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최전선

홍은전 노들야학 교사 – 온갖 일 겪고보니 너에게 미안해

- 박진영

토요일 저녁 6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몇 년 만에 와보는 시청은 쌍용자동차 희생자추모제가 한창이다. 집회 현장은 난생 처음 와보는 소심한 나였다. 빨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해고는 살인이다’ 외치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을 헤집고 지나가기가 망설여진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대형 스크린 쪽은 백 미터 남짓 앞이다.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마이크를 타고 울리는 집회 발표자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틈새로 수화기 너머 그녀의 말이 겨우 들린다. 사람들을 뚫고 가기가 힘들 것 같다는 내 말에 그녀는 부드럽게 격려한다. “그냥 천천히 지나오면 돼요.”

夜學? 野學!

홍은전은 노들법인의 사무국장이자 노들장애인야학의 국어교사이다. 노들은 노란들판의 준말로 농부의 노동이 녹아난 들판에 넘실대는 결실을 의미한다 했다. 드넓은 들판에서 누구라도 소외받지 않도록 노들은 1993년 장애성인교육을 일차적 목표로 설립되었다. 1 더하기 1이 2라던가 한글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가르쳐 검정고시 치게 하고 대학 보내는 일이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다. 힘 있는 교육은 장애인 인권 투쟁에 현실적 도움을 주었다.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과 집 밖으로 나왔다. 장애인활동가가 장애인운동주체를 길러낸 것이다.

“어릴 때 꿈은 사회선생님이었어요. 고2때 역사다큐멘터리에서 6.10항쟁을 보고 가슴에 울림이 왔어요. 화면에서 데모하는 선배들을 보고 있자니 온 몸이 떨려 왔어요.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학생이라면 저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옳은 일을 위해 사회를 향해 소리쳐야 한다고. 대학은 한양 사범대 국어교육과로 갔는데 학교나 과 자체가 워낙 운동권 색깔이 강했어요. 자연스럽게 집회나 시위에 많이 참가했죠. 운동권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느끼게 되는 공동체 의식이 좋았어요.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우리 학교 총학은 한총련 소속이었는데 통일 관련이나 미군 범죄에 대해 자주 얘기했어요.”

선생님이 꿈이었지만 대학 4학년이 되니 막막해졌다. 임용고사를 치기 위해 노량진으로 가 짧으면 1년 길면 몇 년씩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했다. 제도권 내의 학교에서 일할 자신도 없었다. 홍은전에게 고등학교는 선착순 달리기였다. 체육시간에 선생이 갔다가 돌아오는 달리기를 시켰는데 한 차례 끝날 때마다 꼴찌를 탈락시켰다. 내 뒤에 아직 몇 명은 더 있구나 안도하며 홍은전은 달렸다. 나를 꼴찌 아니게 만들어 줄 그 누구를 보며 그녀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홍은전은 본인을 ‘아주 소심한 사람’이라 말한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내 번호와 같은 날짜인 날은 학교 가기가 끔찍이 싫었어요. 수업 시간에 발표 시키니까요. 하기 싫은데 억지로 일어나 말해야 한다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였죠. 나는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못하는 사람이에요. 임용고사 치고 학교에서 일했으면 다른 교사처럼 그렇게 순응하며 살았을 것 같아요. 전교조 같은 것도 안 했을 거예요. 매일 봐야하는 사람들 눈치 살피며 내 소신대로 일하는 피로를 견딜 자신이 없어서요.”

스트레스 받으면 곡기부터 끊는 못된 습관이 있는 그녀는 대학 4학년 여름, 밥도 끊고 말도 끊었다. 졸업 후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사회단체나 정당에 들어가기엔 그 거창한 이름이 부담스러웠다. 홍은전은 그저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좋은 선생님이란 권위 없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홍은전이 드디어 입을 뗀 건 ‘노들야학’을 알고부터이다. 그녀가 원하는 생활밀착형 교육이 가장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살아가는 힘을 실어주는 교육 현장이었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2001년 홍은전은 노들야학의 신임교사가 된다.

‘인권에 대해 배우는 것 자체가 권리이다. 무지를 강요하는 것, 내버려두는 것은 인권침해이다.’ -유엔 ‘인권, 새로운 약속’ 중

“장애인 대부분은 자존감이 아주 약해요. 자신이 차별받고 무시 받는 걸 당연시 여기죠. 그들에게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일이에요. 너는 인간이고 인권이 있다. 너에겐 교육받을 권리, 이동할 권리, 자립할 권리가 있다. 학생들은 먼저 해방감을 느껴요. 수 년, 수십 년 자신을 짓눌러온 그들이 나에게도 권리가 있다니 하며 놀라워하죠. 나 역시 해방감을 느꼈어요. 아버지가 워낙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이셨는데 식구들 중 어느 누구도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죠. 4남매 중 유일히 내가 아버지에게 대들기 시작했어요. 아버지 생각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조목조목 설명했죠. 아버지 인생에 가장 굴욕적인 장면이었겠지만 오래 억눌려왔던 내 인생을 해방시킨 날이기도 했죠.”

노들의 학생은 50명으로 대부분 중증장애인이다. 상근자는 10명 정도이고 비상근 교사와 수업보조가 있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이뤄낸 제도적 개선은 지하철 엘리베이터, 저상버스, 장애인콜택시, 활동보조, 자립주택,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복지 예산 등이 있다. 물론 싸움만 한 건 아니다. 싸움의 동력은 교육에 있다고 노들야학 교장인 박경석은 자주 말한다. 노들이 다른 장애인 교육기관과 갖는 차이는 장애를 보는 세 가지 시선 즉, 극복, 동정, 봉사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노들은 장애인을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애가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데 지향점을 두고 있다. 노들에서 ‘봉사’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도 이 때문.

장애인이 배워야 할 기술은 ‘혼자’ 사는 능력이 아니라 ‘함께’ 사는 능력

“노들에서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 중 하나가 탈시설이에요. 예전에 외할머니께서 요양원에 계셨는데 마음이 그렇더라구요. 이건 뭐 죽을려고 사는 건지, 살려고 죽는 건지.”

장애 자체는 개인의 문제일 수 있으나 장애성인이 노동할 수 없어 가난해지고 ‘정상’ 범주에 속하지 못해 차별 받고 이동할 수 없어 혼자 살 수 없는 건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홍은전은 지적한다. 장애가 불쌍한 게 아니라 장애가 소외받는 사회가 나쁜 거다. 이 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집단이 사회 속에 존재한다는 것도 나쁘다.

그렇다면 장애인 인권운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탈시설을 들여다보자. 탈시설, 즉 장애인을 재우고 먹여주는 시설이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특히 숟가락조차 제 손으로 들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라면? 홍은전의 대답은 명료하다.

“활동보조인이 있어요. 말 그대로 장애인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일을 해요. 국가에서 월급도 받고요. 이 제도가 시작된 지 몇 년 밖에 안 되었어요. 아직 시급이 6000원 밖에 안 되고 장애인 한 명이 활동보조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요.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죠.”

노들은 의무부양제 폐지와 최저생활비 현실화도 함께 요구하고 있다. 의무부양제 때문에 기초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온갖 일 다 겪어 보니 ‘너에게 미안해’

홍은전과 노들은 별개가 아니었다. 누가 노들을 공격하면 잠 못 이루며 아파하고 미워했다. 노들과 떨어진 홍은전은 상상할 수 없었다. 치열하고 뜨거운 사랑이었다. 20대 모든 청춘을 야학에 바친 홍은전이 2011년 1년 휴직을 발표한 일은 그래서 더욱 놀랍다.

“회의감이 든 건 아니었어요. 다만 교사에서 사무국장이 되고 하고 싶은 일 보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외롭고 피곤해지기 시작했어요.”

홍은전이 하고 싶은 일은 수업하는 일, 학생들과 여기 저기 돌아다녀 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작성하고 보고해야 할 서류가 잔뜩 쌓이면서 학생과 눈 마주치는 일 조차 버거워졌다. 눈 마주치면 밥 먹는 거라도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30분에서 1시간 소요) 그럴 시간이 없고 모른 척 하기엔 밀려오는 죄책감에 힘들어졌다. 부담은 커지고 자신감은 떨어졌다. 가장 큰 괴로움은 변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애정이 식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어려운 사람 곁에서 힘이 되고픈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애정이 식으면 안 돼 하며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으려구요. 예전에 야학 떠나는 사람 보며 이해하지 못한 적이 많았는데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이 딱 내 얘기네요. 온갖 일을 겪고 보니 너에게 미안해. (웃음)”

2010년에 1년 동안 쉬기로 2009년 초에 말하고 1년 동안 인수인계를 했다. 그만큼 해 온 일이 많았던 것. 정작 자신의 휴가 계획은 전혀 세우지 못했다. 뭘 하며 쉴까 생각하기 위해 고향 삼천포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1년 머물렀다. 무기력하고 우울해진 홍은전에게 고향과 가족은 많은 힘을 주었다. 아직도 야학을 반대하시는 부모님이지만 ‘야학’이라는 금기어만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평온한 가족이다. 공부 잘 해 서울로 유학 보낸 딸에 거는 부모님 기대를 저버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라는 우려에 홍은전은 ‘나 말고도 일손 넘치는 곳 말고 내 손길이 필요한 곳에 있고 싶다’고 대답했다.

1년 쉬고 다시 야학으로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건 산더미 같은 일이었지만 이제는 스트레스 받지 않고 일하는 연습을 한다. 나만큼 나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젠 많은 이들이 보이고 이해된다. 불꽃같은 사랑을 지나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나저나 월세가 천만 원이 넘는 노들야학, 학비도 무료인데 정부 보조금과 후원금으로 교사 월급은 줄 수 있을까. 홍은전씨 월급을 묻자 “많이 올랐어요. 지금 딱 백만 원 받아요.” 한다. 백만 원으로 살기 빠듯하지 않냐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이 유쾌하다. “전 엥겔 지수 높은 편이에요. 지출의 대부분이 술, 담배, 택시비거든요.”

연애 6년차인데 각자 매달 십만 원씩 통장에 넣고 그걸로 데이트 하고 있다. 애인 역시 비슷한 일을 해 만나서 이야기만 해도 시간이 금방 간다는 이 커플의 데이트 경제는 흑자인 달이 많다. 모아뒀다가 가끔 가까운 곳으로 짧게 여행도 간다.

2008년 마로니에 공원에서 80일 천막농성

야학교사로 십 년 넘게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뭐냐는 질문에 홍은전은 한참을 망설인다. 그런 일이 너무 많고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그 때 그 때 다르다며.

“지금은 이게 기억나요. 93년 아차산 중턱에 있는 정립 복지관에서 처음 태어난 노들야학이 2007년 말 쫓겨나게 되었어요. 복지관 내 노조를 돕다가 생긴 일인데 막상 나오니 갈 데가 없었죠. 마로니에 공원에서 80일 동안 천막농성을 시작했어요. 갖고 있던 살림살이도 다 들고 나와 나름 지키려고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천막을 지켰어요. 정립회관 비리를 고발한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장애인인권운동을 알리려는 취지도 강했죠. 학생들은 처음 하는 일이라 재밌어도 하고 교사들 역시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일했죠.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쳐 일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다른 사회단체에서도 지지와 후원이 많았어요.”

쌍용자동차해고자추모를 위한 문화제에 노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것도 이 때문이다. 소외된 이 없이 더불어 잘 살자는 목소리는 연대하면 더 힘이 세지는 법이다. 시민의 후원도 많았다. 무심코 오고가는 사람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의 대학로 유리 건물에 배움터를 얻을 수 있었다. 장애인야학일수록 사람이 많이 오가는 도시중심지에 있어야 한다는 게 노들의 판단이었다. 장애학생들 자립에도 도움이 되고 비장애인에게도 의식변화의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밀불이 되고 불씨가 되자

장애인도 함께 탈 수 있는 턱이 없는 저상버스의 보급률은 현재 서울이 가장 높은 데 20 퍼센트이다. 버스가 평균 10분에 한 대 온다 하면 최악의 경우 4대를 놓치고 한 대를 타야 한다. 40분 정도의 대기시간이 생긴다. 저상버스 이용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노들은 5년마다 교체되는 모든 버스를 100 퍼센트 저상버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낮은 이용률을 핑계로 예산을 늘리지 않고 있다. 좀 더 수익성이 높은 곳에 예산을 집중하고 싶어 한다. 집단에서 소수가 차별받는 시스템은 슬프게도 비슷하다.

절실함과 깡으로 지하철도 막고 한강대교도 막고 버스도 막았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렇게 꽉 막힌 삶을 장애인이 평생 살고 있다고 외쳤다. 홍은전이 노들과 함께 보낸 시절동안 많은 투쟁이 있었고 크고 작은 변화를 일구어냈다. 들판의 교육을 소중히 여기는 이곳에서 홍은전은 수많은 홍은전과 마주쳤다. 장애인이 겪어야 할 수많은 장애와 맞서 싸우면서 홍은전은 자신과도 싸웠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사람인지. 싸움 자체 보다 더 중요한 건 왜 싸우는지 아는 일이기에.

응답 2개

  1. 김주숙말하길

    그럼데도 불구하고 수업합시다 를 급히 구합니다만, 품절이군요. 쿼바디스~

  2. 박카스말하길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하는 기술이 궁금하네요. 은전쌤!”
    “무기한^^ 광화문 농성도 화이팅입니다!!”

    어제는 호식형과 마실을 나서려고 서울 외곽으로 나갔는데 정말 호식형 말마따라 하루는 잡고 길을 나서야하더군요. 건대입구, 구로 같은 곳에는 어째서 아직도 엘레베이터도 없는 건지!

    또 장애인콜택시를 탔는데 기사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도로교통에서 어떤 보완점이 필요하다고 시에 청원서를 제출했더니 회사로 부터 휴직과 반장직 해임 명령을 받았다고 앞으로는 입다물고 살아야겠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 장애인이동과 도로상 불편에 대해서는 이분이 아마도 시청직원 보다 더 많이 알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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