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새는 날아가고 / 나희덕

- 은유

새가 심장을 물고 날아갔어

창밖은 고요해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접시를 앞에 두고

거기 놓인 사과를 베어 물었지

사과는 조금 전까지 붉게 두근거렸어

사과는 접시의 심장이었을까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지지

심장을 잃어버린 것들의 박동을

너는 들어본 적 있니?

둘레로 퍼지는 침묵의 빛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접시가 아직 깨지지 않은 것처럼

나는 식탁에 앉아 있어

식탁과 접시는 말없이 둥글고

창밖은 고요해

괄호처럼 입 벌리는 접시

새는 날아가고

나는 다른 심장들을 삼키고

둘레를 가진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만났다 헤어지지

– 나희덕 시집 <야생사과>, 창비

‘난 사랑은 교통사고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 피할 수 있다는 거?’ ‘응’ ‘음..그래. 어떤 점에서 그런지 더 설명해줘’ ‘주체는 자기 의지와 윤리적 선택에 따라 형성되는 거잖아. 먼저 결정돼 있는 게 아니고’ ‘그래도 싫은 사람을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잖아.’ ‘좋은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나는 어떤 남자에 굉장히 빠졌었거든. 그 때 외로워서 그랬던 거 같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거야.’ ‘왜? 섹스하고 싶어서?’ ‘응. 근데 뻔히 보였어. 굉장히 강하고 복잡한 사람이었어. 저 사람을 사랑하면 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겠구나’ ‘복잡한 사람 사랑하면 지옥이지’ ‘엄청 참았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거 같아. 사랑하지 않은 건’ ‘난 그렇게 이성이 판단하기 이전에 일어나는 사건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의지나 결심마저 무화시키는 소용돌이. 어떤 격정’ ‘그런 거 없어. 다 자기의 판단과 선택이야’

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를 본다. 역시 사랑. 술. 예술이다. 집요한 반복. 능란한 변주. 남루하고 능글맞고 쓸쓸하고 유쾌하다. 하루에도 그렇게 몇번씩 만났다 헤어지는 둘레를 가진 것들에 관한 이야기. 사는 동안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갖는 게 인생이라고 홍상수는 얘기한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사과처럼 선명한 사랑이야기가 스크린에서 붉게 두근거린다. 이 세계의 비밀을 자기만의 언어로 심상한 듯 풀어내는 그를 나는 거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번에는 스태프 4명에 5천만 원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전 작품보다 더 저예산에 더 즉흥적으로 제작한 실험적인 영화였다. 그런데도 앙상블이 뛰어나다. 묘한 울림과 애상을 자아낸다. 옥희 역의 정유미가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요새, 다들 나 좋다고 난리다. 난리” 나는 홍상수가 영화에 약 탄 거 같다.

홍상수는 사랑을 교통사고라고 생각할까?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의 숭고함을 말하지 않고 신발처럼 일상의 맨바닥을 지탱하는 소모품같은 사랑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교통사고는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랑이, 이성의 우회로를 거치지 않고 감정중추로 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또 본능적이고 실재적이다. 사랑을 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달콤한 충돌을 왜 피하냐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번개처럼 이미 와 있는 사건으로서의 사랑을 말한다. <옥희의 영화> 대사에서 그의 사랑관이 드러난다. “사랑 절대로 하지마. 정말로 안 하겠다라고 결심하고 버텨 봐. 그래도 뭔가 사랑하고 있을 걸…” 사랑에 관한 멋진 통찰이다. 삶의 철학자 니체가 ‘천국이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다’라고 가르쳐주었듯이, 속물대마왕 홍상수가 사랑의 사이비신도였던 나를 일깨운다. 괄호처럼 입 벌리는 접시, 새는 심장을 물고 날아가고, 사과를 잃어버리고도 접시는 깨지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담겼다 비워진다. 둘레를 가진 것들은.

응답 1개

  1. 사루비아말하길

    보셨군요!!
    저는 홍상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 영화는 보면서 왜 그렇게 실실거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영화에 약 탔나봐요.
    예전에 좋아했던 ‘나이 든 남자’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정유미가 아니라 문성근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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