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 정현종

- 은유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 정현종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바람을 일으키며
모든 걸 뒤바꾸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집들은 물렁물렁해지고
티끌은 반짝이며
천지사방 구멍이 숭숭
온갖 것 숨쉬기 좋은
개벽.
돌연 한없은 꽃밭
코를 찌르는 향기
큰 숨결 한바탕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막힌 것들을 뚫으며
길이란 길은 다 열어놓으며
무한 변신을 춤추며
밀려오는 게 무엇이냐
오 詩야 너 아니냐.

– 정현종 시집 <세상의 나무들> 문학과지성사

나는 시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누구도 행복할 땐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살만할 땐 시를 읽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생이 막막할 때 삶에 지칠 때 처방전을 찾기 위해 시집을 편다. 톨스토이의 통찰대로 행복한 사람들의 이유는 대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 오만가지 상처의 사례가 시집에 들어있다. 발생 가능한 사건과 충돌 가능한 감정이 정결한 언어와 색다른 의미로 상차림 돼있다. 시를 읽다 보면 생각이 가지런해지고 울렁증이 가라앉는다. 시라는 상찬 덕에 삶은 종종 견딜만해진다. 식탁위에 말라붙은 김칫국물도 생이 흘리고간 빨간 구두발자국이 된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세계를 감각할 수 있으므로 고통도 충분히 아름답다. 시 안에서는.

이창동의 <시>. 고통스러워서 아름다운 영화다. 이 상투적인 표현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 <시>를 보면서 시집을 읽을 때처럼 설득 당했다. ‘고통이 아름다을 수 있다.’ 66세 미자는 이혼한 딸이 맡긴 중학생 손자와 단둘이 허름한 아파트에서 간병인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하지만 레이스 머플러와 꽃 모자, 프릴치마로 치장하고 사뿐한 걸음으로 예쁜 꽃과 대화하며 동화 속 요정처럼 산다. 탐미주의자 美子이면서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걸 제일 행복으로 아는 보통 엄마 米子이기도 하다. 미자가 ‘시 강좌’ 수강신청을 할 무렵 힘겨운 일들이 생긴다. 알츠하이머병이 미약하게 시작되고, 간병하는 이가 한 번만 자달라고 애원하고, 동네 투신자살한 여학생 성폭행 사건에 손자가 가담한 것을 알게 된다.

평소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말하곤 했다. 주님은 한쪽 문을 닫을 때 동시에 다른 쪽 문을 열어놓는다고. 그다지 동의하진 않지만 그 논리를 빌자면, 미자에게 ‘시’라는 출구가 생긴 것이다. 번개처럼 이미 와 있는 사건들을 미자는 시를 쓰며 헤쳐 간다. 손바닥만한 수첩을 수시로 꺼내어 느낌과 생각을 한 줄 한 줄 밀고 나간다. ‘500만원만 주세요.’ ‘협박하나’는 가장 애절한 시구다. 원래 시는 지독한 리얼리즘이다. 하지만 고통의 서사를 통째로 스캔하여 보여주면 시가 아니다. 마음 아픈 것만으로는 결코 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파란만장 인생을 소설 같다고 말하지 시 같은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다. 시는 전개가 아니라 함축, 분출이 아니라 절제다. 그리고 시는, 기필코 아름다움에 관여해야 한다.

이창동의 <시>는 그런 점에서 시의 본령에 매우 충실한 작품이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목 놓아 울며 분출했다면 <시>에서 윤정희는 속울음 삭이며 흐느낀다. 미자는 삶에서 만나는 고통스러운 긴장을 끌고 가다가 마침내 시를 분만한다. 몸속에서 뜨거운 해가 쑥 빠져나오듯이. 부패와 부조리로 막힌 세상을 시가 뚫는다. 죄의식을 모르는 수컷들의 세계가 불편한 미자. 병든 이의 몸을 연신 씻겨내는 미자. 손자의 때 낀 발톱을 정성스레 깎아주는 미자. 더러움을 벗기고 어여쁨을 보려는 미자. 아름다움에 연연하는 이에게는 새로운 통찰이 움트고 길가에 떨어져 터진 살구를 연민하는 이는 윤리적인 선택을 내리게 돼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고 하더라도, 더러움이, 추함이, 짐승스러움이 세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김현). 그것이 문학의 실천적 본성이며, 기복이 없는 일급 이창동의 영화 <시>다.

– 은유

응답 4개

  1. 시를 읽다말하길

    인용하신 시도, 글의 시작도 너무 와닿아서 댓글을 남깁니다. “누구도 행복할 땐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살만할 땐 시를 읽지 않는다.”는 말씀에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영화 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도요. 요즘처럼 시를 찾은 적이 없었던 것 같은 때에 이런 글을 읽으니 조금은 덜 외로운 느낌이네요.

    • 비포선셋말하길

      시를 읽다님이 요즘처럼 시를 찾은 적이 없으셨다니 괜시리 뭉클하네요.
      그래도 시가 있어 외롭지 않은 세상. 시 읽는 친구가 있어서 푸근한 세상이지요.
      시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막 정이 샘솟아요..^^

  2. 고추장말하길

    가 그렇게 좋은가요? 제 아내도 어제 보고는 얼마나 찬사를 늘어놓던지… 결국 일상에 틈을 내야할까 봅니다. 를 위해….

    • 비포선셋말하길

      시를 위한 시간을 낸다는 것, 그것부터 아름답잖아요.
      영화 보고나면 좋은영화 소개해줘서 무척 고마울 걸요..ㅎㅎ (이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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