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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채호기 시집 <수련>, 문학과지성사
친구가 풀죽었다. 여친이 갑자기 자기를 피한다고. 작년에 둘이 해외로 여행도 다녀왔으나 두 사람 연애사를 지켜본 바로는 위태로웠다. 이런저런 이별의 징후들을 터놓는데 여친 마음은 이미 돌아선 것 같았다. 나는 충고랍시고 일단은 먼저 연락하지 말고 인연의 흐름을 지켜볼 것을 권했더니 얼마 전 명품백 선물해줬다며 서운하고 분한 표정이다. 난 명품백이 한 백만원 정도 하는 줄 알았더니 세배를 상회해서 놀랐다. 사귈 땐 월급 아니라 연봉에다 덤으로 심장이라도 끼워줄 것 같다가, 헤어지면 카드할부금 걱정부터 하는 게 인간의 사랑이다. 원래 혁명의 시간이 가고나면 속물의 시간이 온다. 어쨌거나 나는 사랑 근본주의자의 변을 얘기했다. “정말 사랑하지 않나보네. 그런 게 다 생각나는 걸 보니.” 그가 멋쩍게 웃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제 수위를 회복하듯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어가는 커플들. 삶을 이끄는 것은 습관이므로 사랑-감정은 저 만치 가버렸어도 연인-생활은 가능하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오래 오래. “3년 간의 사랑. 장하다. 자기동일성 해체의 강력한 사건은 사랑 아니면 힘드니까 복된 경험이라고 생각하렴.”
“가을바람 타고 살랑대는 내 얘기 좀 들어봐.” 오밤중에 선배가 들떠 전화했다. “어제 동창모임에서 중3 때 좋아했던 남자애를 처음 봤는데 너~무 멋지게 나이 들었더라. 우리 집이랑 정반대 방향인데 차로 데려다줬거든. 가슴이 떨려서 혼났어. 그리고 너 그애 (선배의 옛날애인) 알지? 글쎄, 오랜만에 메일이 왔어. 장문의 편지로 안부랑 서로의 결혼사진 주고받았거든. 근데 그애가 나보고 미소가 그대로래. 그가 옛날에 나한테 즐겨 쓰던 표현이 있는데, 오랜만에 보니까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니.” 잔뜩 고양된 선배가 레알영어로 말했다. the smile which I loved… 그 문구가 맘에 들어 나도 외웠다. 태엽감긴 인형처럼 선배의 수다는 계속됐다. “난 말이야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할까 궁금하고 자꾸 거울을 보게 되고 말 한마디에 가슴이 뛰고….” “알지. 그 살 떨리는 집중.”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오는 사랑.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가는 사랑. 우리의 사랑 뒷담화는 밤이 저물도록 이어졌다. 사랑에 대해 할 말 많은 계절. 사랑이 왔다 갔다 하는 분주한 가을.
지금 소규모 아카시아밴드 노래가 나오고 있는데
글하고 참 잘어울려요.
따뜻한 볕아래 있는 기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