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보리/ 이재무

- 은유

보리/ 이재무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서본 사람은
알리라 바람의 속도와
비의 깊이를.
보리밭 속에 들어가
보리와 함께 흔들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정확히 알리라
세상 옳게 이기는 길
그것은 바로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 이재무 시집 <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문학과지성사

선거 전후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냥 다 속상하고 안타깝고 갑갑했다. 적합한 관념을 취하지 못해 심하게 작용 받았다.;; 화병이 났는지 선거 날은 아침부터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침대에 자석처럼 붙어 있다가 오후 2시에 가까스로 투표장에 갔다. 줄이 길었다. 안에서 먼저 투표를 하고 나오던 40대 남자가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반갑게 아는 척이다. 친구인지 이웃인지 간단히 몇 마디 나누더니 가면서 하는 말. “우리 동문 나온 거 알지?” “응. 알아” ‘참내 무슨 대단한 동문이 나왔길래 도대체 누굴 찍으려고 저러나’ 아주 그냥 등판을 꼬집던가 발이라도 걸어서 넘어뜨리고 싶었다. 가진 것들끼리 가진 것을 더 키우기 위해 똘똘 뭉치는 모습은 언제 봐도 불쾌했다. 괜히 심통 나고 심란해서 선배를 불러내 팥빙수 먹으며 두통과 화기를 달랬다.

없는 것들이 없는 주제에 뭉치지 못해서 패배한다는 세간의 논리에 나는 더 선명히 갈라져야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하여 유럽처럼 변변한 진보정당이 없다. 엄혹한 군부독재를 지나며 그저 합리적인 수준에서 상식과 인권을 지켜내기도 어려웠으니 그럴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당구도에서 여야가 다 보수성향의 정당인데 꼴통이냐 아니냐의 구분만 있는 상황이다. 헌데 그간 시민의식은 성장했고 민주주의는 발전했는데 왜 제대로 된 진보세력을 길러내지 못했을까. 김규항의 진단을 빌자면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로 대연합을 해대는 바람에 그렇다. 그 때마다 민주화에 앞장섰던 투사들이 보수당으로 흡수돼 버린 탓이다. 등 따시고 배부른 그들은 진보의 미래는 뒷전이고 반민주세력 규합에만 급급하다.

내 생각은 그렇다. 지더라도 작더라도 더디더라도, 힘없는 백성의 처지를 대변하는 정당, 이를 테면 FTA와 파병같이 없는 사람만 피 보는 현안에 뚝심 있게 저항할 수 있는 진보정당의 힘을 꾸준히 키워내야 한다. 그것이 옳게 이기는 길이다. 진보신당이 도탄에 빠진 민생을 외면하고 교조적이라는 비판들, 노회찬 때문에 한명숙이 졌다는 원망들이 폭포처럼 거세었다. 맥이 풀렸다. 오죽하면 합리적 보수주의자인 시골의사 박경철이 이렇게 말했다. “노회찬 후보를 탓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진보가치를 구현하려던 소수가 있었습니다. 정강정책을 알리는 유일수단인 선거에서 소수이건 다수이건 그것을 박탈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독 정이 많고 화끈해서 선거나 축구나 ‘대동단결’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무리짓기 즐겨하고 소수자에 인색하다. 차분히 씨 뿌리고 기다리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또한 대중의 흐름을 섬세하게 읽지 못해 외면당하고 조롱당하는 것도 정치인 노회찬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다. 많이 배웠다. 비관하지도 냉소하지도 말고 정확하게 인식하라, 그리고 거기서 출발하면 된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되새긴다. 나야 유령당원이고 정당정치에 관여할 여력이 없어서 선거 때만 안달복달이지만, 진보신당이 부디 심상정과 노회찬을 품고 내부적인 성찰을 통해 거듭나도록 마음 보탠다. 바르게 서서 푸르게 생을 사는 사람들의 정당, 보리밭에 들어가서 보리와 함께 흔들리는 방식으로 더 선명하고 유연한 생명력을 갖는 진보정당이 되면 좋겠다.

– 은유

응답 1개

  1. 이야기캐는광부말하길

    바르게 서서 푸르게 사는 자세.
    시를 통해 삶의 자세를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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