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 은유

프리랜서로 글 쓰는 일을 완전히 그만둔 지 일 년이 지났다. 일명 문필하청업. 각종 사보와 공공간행물을 기반으로 주로는 인터뷰, 신입사원연수 동행기, 부서소개, 맛집 탐방, 새로 출시된 금융상품 안내, 공사 홍보책자 문건, 사장님 말씀 리라이팅 등등. 별별 일을 다 했더니 수입이 짭짤했다. 조삼모사인데, 원고료가 월정액이 아니라 여러 경로와 날짜로 들어오니 가끔 보너스 받는 기분도 들었다. 일을 그만두니까 가장 먼저 돈이 아쉬웠다. 현금카드를 넣었을 때 원고료가 예상보다 일찍 들어오면 흐뭇했는데 요즘은 종종 잔액이 부족하다고 나오니 무안하다. 제대로 직시한 적 없는 나의 비굴한 표정이 은행 몰래카메라에는 남아있을 거다. 어디서 돈 떨어질 데 없나 궁리하던 즈음, 원고료 백만 원 가량이 아직 안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와 같이 일하던 편집회사 직원이 퇴사하면서 ‘원고료 못 챙겨드려 죄송하다, 회사사정이 안 좋으니 연체될 경우 사장에게 직접 전화해보라’며 메일을 보내왔다.

어찌할지 난감했지만 곧 잊었다. 글쓰기 수업으로 책값과 커피값을 벌고 남편에게 생활비 받아쓰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추석, 설날 등 명절을 앞두고 목돈이 아쉬워 그 회사 경리부에 전화해보면 ‘사정이 어렵다, 다음달 10일까지 주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소기업 자본가의 대리인에 불과한 애꿎은 직원에게 “일 년 반전에 쓴 원고료를 아직도 안 주는 건 너무하다”고 푸념하다가 끊었다. 지난 3월 새 학기를 맞아 아이들 학비 과다지출로 돈이 궁해서 또 전화해봤더니 그 직원은 퇴사했고, 가까스로 전화가 연결된 사장은 자기네도 받을 돈이 안 들어온다며 다음 달에 주겠다고 사정했다. 약속기일에는 어김없이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허탈했다. 늘 연기되는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이 악마적 운동성. 원래 자본주의는 빚의 해소가 아니라 축적되는 방식으로 영원히 지속된다더니 어느 새 내가 그 운명의 고리 안에 들어있었다.

그냥 살았을 뿐인데 어쩌다보니 나는 채권자가 되어 ‘내 돈 내놔라’ 독촉하는 자리에 가 있었다. 아마 누군가 채무자가 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 같다. 아무튼 프리랜서 노조를 만들지 못하고 업계를 떠난 게 한스러웠고 더 내심은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돈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돈을 갖고 인상 찌푸리며 아쉬운 소리하는 내 자신이 초라하고 가난하게 느껴졌다. 이허름한 기분은 뭐지. 그 돈 없어도 살긴 사는데 그냥 포기할까 싶었다. 돈에 대한 동경과 혐오의 양가감정에서 오락가락 흔들렸다.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찾아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막상 내가 그런 상황에 닥치자 돈과 자존심을 저울질이다. 연장근무, 체불임금, 부당해고, 장기농성 등 험한 말을 항시 입에 담고 글로 쓰고 살았지만 나는 쌀독이 제대로 비워지고 일터에서 맨발로 쫓겨나고 그래서 망가지고 매달리고 주저앉는 참담한 상황에 한 번도 놓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자각됐다.

일전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조금은 다른 계기가 있었다. 북촌에 있는 유명한 청국장집. 한옥의 처마 끝에 편집된 파란 하늘 드러나는 마당에서 밥을 먹는데 일하는 아주머니 두 분이 싸움이 났다. 짧은 순간 고성과 심한 욕설이 오갔고 서로 뱀처럼 엉켜 머리끄덩이를 잡고 늘어졌다. 아주 원초적인 싸움장면을 오랜만에 목도했다. 주위의 만류로 곧 진정됐지만 밥 수저를 다시 뜨기가 무거웠다. ‘맛집’이라며 거기로 데려간 사람이 무안해했다. 미안하단다. 나는 사과를 반사했다. 기계적인 고갱님 타령을 듣느니보다 싸움을 보는 게 차라리 속 편했다. 그 싸움은 삶의 짜증과 피로와 울분이 뒤엉킨 자리에서 발생한 접촉사고다. 그 자리에서는 누구라도 당할 수 있다. 저분들에게도 화폐라는 충신이 있다면 적어도 겉으로는 고상한 자태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살 수 있을 거다. 가난은 최소한의 품위유지를 방해하고 치욕을 생산한다. 아도르노도 말했다. 욕은 사회의 부조리를 증명한다고. ‘부당한 가난’을 재생산하는 사회로부터 당하는 모욕을 단어에게 되돌려준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청국장집 아주머니들 싸움을 보면서 느끼고 체불임금 받아내려고 억척을 떨면서 깨닫는다. 내가 어설프게나마 고귀한 삶을 지향하고 구차하고 치욕스러운 상황에 휘말리지 않으면서 살 수 있었다면, 그건 나의 능력이 아니라 혜택이라는 사실. 꼭 준재벌 딸로만 태어나야 불공정한 사회구조의 혜택을 받는 게 아니었다.

늘 애매하고 부끄럽다. 내 삶의 자리가 그렇다. 무슨 혜택을 받았다고 하기엔 가진 게 적고 안 받았다고 우기기엔 많은 걸 누린다. 그렇다 해도 애초에 누렸으니까 내려놓을 수도 있겠지. 그 해 박용철 변호사 양심선언을 보고 삼성그룹 사보 일을 그만두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그동안 내가 무슨 글을 썼는가 싶었다. 원자력문화재단 기관지를 만들면서는 녹색성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느라 환경단체를 여러곳 취재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액의 원고료를 대가로 공존할 수 없는 가치를 미사려구로 봉합했던 거 같다. 글로벌기업, 동아시아 허브를 꿈꾸는 기업의 마케팅전략에 따라 이주노동자들과의 공생을 도모하는 글을 능란하게 써냈다. 같은 듯 다른 결. 향기로운 듯 은폐하는 글.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지는 못할지언정 대기업 재벌중심주의 이데올로기에 간접 복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떤 아름답고 온당한 이야기라도 근본 뿌리에 대한 물음과 성찰이 없는 글은 쓰지 말자, 당장 굶어죽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호기롭게 사보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고도 일 년을 끌었다. 돈의 자장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원고료 투쟁을 구실 삼아 떠나온 그곳을 기웃거린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크게 맴돈다. 돈이 아쉬워 목청 높이려다가도 슬쩍 움츠러든다. 나는 인정한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포기하지만, 이탈할 때만 자유롭고 문득 겨자씨만큼 작아진다는 것을.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
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
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
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
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
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
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
롭다는 것을

– 김중식 시집 『황금빛 모서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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