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작심 / 문태준

- 은유


모든 약속은 보름 동안만 지키기로 했네

보름이 지나면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다른 데를 보듯 나는 나의

약속을 외면할 거야

나의 삶을 대질심문하는 일도 보름이면 족해

보름이 지나면

이스트로 부풀린 빵 같은 나의 질문들을 거두어 갈

거야

그러면 당신은 사라지는 약속의 뒷등을 보겠지

하지만, 보름은 아주 아주 충분한 시간

보름은 나를 당신을 부드럽게 설명하는 시간

그리곤 서서히 말들이 우리들을 이별할 거야

달이 한 번 사라지는 속도로

그렇게 오래

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사

배우 김영호씨를 만났다. 김영호. 한번쯤은 같은 반이었을 것 같은, 아니면 소설에서 주인공 친구로 나왔을 법한 순하디 순한 이름이다. 영화배우라 목둘레에 후광이 비친다. 훤칠한 키보다 먼저 들어오는 순박한 웃음과 허공을 응시하는 멍한 눈빛에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잘 생기셨네요?” 기어코 푼수처럼 한마디 던진다. 인터뷰 자료를 찾으면서 그가 ‘영혼’이란 말을 자주 쓰는 것과 ‘스님’이 되려했다는 얘길 보고 의외였다. 마초적 이미지와 연결이 되지 않았는데 만나보니 따뜻하고 영적인 사람이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느낌. 그가 대뜸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일까요, 죽어있는 것일까요” 묻는다. 자기는 큰 욕심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단다. “왜냐하면 한 시간이면 고민이 다 끝나거든요. 집착과 고민이 없어요. 특별히 잘 보일 사람도 없고 긴장할 일도 없고. 무소유 개념이 오히려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는 거 같아요.” 위대한 망각능력의 소유자. 니체 말대로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데 이것은 필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무엇을 잊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사안의 경중에 따라 십오 년 째 생각나는 일도 있고, 십오 분 만에 잊혀지기도 한다. 때로는 어떤 말에 베이킹파우더를 넣어 한껏 부풀리느라 달이 몇번이나 차고 기우는 동안 뒤척이기도 한다. 그 보름의 하루하루가 만오천년처럼 늘어나는 일은 다행히도 서른 지나고서는 거의 없다. 보름이면 달이 사라지듯 아프지 않게 웬만큼 정리된다. 낯선 것을 변형시켜 내 것으로 만들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나의 삶을 ‘집중적으로’ 대질심문하는 시간, 너의 약속을 외면하는 시간이 길어야 보름이라는 것. 자연의 섭리겠지. 살아갈수록 점점 단축된다. 더는 육체적으로 힘에 부친다. 존재물음 사이로 반찬걱정이 끼어든다. 나이듦이 이럴 땐 좋다.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문자메시지를 보내놓고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십오 분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김영호만큼 평범한 이름의 소유자니까 십오분 정도 핸드폰을 기웃대다가 까먹는 거 같다. 말들이 부드럽게 이별하는 시간. 슬픔이 녹는 십오초.

응답 1개

  1. 사비말하길

    제발 잊혀졌으면 하는 기억들 때문에
    매우 힘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 기억들이 새로운 배치 속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자유로웠던 경험이 생각납니다.
    훗- 그러고보니 별 것 아니었는데 말이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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