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엄마생각 / 기형도

- 은유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학교가 파하는 12시 40분이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에 새겨진 이름 꽃수레. 집 전화다. 며칠 전엔 현관문을 열었을 때 책상에 엄마가 없으면 너무 허전하다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제목으로 일기를 써서 나를 놀래킨 딸내미. 이번엔 또 어떻게 마음을 달래주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받는다. 짐짓 밝은 척 오버한다. “어, 우리 딸, 집에 왔구나!” “오늘로 6일째야. 엄마가 집에 없는 거….” 풀이 다 죽은 목소리다. “어머, 정말이니? 미안 미안~” 나는 있는 힘껏 애교를 부리고 맛있는 걸 사가겠다는 약속과 함께 전화를 끊는다. ‘이 몸이 새라면 얼마나 좋을까’ 딸과 나의 거리가 너무 멀다. 집으로 날아가고 싶어진다. 의외로 구닥다리인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아이가 집에 왔을 때 간식 챙겨주는 엄마가 되고 싶은데 못 지킬 때가 많아 미안하다. 가끔 내 친구들이 집에 전화했을 때 딸이 받으면 “꽃수레 혼자 집에 있느냐?”고 묻는 모양이다. 그러면 딸이 의기양양한 말투로 그런단다. “저는 여섯 살 때부터 집에 혼자 있었어요!”

그래도 낮엔 나은 편이다. 아이가 가끔 밤에 혼자 있을 때가 있다. 오빠는 학원가고 남편과 내가 동시에 일이 있을 때. 평소에는 일주일에 6일 저녁시간을 미리 조정해서 나눠 쓴다. 월목토는 나의 날. 화수금은 남편의 날. 그런데 어제는 남편이 약속 있는 날인데 내가 불가피하게 저녁을 먹고 가야하는 상황이 됐다. 딸내미에게 양해를 구했다. 쥬니버에서 옷입히기 놀이하고 EBS에서 바람돌이 보고 구몬숙제 해놓으면 엄마가 금방 간다고. 정신줄은 목동에 대 놓고 삼성동에서 저녁을 먹는데 7시가 넘으니까 딸이 전화해서 울먹인다. “엄마, 언제와? 밖은 깜깜하고 바람 소리도 들리고 구몬은 한 장 남았는데 꽃수레 지금 너무 쓸쓸해….” 해는 시든지 오래.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안 오는 엄마. 좁은 집에 찬밥처럼 혼자 담겨 있으면 벌판처럼 휑하게 느껴질 테지.

하는 수 없다. 남편을 졸랐다. 먼저 들어가라고. 딸에게 아빠가 곧 간다고 전화했다. 그래도 무섭다고 징징댄다. “엄 마 말 잘 들어봐. 무섭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운 거야. 그리고 너의 쓸쓸함은 30분이 지나면 끝나. 30분 후에 끝나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야. 언제 끝나는 줄 몰라야 그게 진짜 쓸쓸한 거야. 알았지?” “응..” 딸아이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희망적이라는 듯. 암튼 밥 한끼 먹기 위한 이 모든 난리북새통을 생중계로 지켜본 친구가 한 마디 한다. “애는 거칠게 키워. 거칠게 키우는 애들이 잘 커. 너도 잘 알잖아?” 나보고 너무 안절부절 한다고 뭐라 그런다. 나는 애가 밤에 혼자 있는 게 가엾다고 그랬다. “괜찮아. 애들은 금방 까먹어. 어제 9시간 붙어서 놀던 친구가 다음 날 전학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애들이야.” 맞다. 아이들은 순간에 충실하다. 육체적 소화력만 왕성한 게 아니라 정신의 위장도 튼튼하다. 망각의 동물이다. 원한과 번뇌는 어른의 전유물이다.

첫 아이 키울 때는 전화기 건너 애 울음소리가 들리면 억장이 무너졌다. 그 눈물파동이 긴 시간의 강물로 보자면 돌멩이 하나 던져진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늘 입으로는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단다’를 주장해왔지만 이론대로 살기 힘들었다.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애 혼자 두고 올만에 만난 친구랑 소주잔 기울이는 엄마’를 나 스스로도 좀 심한엄마로 규정하게 된다. 정말로 아이키우기는 순간순간이 어려운 시험이다. 노사협상처럼 하나 양보하고 하나 받아내는 거래를 해보기도 한다. 나의 좋음과 아이의 좋음의 접점을 찾아 ‘윤리적 선택’을 고민해보지만 그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겠다. 아이가 다양한 상황에 놓여보는 것이 아이의 감성을 일깨우는 것 같다. 사람은 늘 살던 패턴에서 익숙하면 생각할 일이 없다. 열차시간처럼 정확히 도착하던 엄마가 늦을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년시절 윗목에서 체험한 아이는 적어도 ‘쓸쓸함’이라는 귀한 감정은 느낄 수 있다.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감정의 결이 생기고 마음의 살이 포동포동 오르겠지.

응답 5개

  1. 21세기 아줌마말하길

    마음이 짠하네요. 저는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굉장히 많았는데…나를 키울 건 8할이 TV이다? 뭐 그랬죠.

    그래서…약간의 신경증과 우울증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만…이런 이야기 하면 어쩌라고? 싶네요. 쩝. 사람마다 다르겠죠.

    좋은 점도 있어요.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멍하니 공상하고…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그래서 상상력이나 사고력이 높아진다는…

    하지만 사회성이나 현실감각, 위기대처능력, 체력등이 많이 떨어지지요. 같이 놀 친구만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텐데.

    저도 애 엄마라, 우리 딸을 어찌 키워야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2. 나무말하길

    아이고. 난 아직 긴 시간의 파동 어디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우. 그 순간에는 당장 빠져 죽을 것 같아요. ㅜ.ㅜ

  3. 문득말하길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일 때문에 바쁘셔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잠이 드는 경우가 많았어요. 혼자서 천장의 형광등을 보고 잠이 들었더랬는데 나이를 조금 먹어 잠이들 때 외롭다 생각이 들면 형광등을 본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요. 다음날 아침이면 어머니를 볼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드나 봅니다. 형광등불을 보며 때론 당시의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곤합니다.
    시도, 글도 잘봤어요~

  4. 말하길

    …아, 투정도 시구 같네요. 나 같으면 정말 가슴이 아려서 당장 달려갈 것 같은데….감정의 근육을 키워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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