요. 강아지를 키우는 것도 그렇고. 결정적으로 딸을 낳은 것이 외로움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어서 정말 좋았어요. 이다음에 이다음에 혹시라도 남편이 없어져도 딸이 있어서 외롭지 않겠구나 뭐 그런거.

    저도 딸을 혼자 키울 자신이 없는데 그건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육아에 대한 부담과 무엇보다 정신적인 문제예요. 노년이 되어도 다시 혼자 살게 되는 것이 여전히 두려워요.

    그래서 이런 이별에 관한 글을 보면…가슴이 짠하고 눈물이 난답니다.

    • 비포선셋말하길

      저는 부모님이랑 살다가 바로 결혼했어요. 혼자 조용히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요. 사람과 복닥거리면서 사는 거 좋아하는데, 단순한 동거자가 아니라 양육책임자로 어울려 사는 게 버겁고. 독거가 아니라 가족이 공포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래서 궁금해요. 혼자 집에 불켜고 들어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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