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5호] 木 瓜 / 김중식

- 은유

木 瓜 / 김중식
우리의 사랑은 의지다

木 瓜 / 김중식

사랑이 고통일지라도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는 까닭은
고통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감내하는 까닭은
몸이 말라 비틀어지고
영혼이 꺼멓게 탈진할수록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지속적인 냄새를
피우기 때문이다
 
꽃피우지 못하는 모과가
꽃보다 집요한 냄새를 피우기까지
우리의 사랑은 의지이다
태풍이 불어와도 떨어지지 않는 모과
가느다란 가지 끝이라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의지
는 사랑이다
 
오, 가난에 찌든 모과여 亡身의 사랑이여!

– 김중식 시집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나의 화장대 세간은 단출하다.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 비비크림 정도. 가끔 아이크림이나 향수도 끼어있다. 입국자들에게 선물 받은 건데, 끝까지 써본 적이 없다. 성의가 고마워 간직하다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고서야, 그것들은 쓰레기통에서 서글픈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아이크림은 사용률 50%를 상회한다. 향수는 거의 0%다. 그런 내게, 재작년에 업무관계자가 향수를 선물했다. 작은 부탁을 들어주었더니 고마움의 표시로 주었다. 역시 화장대에 진열해두길 두어 달. 어느 날 한번 써보자고 마음먹고는 뿌려보았다. 음. 향이 은은했다. 산뜻하고 삼삼했다. 그 후, 화장대 위에 놓인 투명한 고것이 어쩌다가 눈에 띌 때면 반가운 맘에 콧노래 흥얼거리며 칙칙 좌우 일회 분사하고 허공에서 비처럼 내리는 향수입자를 맞곤 했다.

지난달 즈음. 외출하는 길에 제과점에 들렀다. 빵을 사고는 지갑을 찾느라 한참을 서서 옷과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점원이 묻는다. “아, 이 향수, 무슨 향수죠? 우리 엄마가 좋아하는 향수였는데” 그 순간. 난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너무 많이 뿌렸나 염려돼서다. “버..버..리향수요.”  버벅거렸다.  “거기까지 나요? 향이 독한가요?”  그녀는 아니라고, 좋다고 그랬다. 엄마가 이 향수만 썼는데 오랜만에 맡아서 좋았단다. “아, 네……” 지금은 엄마가 안 계신 걸까. 뭔지 모를 민망함과 쓸쓸함에 황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월요일. 또 오랜만에 향수비를 맞았다. 저녁에 세미나 하는데 옆자리 선생님이 말을 건다. “나 이 향수 좋아하는데. 뭐였지?” 난 또 책상 밑에 들어가고 싶었다. 아침에 뿌렸는데 아직도 향이 나는 건지 행여 불쾌감을 준 건 아닌지 당황스러웠다. 그분은 다행히 향수에 얽힌 추억을 풀어놓는다.  

한때는 향수냄새가 불편했다. 심지어 머리도 아팠다. 향수사용자들을 외화내빈이라며 은근 얕봤다. 헌데 한해두해 감각세포가 무뎌지면서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되니까 차츰 향수도 향기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내가 향수 뿌리는 여자가 될 줄은 몰랐다;; 아울러 그 향수가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올 줄은 진정 예상치 못했다. 아무래도 나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향기는 진짜, 외부에서 덧입혀진 향수는 가짜라고 여겼던 듯싶다. 그렇지만 원래부터 진짜와 가짜는 없다. 향기로 말을 걸면 그것이 그 순간 진짜다. 기성품 향수가 내면의 향기가 못하는 일을 하기도 하지 않나. 대립구도로 세상을 감각하면 절반은 놓치는 것 같다. 향수에게 배웠다. 사랑은 가도 향기는 남는다는 걸. 냄새는 그 자체로 물고 늘어지는 사랑이었다. 아직도 사분의 삼은 족히 남은, 뭇사람들의 기억을 복원시키는 나의 똘똘한 향수. 정성껏 써야겠다. 누군가는 그 향수를 통해 사랑을 호흡할 터이니.

응답 3개

  1. 연초록말하길

    단출한 화장대,화장대의 단출함을 겨루자면 제 화장대야말로 단출 그 자체인데요

    지난 번 화장품가게에서 받은 아이오페 화이트젠 엠플 에센스,얼굴에 발라보니 이상하게

    마음에 듭니다.처음으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사려고 했더니 어찌나 비싸던지

    깜짝 놀랐습니다.그러자 화장품 가게 주인이 이상한 사람보듯이 말을 걸더군요.

    이것은 비싼 것이 아니라고,얼마나 비싼 화장품이 많은지 모른다고,그러니 손님도 이제

    나이도 있고,얼굴에 이런 정도는 발라야 한다고요.그녀의 말에 넘어갔다기보다얼굴에서

    느껴지는 윤기가 마음에 들어서 처음으로 과한? 화장품을 사들고 오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오고 갔습니다.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들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그 때마다 다르구나,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타인에게는 물건에 불과하기도 하고 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내게는 소음에 불과하기도 하고,그런 것을 이상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다른 감각으로

    바라보고 가끔은 가까이 가보기도 하고,그렇게 널널하게 살고 싶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잘 경계를 넘지는 못하고 살고 있어요.

    그래도 경계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마치 경계가 확장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자기기만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신호일까요?

  2. 랑잠말하길

    제가 모과나무 하나를 키우고 있습니다. 모과는 볼품없는 자신의 꽃보다 진한 향내를 피우는 열매를 맺지요.
    다소 과장된 싯구들이지만 그래도 맘에 들어 퍼갑니다.

  3. 쿠카라차말하길

    종류가 많을 텐데…자기 엄마가 썼던 향수 냄새를 구분할 줄 아는 여성들의 섬세함이 부럽습니다. 갈수록 감각이 무녀지는 나이, 감각은 풍부하고 섬세할 수록 좋은 거 같아요. 그러려면 훈련이 필요하겠죠.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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