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11호] 여성에 관하여 / 최승자

- 은유

여성에 관하여

 

여자들은 저마다의 몸 속에 하나씩의 무덤을 갖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땀 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죽은 바다처럼 여자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탄생의 껍질과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죽은 바다를 거쳐야만 한다.

– 최승자 시집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여성암 무료검진을 받으라는 통지서가 서울시에서 왔다. 작년 가을 즈음에. 기한이 12월 31일까지였다. 병원 가는 일이 좋을 리 없다. 특히 산부인과. 애 낳고 병원을 한 번도 안 가봤다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김점선 화가를 생각했다. 또 무료 건강검진을 받지 않다가 암에 걸리면 보험 혜택이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8년 전 애 낳고 진료실 출입이 1회도 없었던 나는, 아직 에미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새끼를 둔 나는, 목돈 모아둔 적금 통장이 없는 나는, 아파도 돌봐줄 친정엄마가 없는 나는 여러모로 검진을 받아야했다. 귀찮아 미루다가 12월 30일에 갔다.

병원 대기실이 미어터진다. 뒤에서 보니 노인학교 강당이다. 백발성성 할머니 할아버지. 그 틈에 있으려니 내가 최연소 귀염둥이;;;다. 적막이 흐르는 대기실에 또 다른 젊은 여성이 등장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온 딸이다. 삼십대 초반 정도 됐을까.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간호사 지시에 따라 2층 진료실로 3층 검사실로 아버지를 수행한다. 몸놀림도 날래다. “이리 오세요. 아빠.” “아빠, 여기에요.” 아버지 수발드는 싹싹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할머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웅성웅성 한마디씩 던지신다. “이래서 딸이 있어야 돼!” “아들은 남이야. 장가가면 뺏기는 거라고…” “아들이 무슨 소용이에요~ 요즘은 딸이 최고지~”

며칠 전 남편이 퇴근길에 우편물을 잔뜩 들고 왔다. 검진 받은 병원 것도 있었다.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펴봤다. 자궁경부암 검진 결과통보서. 결과는 class2. 반응성세포변화. 6개월 후 정기검진 요합니다. “남편, 이게 뭐야? 암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음..암은 아닌데 완전 정상도 아니네. 정상은 2년마다 받는데 6개월 후에 오라잖아. 근데 별건 아닌 거 같아.” 둘이서 그런 얘길 무심히 주고받았다. 당장 정밀검사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니까 일단 됐다고 생각하는 중, 아들이 인터넷에서 확인해보고는 “괜찮은 거래요.”라고 결론을 내린다. 나는 부엌에 가서 저녁밥을 하는데, 어째 아빠만 오면 흥분하는 딸내미가 조용하다.

뭐하나 싶어 봤더니 마루 구석에 뒤돌아 서서 고개를 숙인 채 ‘검진결과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어른도 판독불가인 그것을 아이가 해석해 보려고 애쓰는 거다. 뭉클했다. 모른척 말을 걸었다. “꽃수레(딸의 애칭) 뭐해?” 아이가 고개를 든다. 멋쩍은 표정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말한다. “엄마, 커피 너무 많이 마시지마. 몸에 안 좋대…” “어머, 우리 꽃수레, 엄마가 암에 걸릴까봐 걱정 되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흐앙 울어버린다. “엄마한테는 꽃수레밖에 없구나…….” 서로의 몸 속에 무덤을 보아버린 엄마와 딸은 웃다가 울다가 울다가 웃었다.

– 은유

응답 5개

  1. 연초록말하길

    지금 파리에 공부하러 가 있는 딸아이와 070으로 자주 통화를 합니다.

    그런데 통화가 시작될때는 엄마,그렇게 큰 소리로 부르는 아이가

    전화를 마칠 때즈음에는 목소리가 줄어들곤 하지요.이상해서 물어보니

    그냥,별 일 아니야라고 하더군요.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생각하곤 하지요.

    얼마나 질긴 인연인가,이 아이와 나는

    언젠가 너무 아파서 그냥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몸에서 전혀 에너지를 못 느끼던 날

    그래도 아이가 돌아와서 얼굴이라도 보고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지요.

    이승을 떠날 때 발목을 잡는 것은 역시 아이들일까요?

    아니면 더 이상 듣지 못하는 음악소리일까요? 가끔씩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 비포선셋말하길

      이승 떠날 때 아이, 음악, 책이 삼발이처럼 발목 잡을 거 같아요. 저도 음악 없인 못살아요. 어릴 때부터 ‘기타 잘 치는 남자’를 이상형으로 꼽았다죠. ㅋ 남편이 기타 치고 아들내미도 열여섯인데 지금까지 피아노 배워요. 오늘 아침에도 즉흥환상곡 치고 학교가더라고요. 아, 음악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그 생각을 하면 코끝이 싸해지고…^^ 연초록님 따님이 목소리가 작아진다니….전화 끊을 때마다 가슴 아프시겠어요..ㅠㅠ 딸아이 보면 탯줄이 언제나 끊어지려나 싶어요.

  2. 안티고네말하길

    꽃수레라니, 정말 이쁜 별명이네요~ 꽃수레가 흐앙 울어버렸다는 대목에서 살짝 마음이 찡해집니다

    • 비포선셋말하길

      원래 ‘꽃방스’였는데 뚱뚱한 느낌;;이라 싫다며 자기가 새로 지은 별명^^ 꽃이 잔뜩 담긴 수레, 꽃수레.. ㅎㅎ

    • 둥근머리말하길

      자기가 직접 짓는 별명.. 그 발상만으로도 참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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