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 이태수

- 은유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고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 바람이 분다.
지난해 사시사철 잉잉대던 그 찬바람이 분다.
그는 돌아오지 않고,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이토록 붉은데, 세상은 여전히 뒤죽박죽 돌아간다.
사람은 벌써 그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는지,
그도 이젠 어디로 영영 가버렸는지, 꿈속에서조차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던 봄이 다시 오고
산과 들판, 뜨락에 갖가지 꽃이 피었는데도
내 마음에는 봄이 돌아오지 않는다.
풀잎도 꽃들도 안 보이고, 냇가의 얼음도
처마 밑의 고드름도 녹지 않는다.
거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처진 어깨,
초점 잃은 눈동자, 그래도 아랑곳없는 사람들.
공장의 기계들은 잠을 자고, 집들이 흔들린다.
거리에서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은
가슴에 별빛을 끌어들이지만, 따스한 밥을 꿈꾸지만,
밥그릇을 사이에 둔 아귀다툼이 날로 드세진다.
벼랑에 선 사람들의 아우성과 그 아우성 사이로
여전히 찬바람이 분다. 눈보라가 몰아친다.
봄이 왔는데도 봄은 오지 않는 이 세기말의
어둠 한가운데서 그래도 하염없이
봄을 기다린다. 그를 기다린다.

– 이태수 시집 <내 마음의 풍란> 문학과지성사

봄을 겨울로 살았다. 2월에 스위스에 다녀오고 달력을 두 장이나 넘겼다. 그런데도 내도록 얼얼했다. 알프스의 눈이 녹지 않았고 그 위로 서울의 봄눈이 쌓였다. 책상에는 컨베이어벨트처럼 할 일이 끊임없이 돌아왔다. 순간이다. 글 쓰는 일이 글을 해치워야 하는 노동이 될 때가 있다. 제일로 마음 슬프다. 자본가세상 살찌우는 글은 안 쓰고 싶은데 그러면 자본가세상에서 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인형 눈 붙이는 심정으로 원고지 몇장 채우는 동안, 안팎으로 뒤숭숭 회오리바람 불고 세상은 뒤죽박죽 돌아갔다. 그를 기다리듯 봄을 기다렸다. 강원도 산간지방 바위틈에 연둣빛 새싹이 나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하루를 살았다. 어서 빨리 풀잎과 꽃들로 마음의 뜨락을 가꾸길 원했다. 식목일 지나서야 내복 벗듯 일감을 덜고 겨를을 냈다. 팔랑팔랑 가벼워졌다.

드디어 나의 입춘이다. 마침 햇살도 짱짱하다. 커피를 내리고 음악을 올리고 아침을 열었다. 머리를 감고 손가락으로 물기를 탈탈 털어냈다. 뒷목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는데 상쾌하다. 반가운 촉촉함. 봄이 오긴 오는 걸까. 불과 얼마 전까지는 머리를 곧바로 말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뜨거운 바람 쐬어 두피까지 정성스레 말리는 절차가 필요했다. 어쩌다가 머리끝에 매달린 물기가 닿으면 얼음못이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전신에 퍼지는 그 오싹함이 싫었다. 그런데 이젠 젖은 머리가 더 이상 고드름이 아니었다. 외려 봄비처럼 언 몸을 깨웠다. 그렇게 봉두난발 젖은 머리 흩뜨린 채 내 몸에서 한두 방울 떨어지는 봄비 맞으며 신문을 폈다.

‘대학의 시린 봄’ 학생들은 단식 중. 서강대 학생 모씨가 등록금 인상 무효 주장하며 21일째 단식농성. 중대 총학생회장이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삭발. 자식을 차디찬 바닷속에 둔 부모 마음을 아느냐. 천안함 실종자 어머니들 눈물의 인터뷰……벼랑에 선 사람들의 아우성과 그 아우성 사이로 찬바람이 분다.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눈물의 눈보라 몰아친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사시사철 찬바람 잉잉대는 신문의 나라를 황급히 빠져나온다. 껍데기뿐인 봄. 입춘을 반납한다.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는 세상. 어떻게 봄을 건설할 것인가. 다음날 한겨레 인터뷰특강에서 김제동이 귀띔한다. 지독히도 오지 않는 봄. 웃어야 봄이 온다고. ‘웃으면 봄이 와요’ 한명숙 총리가 달덩이처럼 환하게 웃는다. 나도 덩달아 웃는다. 신문이 거울이다. 신문아 웃어라, 세상이 따라 웃을 것이다. 봄이 와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 봄이 온다. 버스와 남자와 봄은, 기다리면 온다.

– 은유

응답 2개

  1. 연초록말하길

    은유님,은유님이 바로 비포 선셋님인가요?

    그리고 음악을 좋아한다는 말에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데요,어떤 음악을 들으시는지요?

    제가 소개하고 싶은 음반들을 월요일마다 싸들고 가서 일단 일본어 반 사람들과 나누어 듣고

    R에서는 동욱씨,규호씨,그리고 안티고네님과 나누고 있어요.은유님도 여기에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를 살짝 공개해놓으면 저도 즐거운 마음으로 음반이다 디브이디를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선인터뷰 글을 보고 싶은데,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 비포선셋말하길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KBS FM 93.1 프로그램 애청자거든요. 제목그대로, 저는 세상의 모든 음악에 반응해요. 서태지, 라디오헤드, 김광석, 들국화.. 락을 정말 좋아했는데 나이드니 확실히 덜 땡기대요..ㅎㅎ 영화음악도 듣고, 황병기 가야금, 이생강 대금, 인디밴드 음악들, 클래식도 작곡가별, 악기별로 다 들어요. 막귀라서 행복해요. ^^ 연초록님이 뭐든 주시면 그 음악 들을게요.

      글고 전선인터뷰는 오른쪽 아랫부분에 배너 누르시면 됩니다. 링크가 깨져서 안나오는 브라우저도 있거든요. 그럴 땐 메뉴바의 동시대반시대 누르셔서 골라읽으셔야하고요. 좀 번거롭죠? ^^; 어여 링크를 고치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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