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3호] 조개의 깊이 / 김광규

- 은유

조개의 깊이 / 김광규
끝내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조개의 깊이 / 김광규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 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 속에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리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 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 김광규 시집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민음사

 

우리가 조직을 이탈해 첫 만남을 가진 날, 대화의 주제가 ‘첫사랑’이었다. 신천역 새마을시장 포장마차. 그는 첫사랑의 여자와 7년 연애 끝에 헤어졌으며 독신으로 살거라고 말했다. 사랑하던 여자가 부모의 의견에 따라 다른 데로 시집을 가버렸으니 혼자 살면서 지순한 사랑을 지키고 싶은 눈치였다. 좀 귀엽기도 하고 참신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편하고 커피보다 술이 더 좋았던 나는, 여러모로 ‘관계 진전’의 부담이 전혀 없는 그와 자주 만나고 있었다.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편안한 술친구로서 주거니 받거니 술병의 높이에 비례해서 돈독한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심지어 단둘이 7일 간 강원도 절로 여행을 가서도 해와 달이 된 오누이처럼 한방에서 도란도란 얘기만 나누었다. 해뜨면 밥먹고 공부했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강철군화 같은 그런 책들을 보기에 바빴다. 손 한번 잡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사이가 아니라서 그에게 못할 말은 없었다. 그렇게 두 해를 넘겼다. 우리의 이상한 우정은, 결혼과 동시에 이상하게 끝났다.

그와 더는 술을 마시지 않게 됐다. 가족의 배치 안에서는 알코올의 향이 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신혼 때 서로에게 사기결혼이라고 정의내렸다. 술이 끊기자 말도 끊겼다. ‘술은 말의 예비자이며 말의 부피를 불리는 희안한 공기이다’ 라고 김현은 말했으되 그와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당연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평생 나눌 얘기를 ‘우정의 기간’ 동안 이미 나누었는지 모른다. 새삼 그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다행히 그 역시 나에게 꼬치꼬치 묻지 않는다. 나의 니체에 대해 태지에 대해 눈물에 대해 그는 잘 모른다. 내가 공부하러 가는 날, 공연보러 가는 날만 안다. 아이들을 위해 일찍 귀가해야 하므로 안다.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는’ 공산-부부라서 행복하다. 그가 나를 속속들이 알고자 했다면 난 조개처럼 침묵하지 못했을 것이다. 끝내 하지 않은 말 간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저마다의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 은유

응답 2개

  1. 그리고 맑음말하길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한구절이 그냥 아프네요.
    우린 저마다 하지 못한 말이 있기에 또 기대어 살아가나 봅니다…

  2. 쿠라라차말하길

    저도 결혼과 동시에 술을 끊게 되었죠. 가끔씩 디오니소스의 축제에 참여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왠지 가슴 한 켠이 아리듯 쓸쓸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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