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시집

신해욱,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 은유

일 년에 0.5kg씩 꾸준히 자연증가세를 보이는 몸무게에 비례해 못 입는 옷의 중량도 늘었다. 옷이냐 살이냐. 둘 중 하나는 버려야 한다. 옷은 쉽고 살은 어렵다. 결단에 순간에는 아무래도 만만한 쪽을 택하게 된다. 체형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의류정리를 단행했다. 수년간 서랍에서 잠자던 옷가지를 추렸다. 빛바랜 옷들이 무지개떡처럼 층층이 쌓였다. 그것들을 보노라니 잠시 추억이 회오리쳤다. 처음 사서 쇼핑백에 담아올 때는 금지옥엽, 입을 때는 김칫국물 묻을 까봐 조심조심, 보관할 때는 드라이클리닝 비닐에 고이간직. 그래봤자 버릴 때는 다 똑같다. 각각의 고유성과 개별성은 사라지고 일괄폐기 처분한다. 연심의 변심. 그 요란한 과정을 묵묵히 당해야 하는 옷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지도 모르겠다. 멋쩍고 미안해도 안녕은 안녕. 아파트 앞 대형 우체통처럼 생긴 의류함 입구에 옷을 투입하니 우르르 퉁퉁 떨어진다. 짧은 울음 같기도 하다. 투명한 생물성의 울림. 인연이 멸하는 소리.

일요일 아침 일찍 전화가 왔다. 비통한 어조. 남자친구랑 헤어졌다고 한다. 부부보다 더 오래 살 것 같은 짝이었다. 이혼보다 더 충격으로 다가온 소식을 들은 나의 첫 마디. 너 밥은 먹니? 못 먹어서 살이 6kg이나 빠졌단다. 역시 체중감량에는 마음고생만한 게 없다. 사람이 나간 자리만큼 몸도 비워진다. 왜 헤어졌는지 이유를 들었다. 몇 가지 사건과 신상의 변화를 언급한다. 남자의 이기심에 질렸다, 생일인데 문자도 안 온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원망과 회한의 말들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시점과 시제의 이탈, 논리의 비약이 더해진 이야기. 조금 헷갈렸다. 원래 이별한 사람은 문법에 맞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김수영) 나타나는 왜곡과 혼란과 과잉의 정서가 바로 슬픔의 실체다. 내가 아는 그 남자친구는 진중하다. 나로서도 지금 상황이 믿기지도 이해되지도 않았지만 일단 그 애가 남겨진 것은 사실이므로, 남자들이란 자기밖에 모른다, 정말 너무하다고 맞장구쳤다.

나는 뺄셈에 약하다
남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 <따로 또 같이> 부분

만남의 불가피성이 있다면 헤어짐의 불가피성도 있다. 그래도 살뜰한 7년 세월이다. 체형에 맞게 늘어난 청바지처럼 서로에게 잘 맞춰진 사이였다. 어제까지 입던 옷이 오늘 불편해진다는 것은, 청바지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물은 유전한다. 헤라클라이토스의 말을 살짝 바꾸면 “같은 청바지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 한 시절 편안하고 맵시 있게 입었더라도 옷은 낡고 체형은 늘고. 그리하여 어느 날 몸에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때가 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의 시점이 온다. 연심의 변심 혹은 절심은 언제나 비약으로 다가오는 사건이지만 생물성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 나도 그랬다. 어디든 데려다주는 날개이자 비바람을 막아주던 존재가 불편하고 갑갑해지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엄마가 그랬고 연인이 그랬고 친구가 그랬고 동료가 그랬다. 어떤 음악이, 어떤 책들이 그랬다. 세월이 그렇게 했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 식물도감 동물도감 속 개체들처럼 사람 역시 멋진 자기유지를 위해 색을 바꾼다. 인연의 옷 갈아입는다. 이 끝나지 않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그저 막 입고 막 버리지는 말자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응답 1개

  1. 달타냥말하길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 당연한 듯한 말인데…이렇게 시와 함께 만나니 새롭게 다가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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