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8호] 조금새끼 / 김선태

- 은유

조금새끼 / 김선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조금새끼 /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
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조금은 바닷물
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때이지요. 모
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은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
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을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자금도 이 언덕빼기 달동네
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
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
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운명이 죄다
들어 있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 김선태 시집 <살구꽃이 돌아왔다>, 창작과비평사

맥도날드 2층. 평일 1시. 방과 후 친구엄마들을 따라 온 아이를 데리러 왔다. 200여석이 엄마들로 꽉 찼다.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식은 커피와 감자튀김 앞에 두고 열띤 대화가 오간다. 우리반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개학후 일주일 지났건만, 2학년 1반부터 6반까지 각반 담임의 행적과 신상명세와 성향 그리고 교문 밖의 뜨고 지는 학원 현황까지 시시콜콜 공유되고 있었다. “교실 청소하러 안 갔지? 꼭 가! 선생님이 이름 표시한다더라.” 불량엄마에게 친절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테이블마다 웅성웅성. 언뜻 귓가에 걸리는 단어가 대동소이하다. “그 선생님, 내가 아는 애 작년 담임이었는데….” “그 학원, 우리 큰 애 때 보내봤는데……..” 나야말로 큰 애 때부터 10년이 넘게 익히 보아온 풍경이건만 그날따라 왜 그리 낯설었을까.

교복 입은 아이들 대신 엄마들이 맥도날드를 장악한 장면이 왠지 쓸쓸했다. 돈, 시간, 열정 삼박자 갖춘 엄마들이 아이들을 학교 보내놓고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특히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은 성수기다. 학부모 총회도 있고 임원 선거도 있고 1년치 학업 스케줄도 짜야하니까. 그래서 엄마들 얼굴이 죄다 진지하다 못해 심각했다. 고유의 표정이 지워진 근심 서린 닮은꼴 안색들이다. 마치 단체로 자식들 면회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뭔가 절박해보이기도 했다. 한 살이라도 빨리 선행해서 수학진도 쭉쭉 빼고 토익점수 쑥쑥 올리면서도 고학년이 될수록 뭔가 더 쫓기고 결핍에 시달리는 엄마들. 비슷한 얼굴의 중산층 여성으로 늙어간다.

2시가 넘자 하나둘 학원에 가야한다며 자리를 파한다. 놀이에 탄력받은 아이들은 “오늘만 학원 빠지면 안 되느냐” 눈물을 글썽인다. 5세때부터 영어학원 매일반을 보내는 엄마들. 아이들은 학원과 숙제까지 4시간은 날마다 영어에 바친다. 이제 겨우 초등 2학년인데 수학학원을 매일 가는 아이도 있다. 학습량이 많아 안쓰럽지만 그래도 ‘그동안 시킨 게 아까워서 계속 시켜야한다’는 한 엄마가 그런다. “저번엔 애가 징징거려서 너 지금 영어공부 안 하면 중학교 가서 고생한다고 했더니, 자기는 차라리 지금 놀고 중학교에 가서 고생하겠다고 그러지 뭐야. 기가 막히면서도 마음이 아파서 학원 한 달 쉬게 해줬잖아.”

부자 아빠들이 모여 사는 목동의 아이들. 대형기획사에서 복제되는 아이돌그룹처럼 고만고만하게 자란다. 비슷한 재력과 정보력을 확보한 부모 아래서, 같은 유기농 식재료로 끼니를 잇고, 같은 정관장 홍삼을 먹어가며 피로를 풀고, 같은 학원을 순례하고, 같은 대학과 같은 직업을 준비한다. 기득권이 보장되는 아비의 업을 잇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부모의 AS는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같이 태어나서 같이 죽는다. 목포 온금동 사람들이 그렇듯이 서울 목동사람들이란 말 속에 운명이 죄다 들어있다. 아까 세미나에서 배운 ‘충동과 의지’의 관계가 이것인가. 삶의 조건에 따라 충동이 패턴화 되는 것…집으로 가는 길. 아이가 풀죽었다. “엄마, 나 인형놀이 할래.” “응…” 학원이 밀집한 빌딩숲으로 멀어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딸아이와 나는 둘이서 손잡고 단지쪽으로 향한다. 파란불 깜빡이는 신호등을 지나는데 돌아가지 못하는 강을 건너는 이 기분.

– 은유

응답 1개

  1. 쿠카라차말하길

    무슨 공포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네요. 두렵습니다. 매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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