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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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유

접기로 한다 /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 박영희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 중에서

장마가 소강상태다. 비가 벌써 그립다. 장마는 싫어도 비는 좋은데. 아쉽다. 생활인이 되고서는 긴 비가 원망스럽다. 이유는 빨래가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에 땀도 많이 흘려 옷이며 수건이 하루에도 몇 장씩 나오는데 비가 오면 빨래가 마르지 않고 말라도 눅진눅진하여 영 불쾌하다. 며칠 전에는 하는 수 없이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자마자 다림질을 했다. 하얀색 파란색 돌기념 창립기념 수건들, 나이키 특가전에서 사온 아들내미 티셔츠들, 큰 인형옷 같은 딸아이의 작은 팬티들, 나의 블링블링한 민소매티, 남편이 교복처럼 즐겨입는 감색 바지, 어시장의 생선처럼 셀 수 없이 늘어선 양말들. 그것들 위를 다리미가 지나갈 때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빨래가 보송보송하게 마를 생각을 하니 모처럼 다림질이 재밌고 보람찼다. 따뜻한 느낌이 좋아서 양말을 들어다가 뺨에도 대보았다.

한편 좀 아깝기도 했다. 이렇게 다려놓아도 어차피 샤워하고 몸 한번 닦으면 10초 만에 수건은 다시 물기를 먹을 테고, 아들내미 농구한판 하고 오면 옷이 또 소금기에 쩔어 잘 벗겨지지도 않을 것이고, 딸내미 놀이터에서 돌아오면 그대로 세탁기로 직행할 텐데 싶으니 말이다. 그렇게 따지면 밥도 일박이일 후면 곧 똥이 되고, 청소도 하자마자 어질러지고, 반찬도 젓가락 몇 번 지나가면 없어지니, 살림 치고 허무하지 않은 게 없다. 살림은 밑빠진 독에 물 붓기다. 아니, 삶은 자체가 낭비다. 책도 한 권을 어렵사리 읽어도 돌아서면 내용을 까먹지 않던가. 두툼한 책 한권에서 단어 하나 내 것으로 만들기가 어렵다. 수학도 몇 번을 풀어야 자신감 있게 답을 쓴다. 수년간 다달이 부은 보험금을 해약하면 푼돈만 남는다.

사 는 게 총체적으로 낭비라는 걸 인지하지 못할 때는 살림만 미워했다. 살림이, 정확히 가사노동이 지겹고 하찮게 느껴져서 집안일 안 하고 살길 간절히 염원했다. 지금은 아니다. 콩나물을 다듬고 깻잎을 씻고 쌀을 씻으면서, 땅에서 난 그것들을 만지면 마음이 순해지고 위로를 얻는다. 바닥 구석구석에 어질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헝클어진 번뇌를 같이 모아버리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터진 솔기를 꿰매면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메운다. 해드는 오후 마루에 앉아 빨래를 반에서 반으로 접으며 미련과 회한을 접는다. 날 괴롭히는 것이 날 철들게 한다더니 살림이 그렇다.

– 은유

응답 2개

  1. 안팎의평화말하길

    접는 일.
    내가 좀 불편해지는 일, 남을 위해…..그런 일. 접는 일. 평화의 길. 내 안의 평화, 밖의 평화….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서 잘 듣고 있다…접어야 하는 부분…다만 불편함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구 행진하는 나의 에고가 남을 불편하기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그러면 나도 우쭐해지겠지?

  2. 구경꾼말하길

    난 왜 그게 안 될까요? 소모되는 것에 잘 적응 안 돼요. 그래서 자꾸 자꾸 쌓아 두기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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