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 은유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있다가 없는 것’

견딜 수 없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이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정현종 시집 <견딜 수 없네> 큰나(시와시학사)

소싯적부터 눈물이 많았는데 아줌마가 되니까 더 궁상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혹은 음악을 듣다가 눈물짓는 일 다반사다. 사진을 보고 울어본 적도 있다. 딱 두 번. 뭐 울었다기보다 핑하니 뜨거운 것이 고였다고 해야 맞겠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가 선배가 찍은 사진이다. 하나는 한대수선생님 흑백사진. 홍대 연습실에서 취재를 마치고 뒷풀이 가는 길, 뒤따라가다가 선배가 우연히 찍은 컷이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한적한 뒷골목, 가로등 불빛과 전선줄이 뒤엉킨 담벼락 사이로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가 저만치 걸어가는 뒷모습이었다.

뒷모습은 시간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원래 슬프다. 그런데 노래하다 늙은 남자의 구부정한 뒷태는 더 쓸쓸하고 처연했다. 굴곡진 삶의 변화와 아픔들이 어룽지는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머리칼도 길고 옷자락도 치렁치렁 길었다. 그 이중삼중 검고 긴 것 사이로 외로움의 등뼈를 본 것만 같았다. 말해주지 않으면 누군지도 모를 그 사진이 왜 그렇게 애잔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한대수선생님 책 제목이 생각났다. ‘죽는 것도 제기랄 사는 것도 제기랄’

광화문 교보 뒤편 2층 카페. 신문기자였던 선배가 수년간 북한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으로 전시회를 준비중이었다. 미리 사진을 보게 됐다. 4*6 사이즈의 사진을 한 움큼 손에 쥐고는 한 장 한 장 넘겼다. 호기심어린 두 눈으로 나는 열심히 ‘북한사람’을 찾고 있었나보다. 아무리 넘겨도 나오지 않자 바보처럼 물었다. “선배, 근데 북한사람 어딨어요?” “그치?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그거야.”

북한사람은 우리와 피부색과 생김새가 똑같다. 그들의 일상사가 담긴 그 사진에는 당연히 새벽별 보기 운동을 마친 헐벗고 굶주린 ‘북한사람’은 없었다. 사진전제목이 ‘사는 거이 뭐 다 똑같디요’였으니 메시지는 내게 성공적으로 전달된 셈이다. 선배에게 부끄럽고 사진에게 미안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굳어있는 편견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한없이 해맑고 순박한 북한사람들을 보는데 괜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태어나서 늙어가는 사람의 일들. 흐르고 변하는 것들. 어디서나 생의 기본적인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마지막장까지 사진을 다 보고나자 이적의 노래가 떠올랐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다행이다’

다른 힘센 후배와 같이 사진전을 조금 도왔다. 3일간 전시가 끝나고 사진을 떼는데 북녘동포들과 뜨거운 안녕, 헤어지는 느낌이었다. 밤에 술 한잔 하면서 ‘있다가 없는 것’ 에 대한 소회를 풀었다. 수첩에다가. 그리고 한 달 후. 사진전을 보러왔던 분이 <견딜 수 없네>란 시집을 선물해 주셨다. 표제시다. 견딜 수 없네. 어쩐지 좋은 시 일 것 같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목차를 훑고 50쪽을 펴서 시를 읽어 갔다. 우주에 떨궈진 눈물의 환생이 반가워서 가만히 시집을 품었다. 벌써 3년 전 일.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이마저도.

– 은유

응답 3개

  1. 게으른꿀벌말하길

    모든 흔적은 상흔이다…. 깊은 공감.

  2. 연초록말하길

    어제 30분 정도 일찍 잤다고 몸이 개운합니다,제겐 죽음이나 마찬가지인 새벽시간에

    글렌 굴드를 틀어놓고 이 곳에 들어와서 시 한 편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는데요

    사진전에 관한 이야기중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예를 들어 북한주민이라든지

    성매매여성은 이럴 것이라든지,장애인의 삶은 이럴 것이라든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제가 보고 싶어하지 않던 것들,아마 보더라도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마음만 불편해지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네요.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까,어떤 마음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일까를 위클리 수유너머에 마실오면서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마실에서 그렇게 내 자신을 들여다보는 노력을 하는 것이 첫 걸음이라고 ,첫술에 너무

    많이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말고 그런 노력자체를 가상하게 보아주자고 마음을 다독이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은유님(저는 이 이름이 더 다정해서) 두다멜과의 멋진 만남은 이루어졌나요?

    그리고 피아노 치고 아침에 학교가는 멋쟁이 아들도 역시 두다멜을 만났는지요?

    • 비포선셋말하길

      두다멜과의 데이트는 주말로 미뤘어요. 아들이 중간고사가 임박해서 주중에 학교 다녀오면 숙제하다가 잠들어서요ㅎㅎ(잠이 많은 아이에요) 기대되요. 표지만 봐도 매력이 철철 넘치더라고요. 잘 보고 월욜에 이야기 나눠요^^ 시 한편으로 아침을 여셨다니 너무 좋으네요. (은유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그이름 사랑해요. 잘못발음하면 온유되니까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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