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최전선

- 김모양

나는 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신문 사회면의 그래프, 도표의 퍼센티지 숫자들 중 한 점으로 자리해서 당신들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다. 쥐 죽은 듯 살던 내가 졸업 선물로 88만원 세대라는 딱지와 함께 취업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출산도 포기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선물 받은 후부터였다. 점으로 만들려는 당신들에게 포획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결론은 점이 되어 버린 아니 원래부터 점일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이야기다.

소망? 어릴 때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엄마가 “우리 애는 그림을 잘 그려요.”라고 말할때 짓는 표정때문인지, 내가 스스로 욕망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얀 도화지에 색칠을 하고 찰흙으로 머리 속 생각들을 주물럭 대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막연한 장래의 희망이란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때가 왔다. 고3이 되어 지망과를 선택하고 예체능계열로 수능시험을 치를 준비를 해야 했다. 조각을 하고 싶긴 했는데 당시 전업 화가가 된 막내 고모가 밥 굶기가 쉽상이며 재료비를 대는 것도 힘들다고 말했다. 실제로 막내고모는 자기 말처럼 근근히 먹고 살았다. 그렇게 순수 회화는 선택부터 생존포기를 각오하는 일로 여겨졌지만 디자인의 미래는 달라보였다. 디자인 경영, 디자인 코리아, 삶도 디자인, 열정도 디자인 모든 것을 디자인하는 현재의 기원이 만들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정부는 외환위기라는 시련을 극복해낸 우리들에게 먹고 사는 일, 단순한 기능처럼 투박한 것들을 대신할 창의력과 상상력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디자인을 6.25표어, 대전엑스포 포스터, IMF 포스터그리기 처럼 자로 재어 깨끗하게 그림을 그리는 일 정도로 생각했었다. 나는 자를 대고도 줄을 제대로 못 그었다. 하지만 ‘상상력’과 합치된 디자인은 내게도 틈을 열어 주었다. 대학들도 정부의 산업디자인 육성 정책에 따라 이름이 복잡한 디자인과들을 200개를 더 만들어냈다. 입시과목도 획일적인 석고소묘을 벗어나 ‘발상과 표현’이라는 과목으로 바꾸어 학생들의 가능성을 더 높이 평가하겠고 했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엄마도 자기처럼 살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 살라고 응원해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 입성하려면 대가가 필요했다. 입시 미술을 통과 해야했고 학원비가 필요했다. 엄마는 카드를 하나 더 만들었다. 소망을 가득담아 베팅하듯 매달의 학원비를 결제했다. 내가 입학하던 2002년, LG카드는 카드사 중 최초로 천만 고객을 달성했다. 막연한 인생이란 얼마나 행복한가? 그래도 아직 내게 풀어야 할 인생의 미지수들이, 소거할 항들이 충분히 많은 시간이었다. 하나씩 지워가다 보면 언젠가 정답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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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팅은 실패했다. 나는 전공에서 실패했다. 정확히 말하면 “디자인이즈 비지니스”라는 산업과 소비에 기반을 둔 디자인에서 실패했다. 학교에서는 어떻게 하면 산업 생산품들을 잘 팔리게 할까에 대해 주로 가르쳤다. 내가 입학할 당시 정부는 학문분야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bk21이라는 사업명으로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여러 학교들을 물리치고 bk21을 탈환한 교수들은 한국에도 필립 스탁이 나올 때가 되었다며 학생들을 글로벌 스타디자이너로 키우려는 꿈을 가졌다. 왜 그 있잖은가 그 레몬즙 짜는 기구를 외계인 모양으로 만들었다던, 아무도 그걸로 레몬즙을 짜찌 않고 장식장 한가운데 고이 모셔 두길 욕망한다는 그 물건을 만든 위대한 필립 스탁 말이다. 학과장은 사진 인화법 설명보다 책상 위에 걸터 앉아 “야아 – 너네 남의 밑거름이나 하며 살래?” 로 시작하는 성공학 강의가 더 길었다. 나는 학교에 있으면 과자부스러기가 떨어진 이불에 누워있는 것 처럼 버석임을 느꼈지만 내가 모자라서 그런거라 생각하고 말았다. 내 아이디어는 번쩍이며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을 오래 잡아 먹어도 아이디어가 떠오를까 말까였다. 찰나에 눈을 사로 잡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일도 잘 없었다. LG카드사는 고객들에게 카드 돌려막기라는 새로운 생활 습관과 신불자라는 딱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우리 엄마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뉴스나 신문에서 나왔다. IMF 이후 신문 경제 사회면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한 카드대란이었다.

지금은 숙련되지 않아 힘들뿐이라고, 차근차근 밑바닥 부터 경력을 쌓아가다 보면 실력도 늘고 자리도 잡을 수 있으라 낙관했다. 하지만 학생이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장은 많지 않았다. 자유 경쟁의 바다에 몸을 내던졌다. 아르바이트 싸이트들에 이력서를 올렸다. 손이 느리다고 하루만에 정중히 짤리기도 했다. 테스트를 본답시고 당장 급한 실무일을 해주고 밥만 얻어먹고 돌아 오기도 했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 급하게 일을 해달라 하고, 수업까지 빼먹고 만들어 보낸 원본 파일을 확인하고는 다시 연락 주겠다며 영영 무소식인 적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숙련된 인재가 못되는 나를,그들을 끽소리도 못하게 만들지 못하는 내 디자인을 원망했다. 한번은 수영복 업체에서 수영복에 들어가는 무늬가 필요한데 건당 5만원을 준다 했다. 수영복이 잘 팔리면 그들은 얼마를 벌게 되는 지, 최저시급은 얼마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내가 쓰일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들이 제시한 샘플들을 보며 최선을 다 해보려고 했지만 나는 실패했다. 샘플만 그대로 베껴서 작업해도 3일은 꼬박 걸릴 일이었다. 내 시간은 5000원이상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렇다고 실패한 알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급으로 가장 좋은 대우를 해준 곳은 재능교육 디자인TFT에서 였다. 겨울 방학동안 중국어 교재 편집 작업을 했다. 근무지는 혜화동 사옥이었는데 매일 출근 때와 점심시간에 학습지 노동자가 건물 앞 농성텐트에서 교대로 나와 시위를 했다. 사측에 대한 요구를 적은 샌드위치 판넬을 걸고 아무 말없이 정문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판넬에는 투쟁 일수가 적혀있었다. 3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그들의 외침보다는 점심메뉴가 중요했다. 딱 한번 과장과 대리가 그들을 나와 다른 알바들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구사대로 불려나오면 짜증날 것 같단 말에서였다. 나는 이들과 다른 이유로 그들을 외면했다. 그들이 무서웠다. 몰락이 무엇인지 그들은 내게 똑똑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뉴스나 통계수치에도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같이 근무해서 잘 지냈었다는 경비 아저씨조차도 들어주지 않았다. 미끄러진 사람들의 사정은 그저 변명이 될 뿐이었다. 나는 그저 내게는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잠깐의 기도와 함께 그들의 눈을 피할 뿐이었다.

판넬의 투쟁일수 앞자리 백의 숫자가 8에서 9로 바뀌는 것을 본 지 꽤 지난 어느 아침,출근하자마자 디자인 과장이 일이 당분간 없으니 나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챙겨나올 짐도 없어 몸만 나오면 되었던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냥 이대로 인사를 하고 가면 되나 어쩔 줄을 몰라 복도 정수기에서 물을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미 한차례 알바생이 정리 된 이후 연장된 근무였기에 받아 들이기로 했다. 그때 총괄 팀장이와서 연장근무부터는 임금이 줄었다고 전했다. 구두로 약속했던 것과 다르다고 따지는 내게 “ooo씨가 작업한것에는 실수도 많았어요” 말했다.손이 벌벌 떨렸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말 그대로 개난장을 피워서 차액 13만원을 받아냈다. 모두 나와 내 굿판을 구경했다. 그 중에는 첫날 짜장면을 사주며 알바로 일을 잘하면 정규 채용때 가산점을 받는다며 열심히 하라고 말한 대리도 있었다. 식권 수령 체크표시를 다른 페이지에 한 실수를 식권을 빼돌리기 위한 작전으로 의심했던 총무팀 여직원도 있었다. 내가 그렇게 악다구니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추위에 떨며 길에서 하루를 보내는 그들이 준 투쟁의지가 아니었다. 대리에게 짜장면을 얻어먹을 때 나는 속으로 나보다 안좋은 학교 출신 주제에 누굴 걱정하냐며 비웃었었다. 다시는 이따위 비열한 공간에 오지않겠다. 곧 계절 학기 며칠만 참으면 졸업을 한다. 졸업장을 따서 버젓한 사회인이 되겠다고. 그렇게 되면 다시는 너희들을 볼 일도, 이런 취급 받을 일 없다는 불안한 확신을 떨치기 위한 푸닥거리였다. 나는 이리도 알량했다. 그때 받은 13만원으로 나를 찾겠다며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풀리지 않았다. <홈페이지 제작 3만원>이라는 광고문구가 버스 광고판을 도배할 무렵, 내가 저지른 일의 의미를 알았다. 나는 이제껏 부메랑을 던져온 것이다. 왜 세상은 연결되어 돌고 도는 걸까? 내가 침묵 했던 노동환경은 앞으로도 누군가를 착취할 바탕이 될 것이다. 내가 일조한 중국어 교재들로 공부한 어린이들 중 몇은 글로벌 키드로 자라나 글로벌 경제에 이바지하겠지. 더이상 “지난번엔 이 금액이었거든요.”의 기준이 되어 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식의 경력 쌓기는 더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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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조그만 장소를 만들겠다는 꿈이 생겼다. 나는 공동체 비스무리한 것을 꿈꾸었다. 하고 싶은 일로 먹고 사는 삶의 최소 조건들을 만들고 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첫 시작은 경쟁이나 스펙 쌓기에 지친 나 같은 청년들이 모인 비영리 단체였다. NEET족, 프리터 등 청년세대를 둘러싼 담론들을 벗어나서 새로운 일과 관계를 모색하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홀딱 빠져 들었다. 동네 사람들과 살 궁리도 하고 지역을 문화예술로 가꾸는 커뮤니티 대학의 프로그램들을 기획했다. 자취생들이 복덕방 할배의 인생 얘기도 듣고 부동산 계약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들도 함께 풀어가고, 동네 반찬가게 사장님께 밑반찬 만드는 법도 배우며 소소하고 즐거웠다. 나는 밤을 새워 일하면서 처음에 60만원을 받았는데도 행복했다. 한다하는 시민단체라면 청년문제해결에 발을 담궈야 체면이 서던 시기였다. 재단은 고용노동부의 지원비를 기반으로 청년실업해소를 목적으로 하는 청년단체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자체 운영이 버거워 문화예술분야 사회적 기업에 위탁하고 운영비를 지원했고 나는 그곳에서 일했다. 내 월급과 프로그램의 운영비는 사회적기업의 사회 공헌 자금조의 항목에서 나왔다. 정부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고용 창출이 가능한 새로운 기업체를 많이 만들어 내야했다. IMF때 IT 벤쳐 창업으로 실업률을 낮춘 재미를 본 정부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기로 하고 많은 자금을 투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기업들은 정부를 대신해 사회적이고 공공을 위한 일들을 해야만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정부의 정책이 바뀌고 재단에서 지원금이 줄자 그 기업은 커뮤니티대학활동을 프랜차이즈로 만들었다. 사회적 기업의 주요 고객인 문화 재단과 지역 공기관의 지원금을 받기위한 커뮤니티 비지니스가 되었다. 나의 활동들은 ‘공공재’란 이름이 붙여져 내손을 떠났다. 나는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소유권이 없었다. 처음부터 모두 비지니스 였고 사회적 기업도 기업은 기업이었다. “넌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 ? 설레지 않아?” 이 말을 질리도록 들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의 함정에 빠진 열정 노동자 였다. 그리고 그 마을 대학은 또 다른 열정노동자들을 낚아 올리는 기반이었다. 나는 또 이렇게 다른 부메랑을 던지고 있었다.

디자인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만한 곳을 기웃거리며 이직을 준비했다. 상근자 월급도 어지간히 챙겨 줄 수 있는 규모 있는 사회단체들은 디자인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부를 더 중시했다. 돈으로 못하는 기부는 재능으로 기부하면 되었다. 모든 것은 열정으로 극복해야했다. 착한 일을 하는 선한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었다. 노동 관념이 있는 단체는 영세해서 디자이너를 고용할 수 없었다. 월급을 주는 단체는 디자이너 보다는 활동가이길 원했다. 나는 나에게 월급을 주던 그 사회적 기업에 지원금을 대는 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앙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디자인실력으로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채우기보다 불공정, 불안정 노동의 경험밖에 채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돈도 없고 인맥이라는 관계자본도 없는 비정규 노동 종사자, 프리타, neet 족이라 불리는 청년들을 위해서, 아니 그냥 솔직히 말해서 나의 자립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상호부조조직을 만드는 연구조사를 했다. 계약 만료 시점에 비정규노동문제, 실업문제극복을 위해 만들어진 그 재단이 3개월 단위로 재계약을 하자고 해서 나는 다시 프리타가 되기로 했다. 나는 산업사회의 최전방에서 일어나는 노동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임금 노동에서는 소외가 발생함을 알았다. 나는 무직상태가 되었다. 하고 싶은 일로 먹고 사는 삶은 포기했다. 임금노동에서 자아실현을 꿈꾸지 않기로 했다. <경제 활동 인구조사 표>에서 내자리는 사라졌다. 정말 다른 반란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지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 머리가 났다.디자인이고 하고 싶은 일이고 일단 물려 놓은 채, 지원이 없이도 먹고 살 수 있는 삶을 구성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디자인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열심히 삶을 꾸리는게 디자인이라 생각했다. 나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과 세미나도 해보고 빵을 구워서 팔아보기도 하고 연극도 해보고 이것 저것 해보았다. 그곳 사람들 중 몇몇은 임금노동에 나만큼 지쳐서 그런지 함께 하는 놀이란 말을 좋아했다. 나는 놀이란 말 속에 지워지는 책임이나 수고가 불편했다. 나는 공동을 생각하는 것보다 개인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좁은 바닥에서 어쩌다 디자인을 할 일이 생기면 다른 디자이너일을 하는 친구와 밥도 안되는 밥그릇을 두고 서로 눈치를 보는 것도 피곤해 졌다. 그 곳을 나올때 쯤에는 그 공동체도 유명해져서 여러재단에서 지원금을 따내어 여러 가지 지역 문화사업을 펼쳤다. 나는 더이상 회의를 지연시키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한 구성원으로 자리해 도와주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남은 장소는 책이었다. 모든 착오의 시작을 내가 나를 뒷받침해줄 탄탄한 이론을 가지지 못한 탓으로 보았다. 책에서 디자이너의 사회적 실천을 말할 때 마다 아뜰리에를 버리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버릴 아뜰리에가 없었다. 유명 디자이너이자 교수인 한 사람은 ‘이념을 얻게되면 잃을 것은 프라다 구두 뿐’이라 말하기도 했다. 나는 프라다 구두를 가지겠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는 이념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이념이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더 다른 책들로 손을 뻗어나갔다. 가장 마음에 드는 이론가는 벤야민씨였다. 학교 다닐 때 똑똑하고 재바른 아이들의 파티션책상에는 꼭 그의 책이 꽂혀 있었다. 벤야민은《기술복제 시대 예술 작품》이란 책에서 혁명의 예술 형식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다. 기술의 발전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혁명의 도구가 되어 대중들과 함께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만 읊어대었다. 다시 시작한 배움은 움추린 내 자리을 확장 시켜 주는 듯했다. 낯설기만 했던 혁명같은 단어들도 입에 붙기 시작했다. 그즈음 같이 사는 친구가 아이패드 앱으로 포스터를 뚝딱 만들어 내서 보여주었다. 나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몇번의 손가락 터치로 경험하는 놀라운 기술 민주화 였다. 또 다른 친구는 디자인 프로그램으로 내 눈앞에서 자기가 몸담은 단체의 홍보물 디자인을 하곤 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조차도 쓰일 수가 없었다. 비 전공자인 그들과 차별되어 디자이너로 살아가려면 나는 더 높은 예술성을 지닌,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아우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고 엘리트가 되기 위해 밤낮이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는 내 배움을 배신하는 것이다. 나는 벤야민이 아니었다. 오히려 벤야민이 비웃은 기술의 발달을 감지하지 못한채 사진이 등장하자 먹고 살길이 사라져 허둥대던 초상 화가들 옆이 내 자리였다. 시대에 좌절해 자살한 철학자마저도 내게 곁을 주지 않았다. 그의 혁명은 나의 혁명이 아니었다. 진화에 성공 못한 생물들은 어떻게 울었을까? 난 꺼이꺼이 울었다. 그런데 오래 울 수도 없었다. 빼앗겼다 생각했던 자리는, 활판 인쇄에서 컴퓨터 인쇄로 인쇄환경이 변화하면서, 활판 인쇄공들과 사진 식자공들의 자리를 빼앗아서 만들어낸 자리였다. 게다가 2012년 겨울은 여기저기서 더 큰 좌절로 죽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해였다. 나만 유난을 떨 수 없는 일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원은 작은 정원이 되고, 벤치는 작은 벤치가 되고 , 방은 작은 방이 되면서 이윽고 모든 사물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헛수고를 했다. 모든 사물은 오그라들었다. _ 벤야민, 《베를린의 유년시절》(서울: 도서출판 길, 2012),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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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졌던, 하고 싶은 일로 잘 먹고 잘사는 소망의 미지항들을 모두 소거했다. 어느 하나 비빌 곳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점이 되고 말았다. 내가 던진 부메랑들은 아직도 나와 내친구들의 일당을 깍아내고 있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했던 이름들이 다시 내게 돌아왔다. 태업의 복수로 30대 경력 단절 여성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좋은 먹잇감이다. 당신들은 또 사회문제, 특히 청년과 실업을 운운 할 때마다 나를 뭉뚱그려 숱하게 소비해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짐한다. 오돌하게 돋아서, 결코 쉬이 넘겨지지 않는 까슬까슬한 점이 되겠다고. 그리고 무수히 많은 점들과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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