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사십대 / 고정희

- 은유

사십대 /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 바닥에 침을 퉤, 뱉어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고정희 유고시집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꽃단장 컨셉에 맞추느라 신발장을 지키던 7센티 정통 하이힐 신고 외출했다가 아주 고생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벌겋게 달궈진 발을 따순 물로 씻고 로션을 발랐다. 왠지 뼈랑 힘줄이 툭 튀어나온 것 같아서 발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구겨진 발톱을 폈다. 불과 작년까지 멀쩡히 신어놓구선 저 신발 당장 버릴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 꼴을 아들이 보더니 “그러게 왜 하이힐은 신었어요” 한다. 그 뉘앙스가 꼭 전원일기 김회장이 팔순 노모 나무라는 말투였다. 만으로 14세인 아들이 아직은 만으로 30대인 엄마에게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결정타를 날린다. “엄마는 결혼도 했으면서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요~” 순간 내 표정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아들은 아차 싶었는지 하이힐은 아가씨들이 신는 거 아니냐면서 과학선생님이 발 건강에 해롭다고 했다는 둥 횡설수설 둘러댄다. 그럼 내가 이 나이에 킬힐은 고사하고 효도신발 신으리? 지가 사주던가…하려다가 말았다.

눈에 낀 잡티처럼 나이가 자꾸 거슬린다. 별일이다. 이력서 쓸 일도 없었으니 딱히 그동안은 나이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누가 몇 살이냐고 물으면 그제야 손꼽아 보고 대답했다. 그런데 신체가 신호를 보낸다. 생리주기가 점점 빨라졌다. 30주기에서 28, 25, 23주기까지 바짝 조여온다. 주위에 그 얘길 하면 ‘벌써 마흔이니?’ 놀란다. 선배들 왈 40살부터 생리불순이 시작된단다. 자궁도 늙는다. 미장원에서는 뒷머리 속에 흰머리가 뭉쳐있다고 알려줬다. 한참 수다에 필 받는데 영화제목, 사람이름 등등 고유명사가 목 끝에 걸려서 말문 막히기 일쑤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체부위별로 돌아가며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서 경고등 깜빡인다. 그러니 아아, 어찌 잊으랴. 삶을 교란시키는 그 바이러스 같은 숫자를.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큰 소리 치는 이가 가장 사랑을 갈망하는 것처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자의 뇌리엔 나이가 화인처럼 찍혀있음을 알았다. 신체가 괜히 신호를 보내는 것은 아니리라. 인생 후반전 접어들었다는 호루라기 소리일 거다.

공자의 나이도식에 따르자면 사십줄은 안정권이다. 미혹되지 않음. 그런데 불혹이란 말이 쓰인 것은 유혹이 그만큼 많아서란다. 언론인 김선주도 그랬다. 주위의 남자들이 노선수정 입장변경을 가장 많이 하는 나이가 마흔이더라고. 뭐, 미래는 불안하고 육신은 외로운 가부장감수성 이해한다. 노화론, 변절론이 다가 아니다. 사십대 황금기론도 물론 있다. 나의 스승은 제자의 사십대 진입을 축하하며 지나놓고 보니 삼십대는 어설펐고 사십대가 제일 왕성했다며 향후 십년을 잘 보내라고 격려하셨다. 박완서도 마흔에 소설가로 데뷔했다. 알곡같은 글을 생산했다. 인생후반전 내내 풍작이었다. 상암월드컵경기장 설계한 건축가 류춘수는 심지어 사십대를 두번 산다고 했다. “최소한 예순 살까지는 한 눈 팔지 말고 초지일관 가라. 인생에서 한번쯤 방향전환이 필요한 나이는 60세다. 나도 4년 전 환갑 되던 해 고민했다. 은퇴할까. 세계여행을 할까. 국사공부를 할까. 그러다가 결심했다. 하던 일 하되, 나이를 깎자! 20년. 마흔 다섯이 됐다. 거짓말처럼 힘이 나더라.”

누군가는 4호선으로 갈아타는 나이. 누군가는 우향우 하는 나이. 누군가는 바닥에 외로움을 뱉는 나이. 누군가는 KTX의 속도로 달리는 나이. 누군가는 의자에서 하이힐 벗어놓고 부은 다리 주무르는 나이. 누군가는 노란선 바깥에서 기우뚱 하는 나이. 누군가는 개찰구에서 서성대는 나이. 서울역처럼 다양한 삶이 오가는 사십대 풍경.

– 은유

응답 8개

  1. 이야기캐는광부말하길

    20대는 씨앗을 뿌리는 나이..
    뜨겁게 살아야겠습니다.

  2. 뺑덕어멈말하길

    청초한 40대…운운하던 때가 벌써 10년 전입니다. 아직 저도 만 50이 안 되었는데, 얼마 전에 50견이 와서 화들짝 놀랐습니다. 몸이 가장 정직해요. ^^;; 한의원에 다니고, 통증의학과에 다녀도 여전히 어깨는 시큰거립니다. 오늘 만난 식당 아주머니 왈, 병원에 다녀도 소용없수, 그냥 운동이 최고예요…하신다. 그런가, 그럼, 이제 병원 끊고 요가라도 시작해야 하나. 몇 년 전에 요가를 몇 달하다가 게으름과 끈기 없음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래도 그때는 양손이 뒤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두 손의 만남이 엉덩이에서나 가능하다. 아, 이러한 내 몸과 계속 대화하며 살아야겠지…고정희 샘 시도 좋지만, 은유샘의 안목과 해석 또한 즐겁습니다. 50견 덕분에 잊은 나이를 떠올렸으니 다행인건가요, 뭔가요…

    • 비포선셋말하길

      미루기만 했는데 운동을 해야할까봐요. 청초한 사십대에 이렇게 비실거리는 제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예전에 폐경기 여성들의 갱년기 우울증 얘기 나오면 세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될 것을 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 몸이 약간씩 지멋대로;; 변하니까 정말 삐지는 거 있죠. ㅋㅋ 뺑덕어머님의 오십견도 빛의 속도로 회복되시길!

    • 이현주말하길

      등산이 최고인거 같아요…
      그냥 걷는게 아니고 지쳐서 기절할 정도의 속보 등산입니다.
      몇번하면 나을지도 몰라요.
      얼마전 잠을 잘못잤는지 어깨근처가 많이 아팠는데 일때문에
      이틀동안 험한산을 네번이나 개처럼 헐떡대며 오르내렸답니다.
      그런데 문득 씻은듯이 가셔 버렸어요…
      희한하게도…

  3. 사비말하길

    고정희 시인을 참 좋아하는데 드디어 위클리에도 올라왔네요
    아이- 반가워라.

    은유샘 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팬이예요 (수줍수줍 =ㅂ=;;;)

    • 비포선셋말하길

      저도 수줍^^; 사비님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N게시판에서 봤네요. 아까 저 N에 갔을 때 계셨어요? 알은척 해주시지~ 저 고정희시인 시집 다 있어요. 음하하하~ 너무나 사랑하는 그녀랍니다.

  4. 매이엄마말하길

    아직 만으로 40대가 아니시란 말인가효? 청춘이시군여~ 그러니 하이힐에 미련이 있으신것도 이해가 갑니다…저는 9-11cm짜리 힐들 20컬레 정도를 박스에 담아 현관문 밖에 내보냈답니다. 다시는 보기도 싫고…운동화 신거나 납작한 스포츠 샌들 신고 다니니 만사가 편하다우.

    • 비포선셋말하길

      며칠 전에 구두 다섯켤레 현관밖에 내놨어요. 아직 5센티짜리는 남겨두었답니다.ㅎㅎ 근데 운동화나 스포츠샌달 어울리는 게 더 청춘 같은데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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