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최전선

지안, 대한민국 고3의 외부를 꿈꾸다

- 신다영

#0.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12년 6월 14일 저녁 6시 50분. 홍대입구역 3번 출구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지잉”하고 손에 든 핸드폰이 울린다. 내달리다 시피 걷고 있는 발걸음이 꼬일까 주의하면서 황급히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전에 교육학 세미나 하던 방으로 오시면 돼요~] 역시 먼저 와 있구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오늘도 회색빛 교복치마 차림으로 연구공간 수유너머N에서 저녁을 먹은 후, 공부방에 앉아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를 읽고 있을 지안의 모습을.

약속시간인 7시를 조금 넘겨 가까스로 수유너머N 세미나실에 도착했다. 과연 지안의 독서대 위에는 맑스의 『독일이데올로기』가 그 옆에는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가 놓여있었다. 제목도 두께도 모두 심상치 않다. 자리에 앉으며 책이 엄청난데요, 하고 말을 건네자 지안은 씩 웃으며 지금 참여하고 있는 두 세미나의 텍스트라고 답했다. 특히 『독일이데올로기』는 현재 그녀가 수유너머N에서 공동반장으로 진행하고 있는 ‘자본 세미나’의 텍스트 중 하나란다. 지난주에 발제를 맡아 핫식스를 마시고 밤새도록 『독일이데올로기』를 읽고 또 읽으며 발제문을 쓰느라 죽는 줄 알았다는 지안의 얼굴에는 피곤이 아닌 즐거움이 반짝였다. “요즘 세미나 책들이 좀 재미없었는데, 맑스 덕분에 살았어요. 진짜 어렵긴 한데, 맑스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세상에,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 맑스를 매력적이라고 한다. 어쩐지 바짝 긴장하는 내가 있다. “삶이 지겨워서 외부를 창출해 보고자 여러 활동을 하다 수유너머에 왔다”며 자신을 소개하는 지안. 근대성과 자본에 대해 공부하고 간간히 영화도 찍는다는 열아홉의 그녀가 새로이 만들고 싶은 삶의 외부는 어떤 모습일까.

#1. 김지안을 소개합니다

김지안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열아홉 살 여고생이다. 학교 마크가 찍히지 않은 흰 양말 좀 신었다고 난리치는 학교가 ‘찌질하게’ 보이고, 삶에 어떤 단계를 부여하려는 기성세대의 논리가 ‘분통터지고 빡치는’ 활화산 같은 소녀다.

“삶이 지겹다는 건 중학교 때부터 느꼈어요. 어떤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늘… 선생님들 보면 저 사람들도 우리랑 똑같이 이렇게 공부하다가 대학교 갔다가 어느 날 선생님 되는 거겠지. 우리의 미래랄까, 그렇게 보였어요. 학교, 졸업, 학교, 졸업, 취직, 결혼. 뭐, 결혼도 결혼만 하면 안 되고 아이를 낳아야만 사회적으로 어른이 되는 거고, 이런 시선들, 이런 단계 들이 주어지는 삶.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너무 분통 터지는 거예요. 주체가 사라지는 거니까. 그게 빡쳐서 제가 말을 하면 기성세대는 나름의 논리로 그 단계들이 왜 필요한지 설명해요. 그런데 제가 논리적으로 딸리니까 뭐라 반박할 수가 없더라고요. (기성세대의) 논리를 깨고 싶어서 책을 읽었어요.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를 중학교 때 처음 읽었죠. 학교가 왜 필요하지 않은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겠어, 이런 느낌으로요(웃음).”

‘왜 단계적으로 살아야만 하는지 화가 나서, 내 욕망은 대체 누구의 욕망인지 알고 싶어서’ 지안은 닥치는 대로 온갖 책을 읽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활자만 읽는 것에 가까웠지만 『광기의 역사』, 『노마디즘』, 『나쁜 사마리아인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등,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에 계속 손을 뻗었다. 열아홉 살, 대한민국에서 산삼보다 한 급 위라는 고삼인 지금도 그녀의 독서는 변함없다. 학교에서 수능문제집을 풀거나 수업을 듣기보다는, 신문을 읽고 세미나에서 사용하는 책을 읽는다. 그녀의 자유로운 책읽기를 허용해 주지 않는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잠을 잔다. 학교가 끝나면 수유너머N에 와서 밥을 먹고,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산책하고, 공부한다. 이런 지안에 대한 선생님들과 주변 친구들의 반응은 어떨까.

“선생님들이 2학년 때까지는 터치 안 했어요. 당연히 수능보고 학교 공부할 아이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윤리나 사회 계열 선생님들은 자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고 제가 책 보는 걸 인정해주는 편이었어요. 하지만 어떤 선생님들은 절 ‘또라이’로 봤죠. 웬 녀석이 물(공부분위기)을 흐리나 하고요. 친구들하고는 잘 지내요. 제가 워낙 노는 걸 좋아해서. 아, 하지만 요새 친구들이 장난으로 저랑 떨어져 있고 싶단 소리를 자주 해요. 저랑 있으면 자기도 대학가기 싫어진다고(웃음).”

지금은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리지만 고등학교 1학년 초입만 해도, 지안은 친구들 사이에서 ‘쟤는 맨날 책 읽고 신문 보는 애’로 통했다. 어떤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6개월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지안 또한 같은 반 아이들에 대해 ‘쟤들은 다 대학가고 싶어 하고 입시가 최우선인 삶을 사는 애들’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6개월 후 지안과 친구들 사이의 벽을 뚫어주는 뭔가가 ‘빵’ 터졌다. 그 다음부터는 친구들이 정말 많이 생겼다. 친구들과 놀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아이들도 꼭 입시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친구들에게도 나름의 꿈과 생각이 있었고 그녀처럼 억압적 환경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다만 눈앞에 입시가 놓여 있어서 그 수많은 생각들을 유보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국회에 청소년당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나왔는데 아이들이 모두 지안더러 당대표를 하라고 했단다. 지금처럼 억압된 물리적 환경에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이야기하라면서 말이다. 이래저래 주변에서 지안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모양이다.

#2. 수유너머N, 새로운 공부의 길을 트다

기성세대의 권위와 억압적 삶을 거부하는 지안에게 학교 교육 현장이 썩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녀가 꼽는 가장 큰 불만은 너무 편향적으로 가르친다는 점과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이 권위주의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서 사회문화 같은 과목에서는 ‘맑스는 위선자다.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했다.’이렇게 가르쳐요. 그리고 아이들은 그 이야기만 듣고서는 아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죠. 그런데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했다는 결론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 결론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중요한 데, 다들 그저 ‘맑스는 퇴물’ 이렇게 편향적으로 생각하고 끝이에요.”

“배움이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게 효율적일 수는 있죠. 그런데 지금 학교교육은 그냥 누가 얼마나 더 잘 외우거나 (요점을) 더 잘 뽑아내거나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제가 볼 땐 그 원주율 3.14 어쩌고 하는 소수점 숫자들 외우는 거나 사회문화 외우는 거나 똑같아 보여요. 누가 더 많이 외우나 그게 전부에요. 진정한 배움도 없으니 남는 것도 없어요.”

지안이 생각하는 진정한 배움은 일단 배우는 사람도 동등한 발언권이 있을 때 시작된다. 자신이 가치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할 기회가 없는 지금의 교육현장이 싫다. 교사가 말하면 그저 듣고 교과서에 밑줄 치는 일은 3.14어쩌고 하는 원주율을 무작정 암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나를 알더라도 다양한 측면에서 깊이 관찰하고 여러 사람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배우면 열을 알게 된다는 게 지안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할 때 훨씬 배움의 깊이가 더해진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유너머를 알게 된 건 그녀에게 새로운 공부의 길을 틔워준 행복한 인연이다.

“고 1때 진짜 배움을 찾고 싶어서 인터넷 사이트를 마구 뒤졌죠. 그때 다중지성의 정원이나 다른 연구실들을 알게 됐는데 직접 찾아가진 않았어요. 그냥 계속 책만 읽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고미숙 선생님, 고병권 선생님, 이진경 선생님 책들을 무작위로 읽었는데, 하나같이 다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한다고 적혀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곳은 어떤 곳일까 궁금했고 수유너머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지안이 수유너머를 처음 방문했던 건 2010년 김윤식 선생님의 문학 특강이다. 이후에 2011년 1월에 수유너머R에서 잠시 ‘데리다 세미나’에 참여했다가 2011년 12월 수유너머N에서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세미나를 기점으로 ‘눌러 앉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 영어 수학보다 사회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가 더 중요하고 궁금한 지안이다. 수유너머N에서 하는 공부는 그녀의 문제의식을 끝까지 파고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보람차고 즐겁다. 지안은 그녀가 느꼈던 개인적인 억압의 문제로부터 이제는 이 사회의 근대성과 자본으로까지 문제의식을 확장시켰다. 그녀가 맑스에 유달리 ‘꽂히는’ 까닭은 맑스가 지닌 문제의식이 딱 그녀가 알고 싶었던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문제의식을 파고드는 방법이 정말 과학적이기 때문이란다. “보자마자 딱 이거다 싶었어요. 맑스를 공부하면 내 억압의 계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웃음).”

#3. 영화, 그녀가 걸어가는 길

지안의 삶에서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중학교 1학년 때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1954)>을 보고 고전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다. 1년 동안 히치콕 영화와 더불어 여러 영화들을 홀로 찾아보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CA(방과 후 특별활동)로 고전영화 반에 들어갔다. 영화를 체계적으로 봐야겠다는 생각, 고전영화를 한번 끝까지 파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아직도 그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나요. 고전영화 반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을 보여줬어요. 저는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었죠. 완전 푹 빠져서. 그러다 잠시 옆을 돌아봤는데 진짜 모든 아이들이 자고 있는 거예요. 수면제라도 먹은 것처럼 완전 푹 퍼져서는. 그 순간 ‘내가 추구해야 할 게 이거구나’ 하고 느꼈죠.”

그전까지는 지안은 영화를 직업과 관련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영화를 보는 게 좋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깨달으면서 ‘내 관심사가 여기 있구나. 나는 내 길을 찾았어!’라는 운명적인 느낌이 왔다. 그 때 본 <라쇼몽>은 아직도 그녀가 꼽는 내 인생 최고의 영화다. 심지어 그 <라쇼몽>의 이미지를 깨고 싶지 않아 구로사와 아키라의 다른 영화는 보지 않을 정도다.

중학교 때 지안이 영화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부모님은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제가 워낙 사춘기를 심하게 보냈거든요. 누가 건드리면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아마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나 봐요. 공부하라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내가 안하니까(웃음).” 도리어 그녀의 꿈을 꺾으려는 기성세대의 차가운 반응은 다른 곳에서 왔다. 외가의 친척들로부터다. 중학교 2학년 때 여러 외가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의 진로가 화두에 올랐다. 당당하게 영화를 찍겠다고 말하는 지안에게 외가어른들은 그거 아무나 하는 줄 아냐며 현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영화계가 얼마나 어렵고 돈 못 버는 줄 아냐는, 어린 녀석이 뭘 그렇게 잘 알겠냐는 ‘어른들의 논리’였다.

“그 당시엔, 아니 지금도 정말 기분 나빠요. 물론 중학교 2학년이 어린 건 맞죠. 지금의 저도 어리구요.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초등학생들도 현실은 다 알아요. 영화 쪽 어렵고 돈도 못 벌고 실현(성공) 가능성이 다른 분야보다 힘들다는 것도 알죠. 다 알고도 내가 해보겠다는데. 그리고 만약에 진짜 내가 (성공)못한다 하더라도 중학생이 나 영화 할 거예요, 하고 말하는데 거기서 그렇게 물어뜯을 건 뭐람. 그때 진짜 결심했죠. 철학이랑 영화, 이 두 개를 파고들어서 다음에 외가에 갈 때, 이 사람들을 (논리로) 다 쓰러뜨리겠다, 라는 결심이요. 진짜 그때 펑펑 울면서 결심했었어요.”

‘현실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왜들 그렇게 그 현실만 말하는지 모르겠다.’어른들의 논리를 거부하는 지안의 말이다. 그녀는 일단 대학부터 가고 난 뒤에, 라는 우회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지안은 꽉 막힌 현실을 온 몸으로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집에 있던 DSLR 카메라를 들고 삼각대 하나를 산 다음, 무작정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히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찍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나이 때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무작정 시도했다. 지안이 카메라에 담으려 하는 그녀만의 풍경은 그녀와 같은 열아홉 살 내지는 그 또래 친구들이 발붙이고 있는 (교육)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그와 동시에 그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외부를 뚫으려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강하게 외치고자 한다.

“‘고등학생이 고등학생의 현실을 알리겠다.’와 ‘스무 살이 고등학생의 현실을 알리겠다.’ 는 다른 일이에요. 지금 제가 고등학생이니까 고등학생의 현실을 고발해야겠다 싶어서요. 다큐멘터리는 이렇게 인터뷰하는 식으로 해서 주로 혼자 찍어요. 스텝이 추가되면 저녁때 자꾸 밥을 사줘야 해서(웃음). 열아홉 살 한명이 다른 열아홉 살들의 삶을 찍는데 의미가 있기도 하구요. 방학 때는 분당에서 완전 1등으로 알아주는 개깡패를 찍으러 가기도 했고, 우리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친구도 찍었고, 2년제 실업계 학교를 졸업하고 벌써 네일아트샵에서 일하는 친구도 찍었어요. 똑같은 열아홉 살인데, 혹은 그 또래인데,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요.”

새하얀 눈길 위로 오롯이 난 하나의 발자국은 외롭다. 그러나 그 옆으로 모양도 크기도 다른 여러 발자국들이 찍히면 더 이상 어떤 발자국도 외롭지 않다. 단편영화를 찍으려 할 때 지안에게는 어떤 네트워크도 없었다. 이번에 그녀가 찾은 돌파구는 인터넷이었다. 청소년 영화 사이트들을 쫙 검색해 ‘이런 영화 찍을 건데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은 연락해 달라’는 글을 삼사십 개쯤 올렸다. 그랬더니 기대 이상으로 열 대명도 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연락을 해왔다. 청소년들도 있었고 스물여섯 살의 성인도 있었다. 함께 영화를 찍었던 사람들은 그 중 10명 정도였지만 그때 연락이 닿았던 사람들과는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단편영화의 주제는 기득권으로부터 탈주하려고 시도하지만 이미 욕망은 기득권에 예속된 상태에서 모순을 느끼는 소녀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실로 기성세대의 억압을 거부하는 그녀다운 주제였다.

지안은 꾸준히 영화인들의 네트워크에 접촉하고 있다. 작년부터 올해 8월까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진행되는 잉 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를 연구하는 포럼에도 참여하고 있다. 포럼에는 영화과, 심리학과, 철학과 등 다양한 전공에서 온 교수들이 함께 참여해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진행한다. 그날의 포럼에 어떤 교수가 참석하느냐에 따라 베리만 감독 영화의 음향에 대해 다루기도 하고, 영화 내용 속에 담긴 철학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세미나니까 모두에게 동등한 발언권이 있긴 한데, 살짝 교수들에게 발언권이 쏠리는 경향이 있어 좀 그렇다고 웃는 그녀다. 또 작년에는 ‘미디어 대전’이라는 청소년 영화제에서 스텝으로 뛰기도 했다. 청소년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출품된 영화나 상영작들을 보았는데, 어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바라는 어떤 예쁜 상(像)이 있는 것 같더란다. 함께 일했던 영화제 스텝들이 제출한 영화들은 전혀 상을 받지 못했다며 그녀는 조금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청소년들이 가지는 도발성이 살짝 보이면서도 기존의 틀은 벗어나지 않는 심사위원의 상(像)을 어떻게 깰 수 있을지, 요새 그런 고민을 많이 해요.”

#4. 대학교(大學校)가 아닌 큰 배움(大學)을 꿈꾸는 그녀의 미래

지안은 내년 봄 대학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난 몇 달간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영화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대학에 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지안은 담담히 ‘한동안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제도권을 완전히 탈피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에요. 단지 내가 지금껏 12년 동안 제도권 교육 속에 있었으니 여기서 떨어져 나와 있는 시간이, 내가 예술가가 되려면 그런 시간이 필요하겠다고 느꼈어요. 한동안 그 시간을 설정해 두고 싶은 거예요. 물론 언젠가 다시 제도권으로 회귀할 수도 있겠죠. …지금은 (대학에 간다면) 철학을 전공하고 싶어요. 그 이후에 석사과정으로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고 유학을 갈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해요.”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정에 지안의 부모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지 궁금했다. 이번에도 부모님은 그녀가 처음 영화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처럼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을까. 지안에게도 그 부분은 여전히 풀다 만 수학문제처럼 영 미적지근한 모양이었다. “부모 산성을 뛰어넘지는 못했어요. 계속 지연시키고 있는 상태랄까.”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지안은 부모님이 분명하게 입장을 알려주면 좋겠다. 그래야 상호간에 대화가 되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그저 화난 상태로 대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니 그녀로서는 답답하기만 하다. 지안이 ‘나 대학 안가’라고 말하면 부모님은 ‘그래, 가지 마라’라고 답하면서도 뒤에서는 모종의 멸시를 보내시는 것 같단다. 강남8학군에서 자신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엄마를 이해하긴 하지만 그렇다한들 지안은 그녀의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다.

“저는 부모님이 ‘너 나가’라고 말하는 건 무섭지 않아요. 엄마가 저를 밧줄로 꽁꽁 묶어놓지 않는 이상에야 제가 가겠다는 길을 막을 수는 없잖아요? 많은 아이들이 여기서 꺾이는 데 그래도 엄마 말씀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거기서 오는 무서움 때문으로 보여요. 하지만 나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그런 상황을 무수히 많이 겪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엄마가 무섭지는 않아요. 다만 돈이 좀 무섭죠(웃음). 경제적 독립이 돼야 진짜 부모님을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까.”

대학교로부터 자유로워진 지안이 내년에 하고 싶은 일은 다양하다.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진행될 다양한 영화 포럼에도 계속 참여할 생각이고 기왕이면 포럼 전담 큐레이터나 영화제 큐레이터 등으로도 활동하고 싶다. 큐레이터가 되면 영화 세미나 진행도 가능하니 다양한 사람들과 영화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또 영화 새싹들의 로망이라는 전주 영화제 스텝으로 활동할 마음도 품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지안 자신의 영화작업이다. “정말 제대로, 진짜 깊게 하고 싶어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영화를 찍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대학을 가지 않는다면 당분간 물리적으로 자신을 가로 막는 것이 없을 테니 스무 살의 젊음만 믿고 영화에 한번 제대로 빠져볼 생각이다.

“영화 찍는 걸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은 꼭 대학이 아니어도 있어요. ‘미디엑트’라는 곳처럼 일정 금액을 받고 가르쳐주는 데도 많죠. 예전에 잠깐 영화동아리에 들었던 적이 있는데 그런 곳에서도 배울 수 있고요. 하지만 전 저랑 같이 단편 영화 찍었던 친구들하고 모여서 수유너머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서 영화를 공부해보고 싶어요. 스무 살의 패기로요.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그냥 ‘쌩으로’ 부딪히면서 알아가는 것도 의미 있지 않겠어요?”

지안은 열아홉, 스무 살 영화인의 공동체를 꿈꾼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영화를 꿈꾸는 젊음들이 조금씩 그녀 곁으로 모여들고 있다. 일전에 단편 영화를 찍을 때, 영화 캠프 스텝을 했을 때,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포럼에 참가했을 때, 지안은 영화를 찍고 싶은 친구들을 만났고 그들과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심지어 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지안을 찾아와서 자신도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단다. “진짜 영화 찍고 싶다고 하는 애들은 서로를 알아봐요. 함께 할 사람들을 만날 경로는 다양한 것 같아요.”

앞으로 지안은 근대성을 키워드로 그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영화를 찍고 싶다. 예술의 힘은 기성의 힘이나 관념을 부정하는 전위성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살짝 아방가르드한’ 예술 영화를 지향한다. 화면 가득 자신이 전위시키고자 하는 주제를 세련된 연출로 담아내는 게 그녀의 꿈이다. 언젠가 그녀만의 색깔이 듬뿍 담긴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를 기대한다.

응답 2개

  1. 아리무말하길

    정신이 확 드는 글 잘 읽었어요.

    홀로 아무도 모르는 역에서 내린다면 두려울 꺼에요.
    하지만 점점 지안씨와 비슷한 (그렇지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홀로 아닌 함께 일 때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요.
    저항의 의미에서 ^^*

    지나가다 글 읽지만,
    언젠가 지안 이라는 감독의 작품을 꼭 보러갈 겁니다.

  2. 상군말하길

    진짜 대단하신분같아요.
    돈은 참.. 그래요 무섭죠..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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