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사랑은 / 채호기

- 은유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 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 채호기 시집 <수련>, 문학과지성사

친구가 풀죽었다. 여친이 갑자기 자기를 피한다고. 작년에 둘이 해외로 여행도 다녀왔으나 두 사람 연애사를 지켜본 바로는 위태로웠다. 이런저런 이별의 징후들을 터놓는데 여친 마음은 이미 돌아선 것 같았다. 나는 충고랍시고 일단은 먼저 연락하지 말고 인연의 흐름을 지켜볼 것을 권했더니 얼마 전 명품백 선물해줬다며 서운하고 분한 표정이다. 난 명품백이 한 백만원 정도 하는 줄 알았더니 세배를 상회해서 놀랐다. 사귈 땐 월급 아니라 연봉에다 덤으로 심장이라도 끼워줄 것 같다가, 헤어지면 카드할부금 걱정부터 하는 게 인간의 사랑이다. 원래 혁명의 시간이 가고나면 속물의 시간이 온다. 어쨌거나 나는 사랑 근본주의자의 변을 얘기했다. “정말 사랑하지 않나보네. 그런 게 다 생각나는 걸 보니.” 그가 멋쩍게 웃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제 수위를 회복하듯 지리멸렬하게 관계를 이어가는 커플들. 삶을 이끄는 것은 습관이므로 사랑-감정은 저 만치 가버렸어도 연인-생활은 가능하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오래 오래. “3년 간의 사랑. 장하다. 자기동일성 해체의 강력한 사건은 사랑 아니면 힘드니까 복된 경험이라고 생각하렴.”

“가을바람 타고 살랑대는 내 얘기 좀 들어봐.” 오밤중에 선배가 들떠 전화했다. “어제 동창모임에서 중3 때 좋아했던 남자애를 처음 봤는데 너~무 멋지게 나이 들었더라. 우리 집이랑 정반대 방향인데 차로 데려다줬거든. 가슴이 떨려서 혼났어. 그리고 너 그애 (선배의 옛날애인) 알지? 글쎄, 오랜만에 메일이 왔어. 장문의 편지로 안부랑 서로의 결혼사진 주고받았거든. 근데 그애가 나보고 미소가 그대로래. 그가 옛날에 나한테 즐겨 쓰던 표현이 있는데, 오랜만에 보니까 왜 이렇게 가슴이 설레니.” 잔뜩 고양된 선배가 레알영어로 말했다. the smile which I loved… 그 문구가 맘에 들어 나도 외웠다. 태엽감긴 인형처럼 선배의 수다는 계속됐다. “난 말이야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할까 궁금하고 자꾸 거울을 보게 되고 말 한마디에 가슴이 뛰고….” “알지. 그 살 떨리는 집중.”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오는 사랑. 미처 못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가는 사랑. 우리의 사랑 뒷담화는 밤이 저물도록 이어졌다. 사랑에 대해 할 말 많은 계절. 사랑이 왔다 갔다 하는 분주한 가을.

응답 1개

  1. 사루비아말하길

    지금 소규모 아카시아밴드 노래가 나오고 있는데
    글하고 참 잘어울려요.
    따뜻한 볕아래 있는 기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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