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기러기 / 메리올리버

- 은유

기러기 / 메리올리버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메리 올리버 ‘기러기’ 김연수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표제시

직감이라는 것.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경험치에 비례해 발달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고통 체험이 감각세포를 단련시키는 것 같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번뇌 그 후,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한테 가을날 단풍이나 밤하늘 둥근달이 이전처럼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또 자아 붕괴의 통증으로 몸부림쳐본 사람은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고유의 느낌을 짚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전에 강원래씨 인터뷰할 때 그것을 느꼈다. 초반 이십 분 정도나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가 댄스가수시절 얘기를 하다가 문득 나한테 “서태지씨 좋아하세요?” 물었다. 난 분명히 힌트가 될 만한 단서를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 시절, 그러니까 강원래의 클론 활동 당시의 무용담을 가슴 설레며 조용히 듣고만 있었는데 서태지와아이들이 언급되는 대목에서 아마 내 눈빛이 달라졌었나보다. 무심결에 상체를 좀더 바짝 땡겨 앉았을지도 모르고, 낮은 감탄사가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그가 인터뷰 끝날 때 물었다. “B형이시죠?” “앗,어떻게 아셨어요?” “송이(아내)가 B형이거든요.”

나름의 곡절을 겪으며 나도 철이 좀 들었을까나. 나아진 부분도 있고 나빠진 부분도 있는데, 홀연 뇌리를 스치는 느낌의 지각체계와 안색을 살피는 기술은 섬세해졌다. 지난주에는 선배한테 ‘아현동철거사진전’ 보러가자고 문자가 왔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못가겠으니 담에 가자’라고 답을 하려다가 왠지 느낌이 이상해서 망설였다. 좀처럼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강인하고 냉철하기 이를 데 없는, 나하고는 종 자체가 다른 사람인데 그날은 문자만으로도 어떤 ‘흔들림’과 ‘갈망’이 읽혀졌다. 난 발목잡는 할일더미를 제쳐놓고 안도현의 시구,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연탄(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읊조리며 나갔다 -_-;

아현동 사진을 휘리릭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 언니가 무심히 말을 꺼냈다. “며칠 전에 자살하려했다”고, 그래서 일부러 친구들한테 연락해서 만나고 있다고 했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언니는 한다면 할사람 같아서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1학년 때 운동하면서 만난 남편이 ‘약한 천성’에 ‘높은 이상’주의자라서 언니의 삶은 지독히 고단하고 외롭고 힘겨웠다. 그럼에도 지난 20년 문사철의 여왕답게 여지껏 논술로 생계를 꾸리며 살아왔는데 지친 모양이다. 생얼로 다녀도 보기 좋은 막강 동안이었건만 흰머리도 부쩍 늘었다. 길모퉁에서 녹아가는 늙은 눈사람같았다. “여기서 나만 빠져나가면, 지들이야 알아서 살든 말든 다 끝날 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데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어.” 나 같았으면 눈물콧물 범벅돼서 얘기했을 텐데 말투가 지나치게 담담했다. “언니.형부 잘라버려. 바람 같아서 끊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암튼…이제라도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나는 하나마나한 얘기만 중얼거렸다. 그래도 만나길 잘한 것 같다. 원래 강한여자는 외롭다. 암튼 아픈 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해주어야겠다. 이제 착해지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있어야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은유

응답 3개

  1. 비포선셋말하길

    시를 읽다님/ 제가 사람얘기 듣는 걸 워낙 좋아해요. 공감해주셔서 고마워요 ^^
    b님/ b님 리플 보고 B형의 특징이 뭘까 지식인에 물어보고 왔네요. ㅎㅎ 제가 정서에 휩싸이는 인간이란 게 티가 좀 나죠 ^^;

  2. 시를 읽다말하길

    “길모퉁이에서 녹아가는 늙은 눈사람”이란 표현을 한참동안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강한 여자는 외롭다”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구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다독이며 그들의 사연을 들어주며 살아가야겠다는, 격한 윤리적 다짐을 해봅니다.

  3. b말하길

    아.. 가슴이 아픈 글이에요. 늙은 눈사람 같은, 흰머리 부쩍 는 그 언니에게 모두 힘을 합쳐 드리길!
    그리고 은유님이 B형일 것 같다는 생각은 저도 여태껏 글로 알아차렸지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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