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최전선

“한 판 신나게 잘 놀았지” -두물머리의 나쁜 언니, 최소영

- 사루비아

작년 가을, 두물머리에 3백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이날 <두물머리 강변가요제>가 열렸다.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간식을 먹고 다시 음악을 듣고,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음식이 마련된 비닐하우스 입구의 대형 지짐판에 부침개가 빼곡했다. 저녁 식사를 일찍 마친 사람들은 술판을 벌렸다. 안주도 푸짐하다. 순대, 소세지 야채 볶음, 김치 부침개, 호박 부침개, 조청 가래떡, 오뎅이 바닥을 보이지 않고 화수분처럼 계속 나왔다. 화수분의 중심에는 생협 언니들의 진두지휘가 있었다. 거기에 최소영이 있었다.

두물머리에는 ‘나쁜 언니들’ 이라 불리는 소그룹이 있다. 소영언니도 그 중 한 명의 ‘나쁜 언니’이다. “나쁜 언니들이라는 말은 임인환 농부에게서 나왔어. 우리가 지은 게 아니야~ 원래 나쁜 언니들은 정영숙, 나, 김양현, 장현애까지 들어가.”

나쁜 언니들 때문에 농민들은 종종 ‘멘붕’이었다. ‘내일 초등학생 토마토 체험 받아뒀으니까 하우스 정리해둬요.’ 언니들은 이런 식이었다. 농민들은 그렇잖아도 할 일이 많은데 하우스 안 방울토마토 가지를 다듬고 정리했다. 안 나가는 딸기가 생기면, 언니들은 딸기 체험 프로그램을 개설해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작년에는 김장 배추 1천 포기를 절여서 팔았다. 아침 7시부터 나와서 한 달 동안 일했다. 모두들 허리에 병이 났다. 농민들은 ‘아이고, 이 언니들 때문에 못살겠다. 정말 농민들을 가만히 두지를 않네!’ 라고 말했다. 언니들은 바로 얘기했다.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지!’ 이것이 언니들이 사람을 챙기고 마음을 쓰는 방식이었다.

“두물머리 싸움이 길어질수록 농민들이 수익이 없었어. 그런데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이잖아. 영농회로 들어가지 못하는 B급 딸기나 적채, 방울토마토 모아서 사람들한테 박스로 팔았어. 동네 사람부터 시작해서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말이지.”

지난 여름, 행정대집행* 날을 일주일 앞두고 두물머리에 텐트촌이 세워졌다. 행정대집행을 막고자 외부에서 사람들이 텐트를 들고 모였다.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용역들에 대비해 사람들이 함께 밤을 새웠다. 하루 평균 100명은 넘게 왔다. 사람이 많이 온 날은 300명이 넘었다. 두물머리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한 번도 끼니를 거른 적이 없다. 제 때,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먹었으며 간식도 두둑하게 먹었다. 뒤에서 밥을 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항상 식사팀에는 ‘나쁜 언니들’이 있었다.

“우린 아줌마들이잖아. 우리가 잘 할 수 있고 조금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게 그거야. 그런데 만약에 우리 같은 아줌마들이 가만히 있으면 그건 뭘까? 우리가 투쟁에 결합하겠다고 갔는데 특별히 할 일이 없으면 그거야말로 정말 어색한 거 아니니? 우리 눈에 보이는 일은 그런 게 보이는 거야. 실질적인 부분.”

나는 투쟁현장에서 밥을 허름하게 먹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언니들 생각은 아니었다. 밥을 든든하게 먹고 가는 게 당연하고 좋은 일이었다. “내가 가끔 하는 말이 있어. ‘아줌마의 마음으로 하면 돼’ 라는 말이야. 사람들이 왔으니까 챙겨서 먹여야 하는 거지. 우리는 맨날 회의하면서 ‘어디 들어오고 있으니까 막아’ 이런 거 아니거든.” 성별분업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언니는 좋고, 잘하고 자기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언니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밥을 하면 하면 부실하게 나왔다. 언니들은 능력자였다.

 

♬ 몸과 마음의 재편

언니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시원스런 말투를 보면 집회 때 발언 꽤나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언니는 두물머리에 들어오기 전까지 싸움의 경험이 없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84학번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그 때 학교 앞에서는 데모가 심했다. 최루탄으로 매일이 시끌벅적 했다.

“난 싸우는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참여하지는 못했어. 나는 별로 아는 것도 없는데 괜찮을까 싶었어. 자신감이 없었지. 주변에 꼬시는 사람도 없었고 말이야. 그런데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 채무감으로 남더라.”

 그는『녹색평론』과 대안교육 잡지『민들레』를 즐겨 읽었다.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대안적인 삶으로 집중되었다. 아파트가 빼곡한 평촌을 떠나 청학리로 이사왔다. 집 주변에 논과 밭만 있는 모습이 좋았다. 2000년에는 한살림(생산자, 소비자 직거래를 통해 먹을거리를 나누는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했다. 지역모임을 주로 했다. 사람들하고 함께 생활재 받고, 강의를 듣고, 현장 답사를 다녔다. “그 때 별내면 소각장 문제가 있었어. 하지만 함께하지 못했지. 난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시기였어. 아이도 혼자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고.  얘기를 하다 보니 마음의 짐이 지금까지 있었던 것 같네. 내가 나이를 좀 더 먹으면 사회봉사를 꼭 하리라 하는 생각이 있었거든.”

언니는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둘 다 대안학교를 보냈다. 공부보다는 다른 것을 잘하는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청학리에서 좀 더 시골로 이사를 가기도 했다. 벌레가 많고 화장실 냄새도 심했지만 자연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큰 아이를 바래다주면서 팔당생협 매장을 발견했다. 그 당시 살던 곳이 한살림과 멀어서 이용하기 까다로웠는데 잘됐다 싶었다. 팔당생협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둘째 아이를 부용리(두물머리 옆)에 있는 학교에 보내면서 2007년에는 팔당으로 이사를 왔다.

 

♬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끌려가면 안되지

소영 언니는 스폰지처럼 두물머리의 활동을 흡수했다. 팔당생협운영위원도 하고, 마을도서관 만드는 일도 함께 했다. 그 당시 두물머리에는 도서관이 없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려면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농이나 양평으로 가야했다. 생협 사람들과 주민자치센터 위층에 ‘씨앗 도서관’을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양수도서관도 생겼다. 아무것도 없다가 도서관이 2개가 되었다.

마을 일을 하면서 가을이(서규섭 농민의 딸) 엄마랑 친해졌다. 가을이랑 둘째 아이 도정이는 같은 학년은 아니었지만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소영 언니는 가을이 엄마랑 학교 행사를 함께 다녔다. 소풍 땐 김밥도 같이 말았다. “두물머리 싸움에 처음 개입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가을이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끌려가면 안되지.’ 이런 생각이었던 거야.”

2009년 봄, 두물머리와 송촌리 두 지역으로 동시에 전경들이 밀려들어왔다. 4대강 사업으로 유기농지를 없애고 대운하 선착장을 만든다고 했다. 공사를 위한 측량을 농민들이 계속 막아섰다. 전경들이 앞서고 그 뒤로 측량 업체 사람들이 들어왔다. 측량을 막기 위한 사람들은 송촌에 더 많이 모였다. 두물머리에 있는 사람들은 열 명 남짓. 전경의 수는 120명이 넘었다. 두물머리에 있던 사람들은 농지로 들어오는 입구를 트랙터로 막았다. 다른 길(11번 교각 아래)에도 몇 명이 섰다. 이 날 언니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공권력과 부딪혔다.

“전경이 밀고 들어오는데 어디로 도망 가야할지 모르겠더라. 나는 여기 땅도 없는데 대체 뭘 지켜야 하는거야? 그 때 이런 걸 생각했다니까. 측량이라도 못하게 하자 싶어서 측량 폴대를 딱 잡았어. 내가 머리가 하얗잖아, 할머니 인줄 알고 전경들이 건드리지 못한거지.”

사람들이 전경에게 붙들려 갔다. 농민들은 논바닥에 주저앉아 풀을 움켜쥐었다. 최요왕(농민)은 ‘농사짓는 것이 왜 불법인 것이여!’라며 소리지르며 울었다. “무섭지는 않았어. 쪽팔렸지. 다른 사람이 날 번쩍 들고 가는데 자존심 상하고 기분이 나쁘더라구. 그 상황에서도 최요왕은 감동적인 멘트를 날리는데 난 뭐 딱히 할 게 없는거야. 어색하고. ‘이러다가 내가 언론에 나가고 인터뷰 들어오면 어떡하지? 난 많이 아는 사람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했어.”

경찰서에 가서 조서를 꾸몄다. 경찰은 언니에게 조서 끝에 ‘잘 봐달라’는 말을 써야한다고 했다. “그 때 내가 물어본 말이 뭐였는지 아니? ‘이렇게 쓰면 농민들이 잘 나오는 거에요?’ 이랬다. 요구하는 말에 나 자신은 빠져있는 거지. 내가 주체라는 마음은 없었던 거야.” 조서를 쓰는 동안에도 언니는 자신보다는 농민들을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는 ‘내가 주체’라는 생각을 가지는 일이 어색했다.

자신의 의미가 필요했다. 생협 사람들과 내성천 순례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모래를 밟으며 강을 걸었다. 곧 이 모래 바닥이 없어진다고 했다. 강의 양 옆을 시멘트로 발라 공원을 만든다고 했다. 큰 산의 허리가 움푹 파였다. 그 자리에 시멘트가 채워졌다. 보를 만든다고 했다. 마을 하나가 없어졌다. 강바닥을 깊게 파고 댐을 설치하니 수몰되었다. 댐 위로는 자전거 도로가 놓였다. 작은 산들은 허리에 빙글빙글 도로를 감았다. 여기에도 자전거 도로가 놓였다. 이것이 4대강 사업이었다.

“눈으로 보니 처참했어. MB가 하는 4대강 사업은 정말 안되겠더만. 4대강 공사는 그곳이 어디든지 반대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 맥락으로 두물머리에서 이루어지는 4대강 공사는 절대 안되는거지. 나의 명분이 생긴 거였어.”

싸움이 길어질수록 정부와 합의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농가가 늘었다. 결국 네 명의 농민이 남았다. 4대강 사업에서 두물머리가 제외되었다. 정부 정책도 변했다. 선착장에서 자전거 도로가 있는 공원으로 바꾼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농사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두물머리 싸움에 힘을 보태던 팔당 생협도 이사장이 바뀌면서 팔당 공동대책위원회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생협 내에서도 두물머리 싸움에 대한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 자꾸 뒷소리가 나왔다. 결합할 고리가 흔들리니 중간에 입장이 난처했다. 한동안 두물머리에 들어오지 못했다.

“두물머리를 보면 미안하고 괜히 부채감이 생겼어. 어떻게 다시 결합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 나는 그 공백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김양현(나쁜 언니들 중 1인) 하고 얘기했지. ‘그냥 가자. 편하게. 이 마음 그대로 가자.’고 말이야. 그 때부터 행사 있으면 가고, 음식을 만들었어.”

 

♬ 한바탕 싸움 잘한 거야

언니도 막판에는 힘들었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 사이에 100% 공유되지 못하는 부분이 늘어났다. 집행부에서는 다른 말들이 오갔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쫒아오면서 둘 사이의 차이가 더욱 크게 드러났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어. 도와주는 마음으로 가면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맞는 거 같은데. 그러면 저 집행부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을 했지.”

언니는 동원되는 느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참여자가 조합원처럼 똑같이 다 소통되고 공유하는 일이 중요했다. 집행부의 역할은 참여자의 말을 정리하고 가닥을 잡아서 도와주는 일이다. 비록 시간이 없고, 사정이 급박하다보면 충분히 의논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지만 말이다. 그래도 두물머리에서는 비교적 이런 것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성숙하진 않았고 장만 펼쳐졌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람 일이기에 100% 모두의 마음이 한 곳으로 수렴되고 모두 웃으면서 끝나지 않았다. 그 안에서 분리되어 나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고, 싸우고, 화해한다. 언니는 여기서 남는 것은 사람들과 그리고 끈끈함으로 이어지는 무언가라며 옅게 웃었다.

“사람이 한결 같지 않아서 힘들기도 하지만, 한결 같지 않아서 정말 매력적인거야. 사람들은 두물머리 협의회가 꾸려져도 결국은 정부가 하고 싶은 일 하게 될 거라고 하더라. 다 깨지고. 음…그렇게 놓고 본다면 한바탕 싸움 잘한 거야.”

언니는 이웃이 힘든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도와주는 마음으로 두물머리 싸움을 시작했다. 싸움의 끝도 도와주는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소영 언니는 두물머리로 이사 오면서 자신이 많이 성장했다고 말한다. 두물머리, 지역의 힘이다. 생협 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시작했고, 아이들 대안학교 뒷바라지로 활동이 넓어졌다. 예전에 언니는 자신을 억지로 꾸며서 마음이 넓은 척을 했다. 지금은 아니다. 자신감이 생겼다. 삶에 있어서의 채무감은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일임을 알았다. 살아보니 경험을 통한 체득과 말로 인식하는 것은 많이 달랐다. 몸으로 경험하여 깨달으니 자연스러워졌다. 예전에는 참여한다고 하면 겁이 났다. ‘아유, 나 못해. 니들끼리 알아서해’라고 말했다. 뒤로 빼는 것이 아니고 진짜였다. 이제는 할 수 있겠다 싶으면 하고 본다. 남이 잘 하는 걸 보면 질투했다. 하지만 이제는 훨씬 편해졌다. 자유로워졌다. “이 나이에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냐?

 요즘 그는 여전히 바쁘다. 지금 언니는 팔당 생협 이사이다. 생협 일도 하고, 씨앗 도서관일도 하고 있다. 낮에는 주로 ‘소꿉’에서 시간을 보낸다. 소꿉은 마을 카페를 만들기 위한 모임 이름이다. 소꿉의 첫 번째 사업으로 월 10만원짜리 공간에 재활용 가게를 냈다. 쏠쏠하게 수입이 생긴다. 조합원 형식으로 출자를 받아 카페를 열 계획이다. 벌써 소꿉2호점도 생각해뒀다. 2호점은 책방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거, 제대로 알아차리면서 살고 싶어. 제대로 알아차리고! 그 생각을 잠시 놓치고 있으면 정말 동원되는 삶을 살아. 나는 살면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었던 적은 없어. 항상 누군가를 도와주는 마음이었지. 이건 좋은 게 아니야. 결국은 길게 못가고 힘들어지거든. 예전에는 남들한테 ‘이기적이야, 얄미워’ 이런 소리 듣는 게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런 소리 듣더라도 잘 살고 싶어.”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도 30분 넘게 수다를 떨었다. 함께 간 친구는 아쉽다며 술 한잔 더 하자고 했다. 소영 언니는 조미료 쓰지 않고 맛있게 잘하는 집이 있다며 동태탕을 제안했다. 나는 ‘우와, 그런 곳이 있어요?’ 라고 물었다. 언니가 대답했다.

 “나 생협 아줌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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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양평군은 농민들의 농사를 금지하라며 경작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공사업체는 두물머리에 하루 빨리 자전거도로를 놓아야한다며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에 대해 두물머리를 지지하는 3,691명은 법원에 탄원서를 냈다. 법원은 양평군이 제기한 경작금지 가처분 신청은 기각시키고, 공사업체의 가처분 신청은 일부만 허용했다. 두물머리 사람들은 승소파티를 열었다. 하지만 그 후 서울지방국토관리청이 행정대집행 계고장을 보냈다. 유기농지 주변지역의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와 농막, 농작물을 강제철거한다는 내용이었다.

응답 1개

  1. 말하길

    이런 분들이 두물머리 싸움을 떠받친 힘이었군요.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충실하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자기 일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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