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자본론 / 최영미

- 은유

전태일 평전을 읽었다. 20년 전에 ‘어느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으로 봤었다. 돌베개에서 조영래 변호사님이 쓴 <전태일평전>이 나왔을 때 사려다가 말았다. 안 봐도 비디오처럼 다 아는 이야기라고 여겼겠지. 책을 읽고 나자 전태일에 가려진 전태일이 보였다. 전태일은 생각보다 더 가난했고 생각보다 더 똑똑했고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화장실도 못 가고 못 먹은 채 시들어버리는 열다섯 소녀들. 차비 털어 붕어빵 사주는 태일이. 평화시장 시다들에 대한 가슴 찢는 연민으로 쓴 일기에 드러난 그의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맑스의 <자본론>에서 초과노동 공부할 때는 전태일이 보이지 않았는데 전태일에서 맑스가 보였다. 자본의 포악함이 살갗을 할퀴었다. 그가 노동소외니 인간소외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노동자를 ‘밑지는 생명’이라고 표현할 때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이주노동자가 우린 기계가 아니라고 말할 때 난 왜 전태일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자본론을 밑줄 그어가며 읽으면서도 나는 자본이 왜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존속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을까. 짙게 물든 단풍잎들 사이로 수많은 전태일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올 겨울에 자본론 공부할 때도 그랬다. 자본론을 어려운 공식 잔뜩 들어있는 수학의 정석 정도로 여겼는데 아니었다. 이 책 왜 이렇게 슬픈가요 물었더니, 고추장이 말해줬다. 가라타니 고진이 “노동자의 슬픈 눈빛을 읽어낸 맑스가 자본주의를 멈추게 했다”는 얘기. 가슴 시리게 투명한 통찰. 주머니난로처럼 겨우내 몸을 덥히던 그 말이 다시금 떠오른다. 어린 여공의 핏기 없는 얼굴을 연민한 전태일이 가혹한 착취를 세상에 알렸다. 남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의심하고 심연까지 파고들 가는 그들. 눈물샘이 닮았다. 뇌에서 눈까지 눈물이 다니는 길이 닦였나 보다. 맑스의 눈물길이 전태일에게로 전태일에게서 내게로 열린다. 슬픈 자본의 역사에 집중호우를 몰고 다니는 두 사람. 맑스 그리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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